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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 모브x사기꾼 레이겐
"헉, 헉...!"
개의 악령이랬지 개의 모양을 한 괴물이라곤 안했잖아! 제 옆으로 빠르게 질러진 앞발을 피해 레이겐은 바닥으로 힘차게 굴렀다. 외근나가고 온 길이라 꽤 좋은 외투를 입고 있었다만 구른 걸로 다 망했다. 젠장! 넘어질 때 묻은 것이 부디 세탁으로 다 지워지길 바랄 뿐이다.
현재 시간은 오전 0시 20분. 야근이 필수인 슬픈 현대인이라도 이 시간에는 대부분 집에 있거나 집에 가거나 아무튼 상당수가 휴식을 취하고 업무를 종료하는 때이지만 자칭 시대의 영능력자, 레이겐 아라타카에게 있어서는 왕성한 활동의 시간이다. 매일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런 영능력자인 레이겐이 열심히 도망가는 이유는 오늘 낮의 의뢰인 '공원에서 한밤 중에 개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아무래도 령인 것 같으니 확인하고 제령을 부탁한다.' 라는 의뢰 때문이었다. 범죄는 경찰에게 약은 약사에게 밥은 요리사에게 괴이한 것은 영능력자에게. 적재적소. 헛것과 말도 안되는 것들의 이야기를 듣고 의뢰를 수행하는 것이 바로 영능력자 레이겐 아라타카의 일이었기에 그는 심야에 공원을 찾았고 의뢰인의 말대로 개의 악령을 발견했다. 약간의 문제가 있다면 악령은 악령이었지만 개의 모습을 했을 뿐인 거대한 괴물이었으며
"에쿠보! 어떻게 좀 해봐!"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라, 레이겐. 이 몸이 전성기면 또 몰라도-.'
" 이 도움 안되는 악령같으니!"
'사기꾼이 말도 잘해.'
레이겐 아라타카는 영능력자가 아니었을 뿐이다. 한 때 영능력 유무의 사기로 텔레비전 전파까지 탔으나 무고로 밝혀졌으며 현재에도 착실하게 괴이한 의뢰를 받고 해결하는 영능력자 레이겐 아라타카는 사실 정말로 영능력이 없는 사기꾼이었다. 비록 옆에 초록색의 도깨비불 같은 악령 하나, 에쿠보와 대화를 하고 있지만 그건 이 세상 수많은 예외 중 하나이다. 그에게 영능력은 본인의 능력이 아닌 사업아이템이었으며 특유의 화술과 에쿠보 기준 참 이상한 성실함은 사업의 승승장구 까지는 아니더라도 평탄한 생활을 이어가게끔 만들어주었다. 물론 사기꾼이란 이름으로 위험한 적도 있었으나 그것도 옛날 일이다. 그리고 예전이면 몰라도 현재의 레이겐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사기이되 사기가 아닌 것. 거짓말이지만 속이지는 않는 것.
'야, 레이겐! 더 빨리 달려! 이러다 잡히겠어!'
"무리야, 다리에 힘이 없어...!"
어떻게 땅에 딛고 뛰는지 모를 다리에 감탄이 반, 뒤에서 무섭게 쫓아오는 악령에 대한 힘겨움이 반. 그 두 개의 감정이 레이겐을 힘껏 달리게 하고 있었다. 에쿠보가 빙의해서 뛰게 만들면 편할까 싶었지만 제 몸을 저 악령에 넘기는 것도 껄끄러웠고 몸의 한계치를 끌어내서 도망치다가 잡혀버리면? 그대로 끝나버린다.
이번에는 정말 위험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정말 당신이란 사람은 운이 넘치네요. 행운도 악운도."
날카로운 발톱이 레이겐의 어깨를 스치는 것과 동시에 들려온 단조로운 목소리. 레이겐은 반사적으로 양 귀를 틀어막았고 이내 악령의 높은 비명이 들렸다. 당장이라도 주변에 있는 것들을 찢어 발기겠다는 듯 거친 난동에 나무가 할퀴어지고 바닥이 패였지만 레이겐에게 그건 더이상 위협이 되지 않았다. 양 손을 귀 막고 주저앉으니 바닥으로 데굴 굴러버리긴 했지만 그정도야 목숨에 비하면 하찮은 부상일 뿐이다.
"늦잖아! 죽는 줄 알았어!"
"갑자기 부르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요."
"일이란게 그렇게 원하는 대로 되는 게 아냐!"
"그런가요."
"그래! 너도 사회에 나오면 알게 되니까 그 악령부터 어떻게 좀 해줘, 모브!"
하아. 남자의 부들거림에 어둠 속에서 단조로운 한숨이 빠져나왔다. 모브라 불린 소리, 아니 소년. 목 끝까지 단정하게 잠근 교복을 입은 소년이었다. 어디서부터 걸어왔는지 알 수 없었지만 검은 교복과 검은 머리가 마치 처음부터 있었다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다시 말하자면 크게 눈에 띄지 않는 이미지란 뜻이다. 레이겐이 외친 대로 모브(mob). 말그대로 군중. 주변. 그런 소년이었다. 그런 소년의 행동은 당연하지만 어지간해서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악령만은 반응했다. 모브의 손가락이 움직일 수록 악령도 함께 돌았고 두 개의 손가락이 부딪쳐 튕길 때엔 악령 또한 공중에 터져 흩어지고 있었다. 레이겐에게 있어서는 죽어라 도망가도 살까 말까 하는 악령이지만 모브에게 있어선 그저 한숨과 손짓으로도 충분한 악령인 것이다.
"스승님."
모브는 아직 주저앉아 있는 레이겐을 바라보고는 또 깊은 한숨과 함께 일으켰다. 직접 다가간 것은 아니다. 악령을 퇴치한 것처럼 그저 작은 움직임으로도 충분했다.
"저는 여러번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초능력을 쓰면 안된다고 했잖아!"
"무리에요."
단언하는 소년, 모브. 카게야마 시게오라 쓰며 가짜 영능력자 레이겐 아라타카에게 모브라 불리는 소년이자 그의 제자는 진짜 초능력자였다.
그리고 이건 그런 두 사람의 이야기다.
"몇 번을 봐도 신기하단 말이야."
무엇이? 그런 시선이다. 레이겐은 동그랗게 올려보는 자신의 제자를 내려다보며 오른손으로 공중을 가리켰다. 처음 제자와 만났을 때부터 보였던 초록색의 불덩어리. 모브가 에쿠보를 가리키자 레이겐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 영감은 전혀 없다고 했잖아. 그런데 이게 보인다는게 신기하달까."
'이 몸을 그저 귀신 나부랭이로 취급하면 안된다고. 상급악령이시다. 영력이 벌레만한 너 정도라도 가시화모드를 하면 보이게 하는 것도 우습지.'
"그런 상급 악령이면서 왜 다른 악령을 뜯어먹고 있는건데?"
'으음, 예전에 비해서 많이 약해져서 말이다. 이렇게 보충해서 키우는 거다.'
별 큰일은 아닌지 술술 대답해주었으나 에쿠보'만' 보이는 레이겐에게 있어서는 그냥 뭔가 입을 크게 움직이는구나 정도였다.
모브와 레이겐이 계약을 하고 사제지간이 되고 나서 조금. 몇 개의 제령의뢰를 받아 함께 행동하며 레이겐은 지금까진 알지 못했던 진짜 그쪽 세계에 대해서 다소 알게 되었다. 그 중의 하나는 모브의 제령. 모브의 힘이 너무 압도적으로 강해서 영력에도 손을 미치는 것 뿐이지 영력과 초능력은 애초에 기본적으로 길을 조금 달리한다고 한다. 초능력자와 영능력자가 구분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라고 했다. 따라서 모브가 하는 일은 성불이나 천도가 아닌 말 그대로 제령. 쫓아내고 없애는 일이다. 그에 따라 레이겐은 죽은 자를 만나고 싶다 라는 의뢰는 거절하고 악령퇴치 의뢰는 받기 시작했다. 위험도가 단번에 오르긴 했으나 어차피 모브가 있으니 괜찮겠지 라는 생각이었고 여차하면 거절하면 그만이니까.
"모브. 에쿠보 언제쯤 다 먹는 거야?"
"...아직 좀 남았어요."
"흐음. 보이지 않으니 모르겠네. 에쿠보, 빨리 먹어."
'내 맘이다'
좀 남았다고 해도 보이질 않으니 알 수가 있나.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있으면 좋으려만. 여기에 존재하는 세 개의 개체에서 유일하게 자신만이 두 사람과 다른 광경을 보고 있다. 그 광경은 대체 어떤 모습이지. 그정도의 생각으로 레이겐은 가볍게 모브를 불렀다.
"모브. 궁금한게 있는데."
"네."
"너나 에쿠보가 보는 광경을 내가 볼 수 있어?"
"......."
고민하는 것 같다. 오래 겪어보진 않았지만 단호하고 가차없는 소년은 레이겐이 뭐라고 해도 아닌건 아니라고 하고 싫은건 싫다고 말하곤 했으니 지금 여기서 고개를 젓지 않았다는 건 특별히 안될 일은 아니란 소리다. 끄덕이지 않은건 당장은 힘들어서려나? 방법에 대해서 고민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스승님."
"응."
"에쿠보가 빙의하는 거랑 작게 보는거랑 뭐가 좋으세요."
"작게 보는 거."
'고민도 없구만, 레이겐 놈.'
"너한테 빙의당할 바에야 안보이는 것도 괜찮거든?"
진심이다. 레이겐의 대답에 모브는 제 왼손으로 레이겐의 오른손을 잡았다. 졸지에 마주보게 된 레이겐이 모브를 내려다보았지만 모브는 가만히 그 손을 잡고 있을 뿐이었다. 생각해보면 대부분을 차갑게 거절하는 아이가 스스로 접해온 건 이게 처음이었다. 언제나 막강한 힘을 뻥뻥 내지르고 있다고 생각한 손은 의외로 평범한 온도에 평범한 크기의 손이었다. 거기에 조금 생소해 조용하자 모브는 이상하다는 듯 그를 올려봤지만 레이겐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제 어떻게 하면 돼?"
"이 안쪽으로 건너편을 보면 돼요."
레이겐의 손을 잡지 않은 모브의 다른 한 손이 모브의 어깨보다 조금 더 위쪽으로 올라왔다. 엄지와 검지를 붙여 동그랗게 만든 것이 꽤 오랜만에 보는 제스쳐다. 작은 손이니 동그라미도 작다. 작게 보는 건 시야 폭을 말한 거였군. 저 작은 원 안에 자신은 볼 수 없었던 세상의 시야가 담겨있다. 그 사실이 레이겐을 미묘하게 흥분하게 만들었고 기대는 설레임이 되었다. 모브가 아직 작았기에 허리를 굽혀야 했지만 그 정도가 대수랴. 그렇게 허리를 숙여 고대하던 세상을 본 레이겐의 첫감상은─
'야, 레이겐. 그런데 각오 하고 봐라? 이거 인간으로 따지면 거의 토막사체 같은거니까.'
─욕지거리를 내뱉지 않은 자신을 칭찬하고 싶었다. 분명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음에도 작은 원 안에 보이는 참상은 처참했다. 무언가가 찢기고 흩어져 널부러져 있었고 그런 것을 에쿠보는 태연하게 주워먹고 있었다. 이게 진짜들의 세계. 진짜들의 시야. 영들의 세상. 그리고,
"...다 보셨으면 일어나세요."
고작 13살 소년의 세상, 이라고?
사람의 숫자만큼 상황의 해석은 다르다. 레이겐과 모브는 서로를 마주보았다. 둘은 살아온 시간도 환경도 조건도 무엇 하나 겹치는 게 없었다. 같은 거라곤 조금 일반적이지 않다는 걸지도 모르겠으나 그것도 결국 본인의 기준, 즉 주관적이다. 그 주관적 시점에서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일반적이라고 생각했기에
"모브, 그만해."
"어째서죠."
대화가 공전한다.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껴도 레이겐은 가능한 침착하게 머리카락이 거꾸로 치솟은 아이, 자신이 모브라 부르는 소년을 제지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뭐라도 말을 해야 모브의 감정이 진정하리라. 안그러면 지금 모브의 손 안에 잡힌 남자가 죽는다.
"나는 괜찮아."
"그렇게 안보여요."
"무사하잖아."
"당신의 기준은 꽤 낮군요."
"모브."
"스승님."
서로를 부르는 말에는 상대에 대한 질타가 담겨 있었다. 제 말을 듣지 않는 모브에 대한 질타와 어째서 말리는지 이해할 수 없는 레이겐의 행동에 대한 질타. 레이겐의 예상대로 모브는 남자를 죽일 생각이었다. 서로간의 이득을 위한 계약관계라 할지라도 모브는 이 장소와 영력은 벌레만한 남자를 받아들였고 자신의 장소에 멋대로 침범해 멋대로 구는 이들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더군다나 자신들의 폭력과 힘만이 최고라 믿는 이들은 모브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들이었다. 이유도 없이 죽는 인간들에겐 조금의 미안함이라도 있었지만 이런 것들에게까지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폭력으로 다가왔으니 폭력으로 돌려줬을 뿐이며 애당초 이제와서 한두 명 더 죽인다 한들 수첩에 사선이 두어개 늘어날 뿐이니 부담도 없었지만 레이겐이 저를 말리는 것은 납득가지 않았다.
"모브, 제발. 이대로는 상황이 나아지지 않아. 내 말을 들어. 말 그만해. 아니, 네가 스승이라 부르는 내 말부터 좀 들어."
스승.
그렇게 부르기로 했었지. 그렇게 부르고 있었고. 모브는 가만히 그와 주변을 바라보았다. 감정의 흐름에 몸을 맡기면 언제나 이지경이었다. 그나마 레이겐이 일반인이라는 의식이 있었기에 빠듯하게 건물은 무사했지만 사무실은 난장판이었고 자신보다 먼저 여길 난장판으로 만들었던 남자들은 솔직히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손 안에 잡힌 남자의 맥박이 뛰고 있을 뿐이었고 레이겐이 말리지 않았다면 모브는 이 맥박을 잡아 뜯을 예정이었다. 당신을 해한 자를 해할 뿐인데 막아서는게 이상했다. 그래, 이상한 사람. 첫 만남부터 느낀 감정이었으나 그래도 그런 그를 믿어보겠다고 먼저 말한건 누구도 아닌 자신이다.
감정이 완전히 다스려진 건 아니었지만 필사적으로 보이는 자신의 '스승'의 앞에서 '제자'가 말을 듣지 않으면 계약에 의미가 없겠지. 모브는 한숨과 함께 힘을 천천히 본인의 안으로 갈무리했다. 중력과 반대로 펄럭이던 머리가 내려왔고 마구잡이로 일렁이던 힘도 제대로 수습했다. 남자의 몸이 모브의 손에서 빠져나가 맥없이 바닥에 굴렀지만 의식이 없어 별다른 소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신은."
비록 허울에 거짓말이 섞여있다고 해도 서로의 동의하에 스승과 제자라 부르고 있었다. 소꿉놀이라고 해도 좋았을 호칭을 들이밀어 효과를 보리라 생각하진 않았건만 예상과 달리 모브는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았다. 납득하진 않았겠지만 일단 들어보겠다는 뜻인 듯 했다. 그제야 레이겐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고 레이겐의 머리에 들러붙어있던 에쿠보도 지친듯 떨어져나갔다. 가히 만능이라 부를 수 있는 모브의 초능력은 물체에 힘을 불어넣고 타인에게 제 힘을 양도하거나 갈취할 수도 있었으며 목소리로는 세뇌가 가능했다. 그래서 모브의 감정이 급격하게 기울자 에쿠보는 가장 먼저 레이겐의 머리에 달라붙어 모브의 힘을 차단했다. 세뇌와 힘으로 눌러버린 대화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특히 말로 살아남은 이 남자에겐 더욱.
'잘해봐라'
의도는 몰라도 악령의 호의다. 그걸 무의미하게 돌릴 생각은 없지만 대체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정리해야 좋을까. 잠시 주변과 모브를 번갈아본 레이겐은 테이블에 막혀 날아가지 않은 의자를 하나 끌어와 앉았다.
순식간이었다. 너무 간단했다. 입 좀 털던 시절에 업보가 되돌아 온 것도, 각목이 자신의 머리를 내리 친 것도, 얻어맞고 넘어진 것과 모브가 들어온 것도, 그 모브가 자신에게 다가온 남자 하나를 파리 쫓듯 손으로 휘저어 벽에 처박아 버린 것도 너무나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너무나 간단했다. 악령을 쫓고 찢던 초능력. 그 힘으로 모브는 차례차례 치워나갔다. 사람이 길가에 쓰레기를 버리듯 날아가는 건 생전 처음 봤다. 그리고 마침내 모브가 나를 내려친 남자에게까지 다가왔을때, 각목을 봤을 때.
"...모브."
"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그 때 처음으로 레이겐은 제 인생에서 처음 겪는 감정을 절실히 느꼈다.
"사람에게 초능력을 쓰지 마."
모브는 이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뭐라고요?"
"사람에게 네 초능력은 너무 위험해. 막말로 네 주먹이 좀 쎄서 이 녀석들을 때려 눕히는 것 정도까지는 좋다. 나도 좀 시원할지도 몰라. 나도 얻어 맞았거든. 그렇지만 모브, 이건 아냐. 지나쳐. 과잉방어 수준이 아니야."
"당신도 맞았잖아요."
"그럼 잘해야 쌍방과실....아냐, 아니야. 모브, 그게 중요한 게 아냐. 모르겠어? 너는 지금 사람을 죽이기 직전까지 만든거라고!"
"그럴 생각이었으니까요."
"모브!"
처음도 아닌데-라 말하려던 모브는 그제야 자신이 그에게 제대로 자신에 대해 설명한 적이 없음을 알았다. 첫 계약때 연락처를 얻고 계약을 하긴 했지만 손톱에 대해서도, 자신에 대해서도 무엇 하나 제대로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태연히 모브라는 별명으로 부르고 툭하면 제령으로 불러낼 수 있었나. 자신이 사람을 죽인 적이 있고, 죽이고 있고, 그보다 위험한 사상을 가진 집단의 간부라고 말하면 이 사람은 도대체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여기서 위험하다고 발을 빼면 곤란했다. 아직 모브에겐 이 사람이 필요했다.
모브가 어디까지 말해야 하나 고민하는 동안 레이겐 역시 깊게 느끼는 감정에 당황하고 있었다. 책임감. 단 한번도 가져본 적 없는 마음이었다. 모르는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맡은 일에는 돈 받은 만큼을 하는 이상 책임감을 느끼지 않은 적은 없다고 하는게 맞다. 그러나 사람에 대해서 그것이 향한 적은 지금껏 없었다. 그 누구도 곁에 둔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감정을 느꼈다는 것 자체에서 레이겐은 당황하고 있었다. 어째서 만난지 얼마 되지 않은 애한테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모른다. 모르겠지만.
그래도.
"초능력은 그런곳에 쓰라고 있는 게 아니잖아."
그런 참상을 봐도 눈 하나 깜짝 안하던 아이가 제 말 한마디에 동요하는 걸 보고 지나칠 순 없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네 초능력은 제령하거나 너의 필요에 의해서 사용하는 건 맞지만 사람에게 쓰는 건 아냐."
"납득할 수 없어요."
"힘있는 사람이면 길가던 인간을 패도 되냐? 단순히 힘이 있다고. 그거랑 마찬가지야. 네 초능력이 특별하지 않다는 건 아냐. 하지만 특별한 것도 아냐. 그저 사회에 살아가는데 있어서 기본적인 상호간의 존중을 지키라는 소리야."
"이들이 길가던 사람인가요? 당신을 해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가진 힘으로 막았을 뿐이에요."
"막은게 아니라 두들겨 팬거지. 네 초능력을 그렇게 값싼 걸로 만들지 마."
"당신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요. 레이겐 씨."
호칭이 변했다. 레이겐은 반사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목소리에 힘이 실리면 세뇌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 뜻을 방금 이해했다.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기 의견임에도 강한 명령이 머리에 떠올랐다. 이해할 수 없으니 이해가 가게끔 설명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동시에 이해할 수 없다며 그 말을 따라야 한다는 본능. 이게 바로 세뇌며 모브가 대화를 길게 하지 않았던 이유다. 사전에 알지 못하고 정신차리지 않는다면 자신이 세뇌당한다는 사실도 모르게 생각이 뒤집혔을지도 모른다. 물론 모브가 마음만 먹는다면 에쿠보가 없는 이상 그의 머릿속을 뒤집는 거야 일도 아니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각자의 할 수 있는 일이 있죠. 당신은 말로써 설득하고 이 사람들은 힘으로 휘두를 수 있다면 나는 초능력을 사용할 수 있어요. 이게 뭐가 다른지 모르겠어요. 당신에겐 초능력이 신기할 지 몰라도 나에겐 태어나면서부터 숨쉬는 것 마냥 당연한 거였고, 그렇게 살았어요. 대체 뭐가 틀렸고 다른거죠?"
기껏 갈무리한 감정이 다시 올라오는지 모브의 주변의 물건들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감정에 몸을 맡기면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기 때문에 늘 참고 지낸다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무표정 안에 숨어있었나.
"모브. 사람은."
당장이라도 그의 말을 따르라는 강한 명령신호가 뇌에서 울리고 있다. 그래도 사실 상관 없다고 생각한다. 초능력을 사용하든 말든 자신이 무슨 상관인가. 초능력자가 초능력을 사용한다는데 솔직히 거기다가 사용하지 마 라고 말하는게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레이겐은 입을 열었다. 눈 앞에 있는건 자신의 계약자고, 의뢰자며, 초능력자지만, 아이잖아.
"혼자 사는게 아니야."
그리고 자기는 어른이다. 초능력자라든가 어디에 소속한 대단한 사람일지 몰라도 레이겐의 눈앞에 있는 모브는 오죽 기댈 곳이 없어 사기꾼인 자신에게 돈만 들고 찾아온 멍청한, 아이였다.
"정도라는 걸 좀 알아라, 멍청한 꼬마야."
할 말은 더 많았지만 강한 명령신호를 뿌리치며 간결하게 할 수 있는 말은 이정도였다. 레이겐의 말이 끝나는 그 순간 물건의 흔들림이 모조리 멈췄다. 영력이고 뭐고 없어 아무것도 보이진 않았지만 바람이 불지 않았음에도 이리저리 휘날리던 먼지들도 더이상 날리지 않았다. 서로 지지않는 대화의 공방이 멈춘 사무실은 무거운 침묵으로 가득 찼다. 마주보는 두 눈은 서로를 피하지 않는다.
"...당신이니까."
먼저 포기한 건 모브 쪽이었다. 애당초 레이겐을 말로 이길 수 있을리가 없었다. 그와 계약했던 것도 다 그 말 하나로 상황을 타개해나가던 기자회견을 목격하고 나서가 아니었나. 모브는 한숨과 함께 양 허리에 손을 올렸다. 그다지 힘을 쓴 건 아니었지만 제 앞에서 절대 지지않을 남자가 버티고 서있으니 정신적으로 꽤 피곤했다.
그러나 그런 걸 바랐다. 초능력 같은 게 아니라 그저 제대로 마주할만한 사람을 찾고 있었다. 모브는 레이겐의 말 전부를 이해하진 못했다. 납득하지도 못했다. 지금껏 살아온 곳과 너무 다른 이야기만 한다. 아마 그게 자신이 아직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사회겠지. 그리고 그게 일반적인 세상일 것이다.
"당신의 말이니까."
한숨이 나왔지만, 상쾌했다. 이렇게 솔직하게 대화한 적이 언제였더라.
"...스승님."
"오냐."
"초능력을 사람에게 사용하지 않을 순 없어요. 제가 속한 단체는 초능력자들로 이루어졌고, 그들은 사용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제 가족이 위험해요."
"잠깐, 그런이야기는 안했잖아!"
"지금 하잖아요."
"그런건 진작해!"
"그러니까 스승님의 말은 들을 수 없어요. 대신 당신과 함께 있을 때 만큼은 지킬게요. 당신과 함께, 당신을 스승이라 부르고 내가 당신의 제자로 있는 그 순간 만큼은 당신의 말을 듣겠어요. 사람에게 초능력을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그게 모브가 레이겐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타협점이었다. 레이겐 역시 알았다. 사실 레이겐에겐 이러니 저러니 상관 없는 조건이었다. 말을 하나 더 듣는다는 소리였다. 이 아이는 첫 만남때부터 그랬다. 왜 자신이 훨씬 유리한 점을 잡고있음에도 자신에게 불리한 점만, 약점만 자신의 손에 올려주는걸까.
"...모브. 대체 넌 나한테 뭘 원하는 거야?"
아마 지금이 아니면 물어볼 일은 없으리라. 레이겐의 물음에 모브는 느리게 눈을 한번 감았다 떴다. 그 한번으로 모브의 표정은 레이겐이 익숙하게 아는, 무슨 표정인지 전혀 알 수 없는 가면같은 얼굴로 되돌아왔다.
"그건, 언젠가."
"야, 모브. 수고했다. 덕분에 살았어. 그리고 이렇게 집에도 편히 가고있으니 말이야."
"당신말이지...."
대놓고 나오는 한숨에도 레이겐은 당당히 웃으며 모브의 등을 쳤다. 닿는 것이 싫은듯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배리어도 풀지 않고 빠른 속도로 날아가면 멀미해버리는 자신을 위해 속도도 유지하는 것이 퍽 귀엽다. 사람에겐 초능력을 쓰지 말라고 앞에선 말했지만 이런 일에 사용하라는 자신의 이중성에 짜증이 나서 그럴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결국 도와주는 걸 보면 이러니저러니 이 꼬마는 사람을 돕는 것에 초능력을 사용하는 걸 좋아한다.
악령 퇴치 이후 다리에 힘이 풀려 걸을 수 없게 된 자신을 본 모브는 방금과 같은 한숨을 내쉰 후 초능력으로 그와 자신을 들어올렸다. 하늘로 날아가는 자신들을 누군가 목격할까봐 비가시화 배리어까지 치고서 말이다. 처음에는 두 발이 아무 것도 없음에도 두둥실 떠오르는 것에 허둥지둥 꼴이 말도 아니었지만 몇번 경험하면 당연히 익숙해진다. 레이겐은 둥실둥실에 몸을 맡기며 드러누웠다. 인간이 무언가의 도움 없이 하늘에 떠오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래서 동력이 만들어지고 비행기가 만들어지지 않았던가. 그러나 지금 자신은 어때. 하늘에 떠있다. 아득히 펼쳐지는 밤하늘을 특등석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모브, 오늘 자고 간다고 집에 말했어?"
고개를 젓는다.
"그럼 저녁에 몰래 나온 거야?"
"......."
그것도 아니라면, 아마 '그' 일이다. 레이겐은 더 묻지 않고 양 팔을 쭉 뻗었다. 오늘 나름대로 일찍 불렀음에도 한참이나 있다 온 건 아마 그쪽을 처리하고 와서 인 듯 했다. 분명 초능력으로 날아와서 그렇게 힘들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날아온 것이 꽤나 기특했다.
"자고 가도 되는거지?"
"네."
"그럼 우리 집으로 바로 가자. 타코야키는 없지만 음료수 정도는 주마."
"네."
건조하고 짧은 대답. 하지만 분명 말은 하고 있다. 에쿠보가 없기도 하고 아까 긴 대화가 조금 신경쓰이는 모양이겠지만 같이 지낸 지 1년. 기행도 이상함도 어느정도 익숙해졌으니 편히 말하면 좋으련만. 물론 말은 하지 않는다. 말을 해서 들을 아이가 아닌 건 이 1년 사이 충분히 익혔으며 모브의 태도는 어느 의미로 합당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지금 이렇게 대화가 어느 정도 진행이 되며 모브가 스스로 말을 하는 건 대단한 진보가 아닐 수 없다.
"모브."
"네."
"와줘서 땡큐."
"...수고하셨어요, 스승님."
1년 전에 비하면 이게 어디야. 레이겐은 살짝 돌아보는 모브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 - -
그날은 레이겐 아라타카의 인생에서 모든 일이 가장 많이 꼬인 날이었다. 승승장구는 아닐지언정 무난하고 평탄하게 가야 할 내 인생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 레이겐은 번쩍이는 플래시들 앞에서 멍하니 제 인생을 곱씹었다. 말이라면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었는데 무슨 말을 해야할 지도 모르겠다. 일단 침착하게 그동안 무너진 이미지를 다시 올려야겠지. 거기까지 생각한 레이겐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왜들 모였지?"
그 의문은 고스란히 입으로 빠져나왔다. 이크, 심했나. 그러나 레이겐은 후회가 없었고 발칵 뒤집어진 건 기자회견장이었다. 니가 열겠다고 했다는둥 사람 무시하냐는 둥 기자들 사이에서 질문이라고 할수도 없는 발언들이 쏟아졌지만 긴장이라는 이성을 탁 놓아버린 레이겐을 흔들기엔 역부족이었다. 질문은 아무래도 좋았고 자신의 이미지도 이젠 상관 없었다. 그냥 자기 치고는 오래 버틴 사업 하나를 접을 뿐이다. 어차피 1년 쯤 할 생각이 아니었던가. 필사적일 필요가 없다. 어떤 의미로는 27년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이렇게 화려하게 사업을 접고 얼굴이 팔리면 당분간 일은 무리려나....
"당신의 사기 행위에 대해 몇가지 질문이 있는데..."
그런 무기력한 레이겐의 머리를 떡 치는 질문이었다.
"잠깐 기다려 봐, 사기라면 내 사업? 내가 하는 일이 사기라는 증거 있나? 영능력? 없다고 증명할 사람 있어? 사기라고 했지. 그럼 피해자를 데려와보시지."
"피해를 입었다는 사람들이라면 몇이나...!"
"네네, 자칭 피해자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합니까!"
"진실이 판명되지 않았으니까."
명백하게 따지고 들자면 사기이긴 하다. 자신에겐 영능력이 없으며 실제로 제령을 한 적도 없었다. 태어나서 지금껏 무서운 경험도 한 적 없다. 당연히 유령이고 이상 현상이고 본 적도 겪어본 적도 없다는 소리다. 그런 스스로가 영능력자라는 타이틀을 걸고 '영(靈)등등 상담소'같은 걸 하고 있으니 거짓말이란건 맞다.
"그동안은 나도 아직 범죄자가 아니라 자칭 영능력자야. 발언을 조심해 주시지."
그렇다고 범죄자라는 오명은 지양했으면 한다. 사기로 범죄를 저지르는건 삼류나 하는 짓이며 자신은 사기를 쳐도 범죄는 저지르지 않았다. 영력은 전혀 없는 것 같아 실제 악령에 시달리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제 사무소에 온 자들에겐 그 나름대로의 처방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애초에 악령이란게 그렇게 많고 흔한 건 아니다. 실제로 찾아온 이의 대부분은 그저 고민이 악화되어 몸으로 스트레스가 나타났을 뿐이기에 적당한 상담과 안정시킬 수 있는 분위기, 굳은 몸을 풀어주는 마사지로 해결했다. 악령을 제거하지 않은 점에서는 사기일지 몰라도 그들의 돈을 쓸데없이 떼어먹거나 한 건 아니란 소리다. 그리고 애초에 자신의 사무소는 '영등등(等等) 상담소'다. 영적인 것 외 에도 상담하는 곳이라 이거다. 그 점에서 레이겐은 떳떳했다.
"당신은 영능력이 있습니까?"
"노코멘트 입니다."
"무슨 소리야! 왜 대답을 못합니까!"
"「없다」는 대답을 들어야 만족하실 테니까. 영감이 없는 댁들은 「있다」는 걸 증명할 수 없잖아요."
"궤변으로 넘어갈 생각입니까?"
특기거든. 레이겐은 당당히 웃었다.
"궤변? 그럴리가. 애초에 말이지, 이런 거 가지고 이러는 거 우습지 않아? 영능력?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떤데?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오른건 나의 영능력 유무가 아닌 당신들이 말하는 사기행위에 대한 부당함을 말하기 위해서야. 영능력을 떠나 나는 의뢰자들의 고민과 의뢰를 듣고 그것을 해결했어. 내 능력 이상의 것은 거절하고. 누구라도 거절은 할 수 있잖아? 나도 그랬을 뿐이야. 그리고 당신들 기자들도 참 그래.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 라고 단정짓는 물질론적인 발언은 언론인으로 좀 아니지 않나? 기자란 본디 물밑의 보이지 않는 진실을 알리는 게 소명 아니던가?
이야기를 돌리지. 영능력. 그건 인간이 가진 개성이야. 당신들은 보이지도 느낄 수도 없으니 내가 보여줄 방도는 없어도 말이야. 하지만 이런 게 영능력 뿐인가? 달리기가 빠르면 앞에서 달리면 되고 수영을 잘하면 물에 뛰어들면 돼. 그렇지만 그렇게 보여줄 수 없는 개성도 많아. 화술은? 접대는? 배려는? 그것도 사람의 개성이야. 인내, 노력, 성실. 너희는 이런걸 지금 이 자리에서 보여줄 수 있나? 이런 개성을 표현할 수 있나? 없잖아. 다를 바 없다고, 영능력도. 엄연히 존재하는 개성인데 보이지 않고 증명하기 어렵단 이유로 없다는 말로 퉁치는건 앞서 내가 말한 개성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소리야. 자, 할말이 더 있나?"
무슨 소리냐 이거.
레이겐은 뚫린 입에서 나온 말을 머리에서 곱씹었다. 정말 특기에 궤변 이라고 적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줄줄 나온 말들이었다. 동시에 본인을 납득시키는 말이기도 했다. 그래, 나는 정말 없지만 진짜 있는 놈들도 있을 수 있다. 비록 자신은 특별하지 않지만, 그런 특별한 사람도 있다. 지금 여기서 물러나면 그 '진짜'들을 물먹이는 꼴이 되어버린다. 정말로 특별한 '진짜'들이라면 이정도의 타격으로 흔들림이 없을거라 생각하지만 자신과 같은 업자들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레이겐 역시 그런 인생을 살고 있었고 막연히 또 그런 삶을 살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 시장을 상당히 말아먹는 짓을 할 순 없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웃기는 일이지만 지금은 터진 입에 감사했다.
"....지, 질문하겠습니다!"
"해보시죠."
기선은 잡았다. 기자들은 서로간의 눈치만 보며 제가 한 궤변을 받아적기 바빴고 용기있게 손을 든 기자 역시 허둥지둥 자신이 준비한 자료를 찾았다. 그러나 승기는 레이겐에게 흘러가 있었고 상담소에서 하듯 말은 유리하게 자신에게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미지의 타격은 어쩔 수 없지만 오히려 이게 자신의 사업에 홍보가 될 수도 있겠다. 그렇게 레이겐이 확신하던 순간이었다.
"왜 영능력 사업을 시작했죠?"
"왜냐...."
이 대답이 중요하다. 레이겐은 고민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다니던 회사도 지겨워 때려치운 겸 차린 사무실이었다. 사업아이템으로는 속여먹기도 쉽고 적당히 구슬리기도 쉬워 선택했다고는 하지만 왜 그 많고 많은 것 중에 영능력이었는가. 적당한 대답은 머리에서 조각난 문장으로 돌았다. 영능력자로서 사람들의 고민을 해결하는 것이 좋았다 라든가 악령퇴치에 강하다던가 여러 변명이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아까와 달리 조각들은 완전한 원형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레이겐의 머리 속에서 뱅뱅 돌기만 했다. 왜 영능력이었나.
왜?
그 순간 땅이 울렸다. 마치 지진같은 소리에 기자들은 당황하며 회견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레이겐 역시 당황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 때 보고 만 것이다. 어둠 속에 나란히 있는 기자들이기에 눈치채지 못하고 단상 위의 스포트라이트 아래 있는 레이겐만이 목격할 수 있는 고요함. 웅성거리는 사이로 단 하나의 정적이 레이겐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머리와 검은 옷. 신경쓰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을 무난한 소년이 있었다.
첫 만남이었다.
- - -
그렇게 1년. 스스로에게 있어서 가장 특별하고 가장 위험하고 가장 정신없는 1년이 아니었나 레이겐은 곱씹었다. 가짜 영능력자 노릇을 하다 진짜 초능력자를 만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악령을 목격하고 제령까지 보았다. 가짜가 아니라 진짜로 능력이 있는 자가 능력을 사용하는 것을 목격하고 경험했다. 정말 어디에 내놔도 믿기 힘든 이야기가 가득한 1년이었다. 그 대단함과 경이로움을 알리 없을 자신의 제자는 오늘도 변화없는 얼굴로 레이겐이 준 우유를 마시고 있을 뿐이었다.
"모브."
"네."
"처음 만났을 때 기억 해?"
"그런데요."
뭔 헛소리를 하냐는 듯 보고있는 눈에는 조금 기가 죽었지만 그래도 레이겐은 입을 열었다. 1년이다. 그 날 이후 1년. 최초에는 일단 상황을 타개해야 하니 냅뒀고 조금 지나서는 궁금했지만 모브는 레이겐의 의지대로 움직여주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래서 반쯤 포기하고 있었고 후반에는 솔직히 거의 잊고 있었다. 그러나 1년이라는 기념적인 시간에서 레이겐은 떠올리고 말았고 남남이던 예전과 달리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라는 제멋대로의 관계를 맺으며 나름대로 가까워졌다. 혼자만의 생각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레이겐에겐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란 확신이 있었다. 재미삼아 시작한 사제관계라고 해도 그 이후 모브는 언제나 레이겐에게 '스승'이라 꼬박꼬박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 날, 두 사람은 기록이 없는 계약을 했다.
"그럼 그 때 우리가 했던 대화를 기억해?"
레이겐의 말에 덤덤하던 모브의 표정이 처음으로 움직였다. 놀란 것도 같고 당황하는 것 같기도 하다. 대충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란 의문을 떠올리고 있을까 짐작할 뿐이다. 어쨌든 소년은 자의로든 타의로든 말을 길게 꺼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모브가 찢어놓은 악령을 먹기위해 따라오지 않은 에쿠보의 설명에 따르면 너무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행동에서도 어디서 어떻게 힘이 튀어나올지 모른다고 한다. 힘이 너무 강대한 탓이다. 단순한 목소리마저 힘에 먹히면 존재하는 것은 명령을 받들고 심하면 세뇌까지 당할 수도 있을 정도라 한다. 모브는 그저 대화를 하고자 했을 뿐임에도 말이다. 지금이야 모브와의 대화나 힘에 적응을 해서 어느정도의 대화엔 무리가 없지만 레이겐과 모브가 처음 만났을 때는 대부분 에쿠보가 말을 전했으며 에쿠보가 그러지 못할 때는 모브가 가진 수첩을 이용한 필담으로 대화를 하곤 했다.
"...네."
"우리 계약했지. 네가 내 일을 도와주는 대신 너는 이야기를 하고 싶으니 들어달라고."
"그랬었죠."
"그런데 우리 벌써 알고 지낸지 1년이란 말이야? 가끔 네가 늦거나 약속된 때에 안오거나 죽기 직전에 도와주거나 그러긴 했지만 내 일을 잘 도와주긴 했어. 그러니 너는 계약을 잘 이행하고 있는데, 나는 하나도 못하고 있단 말이지. 너는 내가 물어봐도 아무런 말을 안했잖아."
"......."
"기왕 스승인데 알아야 할 건 알아야하지 않겠냐."
받아먹고 끝내기엔 레이겐이 확실하게 받은 것이 많았다. 자신이 사기꾼이긴 해도 삼류와 달리 받은 만큼 일은 한다. 그런 자신에게 제 앞의 제자는 바보같은 짓이라며 일축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브는 레이겐을 따랐다. 부르면 왔고 제령하고 찾아보고 심지어 벌레까지 제대로 잡았다. 이때만큼 한심하게 보인 적이 없다고 해도 모브는 레이겐을 '스승님'이라 부르며 따라오고 있었다. 목적은 몰라도 14살의 중학생 아이에게 1년정도 이렇게 받기만 하면서 있기는 그랬다. 솔직히 좀 잊어버리긴 했었지만 그건 그렇다고 치자.
"......."
말이 없다. 곤란해하고 있는 거 같기도 하고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 의도가 아닐지라도 말에도 힘이 실려 상대를 강제로 제약할 수 있는 힘도 있어 대화가 극명히 없다보니 이럴 때 어떻게 말해야 할 지 모르겠지. 그런 녀석이 '이야기가 하고 싶다' 고 자신과 계약한 것이다. 입만 산 사기꾼에게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레이겐은 문득 자신이 모브에 대해 아는 게 그다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태로군. 대화와 상담의 기본은 상대방에 대한 사전지식이건만.
"좋아, 모브. 일단 이렇게 하자. 일단 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봐."
"...저요?"
"그래. 모브, 잘 들어라. 이야기란건 어려운 게 아냐. 아니, 어렵긴 하지만. 너도 들어봤지? 무언가를 가르치기 위해 선생은 학생의 10배 정도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거. 누군가에게 전달한다는 건 그런 거야. 그 사람이 모르는 걸 전달하려면 네 스스로가 아주 잘 이해하고 있어야지. 여기까지 이해 돼?"
"네."
"그래. 너랑 나랑 처음 만났을 때, 네가 그랬지. 이야기가 하고 싶다고. 내가 너에 대해 아는건 그리 많진 않아. 초능력자고, 14살, 중학생. 가족이 있고, 어떤 단체에 있다는 것. 맞지?"
"...네."
"그리고 그 단체에는 너 말고도 다른 초능력자들도 있고 말이야."
"...네."
"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 단체와 너에 대한거고?"
"......네."
빠각, 하며 모브가 들고있던 머그에 금이 갔다. 소년의 악력으로 머그컵을 부술 순 없으니 남은 건 자신도 컨트롤을 다 하기 어렵다는 강대한 힘이 작용했을 것이다. 우유를 다 먹어서 무언가 새어나오진 않았지만 자신의 질문이 모브에게 상당한 스트레스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저걸 이겨내야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자신들의 계약도 이행이 되는걸까.
"그러니까 일단은 너에 대해서 좀 더 나에게 설명해. 스승인 이 몸이 진지하게 들어줄테니까."
"...스승님도 아시겠지만 저는 말이, 좀...서툴러서."
"아아, 맞아. 알아. 그러니까...."
여기가 집이라서 좋은 점은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쉽게 안다는 점이다. 레이겐은 곧바로 일어나서는 책장에서 비닐조차 뜯지 않은 노트를 하나 꺼내 모브에게 내밀었다.
"적어. 딱히 정리할 필요는 없고 글씨만 알아볼 수 있으면 되니까."
"...제 이야기를요?"
"음. 그렇지. 뭐 거창하게 적을 필요는 없어. 일단...그래. 이름부터."
레이겐에게 모브는 모브(mob)가 아니다. 레이겐의 세상에서 모브는 세상 누구보다 특별한, 손에도 닿지 않을 존재였다. 거짓이라 믿었던 초능력을 가지고 그 힘을 제 의지대로 다루는 신기한 존재. 하지만 동시에 모브는 14살의 중학생이었다. 초능력에 대해서는 자신은 어찌할 수 없기 때문에 레이겐은 모브를 언제나 14살의 중학생으로 대했다. 스승과 제자라는 우습지도 않은 관계도 그것의 연장선이었다. 그 편이 자신이 상대를 이해하기 쉬우며 다가설 수 있는 방향이었기 때문이었고 레이겐의 선택은 정확했다.
"...설마 제자의 이름도 모른다고 하시진 않겠죠, 스승님."
끝내 모브가 웃을 일은 없었지만 적어도 매섭던 눈꼬리가 조금 내려간 것을 레이겐은 씩 웃으며 모른척 해주었다.
맞다, 모브. 아까 네가 깬 머그컵 줘. 버려야지 참.
괜찮습니다. 벌써 고쳤으니까.
....초능력은 좋네.
아뇨. 이런 힘은...
모브?
아닙니다.
제 이름은 카게야마 시게오(影山 茂夫) 입니다.
시게오라고 읽지만 모브라고도 읽습니다. 모브라고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어서 처음에는 좀 놀랐습니다.
이걸 쓰고 있는 시점은 14살입니다. 중학생입니다. 쵸미 시....
'시게오. 뭘 쓰고 있는 거야?'
에쿠보의 질문에 쓰던 걸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노트. 하지만 레이겐이 그를 위해 준 순간 시게오에게 그건 중요한 물건이 되었다. 정확하게는 그렇게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스승님이 주신 노트. ....일단 이름부터 쓰고 있었는데."
'진짜 쓰려고? 그냥 레이겐이 되는대로 말한 거 아냐?'
"그럴지도 모르지. 말을 잘하는 분이니까."
말만 잘하지 문제지. 에쿠보의 투덜거림은 한숨처럼 뱉어진 시게오의 웃음으로 흩어졌다. 아직 그보다 한참 살아온 인생이 적고 사회경험도 없다시피한 자신에게 있어서도 레이겐 아라타카라는 인물은 꽤 수상한 인물이었다. 첫만남이 사기유무를 묻는 기자회견장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저 조금 흥미가 있어서 들어간 곳에서 설마 이런 사태까지 오리라 당시의 자신은 생각했었을까. 시게오는 샤프를 조금 위아래로 두드리고는 노트에 적었다. 말은 서투르다. 그는 모든 걸 적어도 괜찮다고 했다. 그러니 이런 생각을 적어도 괜찮다.
...쵸미 시의 시오 중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가족은 부모님과 남동생이 있습니다. 이 글을 적는 이유는 스승님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 곳에 써보라고 해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스승님은 레이겐 아라타카라는 영능력자로....
"...아니지."
'아니지.'
시게오는 지우개로 영능력자라는 단어를 지웠다.
...스승님은 레이겐 아라타카라고 이 글을 쓰게 하고 아마 저와 에쿠보를 빼면 유일하게 이걸 읽을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실 어떻게 써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생각나는 대로 쓰려고 합니다. 스승님께서 제 이야기를 하라고 했으니 제 이야기를 마저 하겠습니다.
저는 초능력자입니다. 태어나면서 초능력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아마 그 초능력으로만 따진다면 저는 세계에서도 나름대로 강한 편이 속할지도 모릅니다. 거창하거나 아직 어린 나이의 시야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조직 내에서 저보다 강한 사람은 아마도 두 사람 뿐입니다. 저는 여기서 그 조직과 저에 대해서 쓰려고 합니다. 스승님은 저에 대해서 쓰라고 하셨죠. 그러니까 여기에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일단 스승님껜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말을 하지 않은 건 많지만. 문득 생각난 말에 시게오는 손을 멈췄다. 만약 이런 고민을 누군가에게 말하면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해줄까. 그래봤자 상의할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가족들에겐 할 수 없었고 그와 이런 대화를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극히 좁은 시게오의 인간관계에서 결국 남는 건 단 한사람이었다. 처음으로 자신으로부터 다가간 이 세상. 스승님이라면 분명 화를 내시겠지. 시게오는 다시 손을 움직였다.
이 세상에는 초능력자 집단인 '손톱'이란 조직이 있습니다. 그 집단의 목적은 세계정복입니다. 그러기 위해 많은 일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좋지 않은 일입니다.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초능력자 집단인 '손톱'의 간부 중 한 사람입니다.
─────
"수고하셨습니다!"
시게오는 이 말을 자주 들었다. 조직의 간부로서 처리해야 하는 일을 하고 나면 저보다 갑절은 큰 사람들이 정수리가 보일 정도로 허리를 숙이며 말하는 일이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는 자신에게 굳이 인사를 하지 않아도 되는 등급의 사람들에게 들었다. 조직의 계급체계를 전부 다 아는 건 아니지만 자신과 비슷한 급이겠지. 이 조직의 가장 위에 있는 그에게도 들었다. 출력조절이 제대로 되지 않는 걸 제외하면 확실히 시게오는 이 조직에서 가장 강한 자 중 하나였으며 당연히 그에 따라 출격하는 일 또한 많았다.
"......."
'그래, 너희도 수고 많았다고 시게오가 생각할 거야.'
"그렇습니까? 에쿠보 님이 그리 말씀하시니 그렇겠지요."
'그럼. 이 몸은 시게오의 위대한 대리인이니까 말이지.'
에쿠보가 이럴 때 있어줘서 다행이라고 생각 한 게 몇번인지. 사실 예전에는 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시킨 일을 처리하고 그 자리를 서둘러 떠나기 바빴다. 그리고 더 전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더이상 그 때로는 돌아갈 수 없다. 돌아가고 싶지 않다.
아주 예전에는 뭔가 이럴 때마다 말하고 싶었던 게 있었던 것 같다. 시게오는 조용히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카게야마 선배!"
수첩에 내용을 적고있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밑을 내려보자 양복을 입은 여러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고 그 가운데로 우산을 든 남자가 해맑게 웃으며 시게오를 반겼다. 두 사람 다 이런 상황은 익숙했지만 여전히 남자에게 불리는 호칭은 어색했다. 자신이 나이가 어리니 몇번이나 편히 말을 해달라 해도 남자는 요지부동이었다. 사장이 그렇게 부르라고 했다는 그 이유로 이 남자는 자신보다 나이가 한참이나 떨어진 저에게 선배라 꼬박꼬박 붙이며 존댓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시게오는 몇 번인지 모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세리자와 씨… 그렇게 부르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그래도 선배니까요. 사장님도 카게야마 선배를 잘 보고 배우라고 했고!"
"그래요..."
같은 5초의 사람이며 자신과 대화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 시게오는 그 강함은 인정했으며 진심으로 사장을 존경하는 그의 순수함은 존경했다. 그리고 동시에 동정했다. 힘의 컨트롤부터 사는 일까지 상당수가 서툰 자신이 봐도 세리자와는 저보다 더 서툴렀고 그래서 더 매달렸다. 저 우산이 없이는 조금도 제어하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 이해할 수는 있었다. 자신 역시 그렇게 여기에 들어왔고 그렇게 살고 있다. 지금도.
고생하셨어요, 선배 라고 시작한 그의 말은 주변에게 위에 남은 것을 처리하라는 지시로 바뀌었고 시게오는 묵묵히 세리자와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 그냥 가도 상관은 없지만 그랬다간 사장에게 받은 명령을 다 지시하지 못한 채로 자신을 쫓아올테고 그랬다간 여기가 또 어떻게 귀찮게 될 지 모를 일이다. 싫은 일을 더 늘릴 필요는 없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세리자와는 어리숙하게 웃는 얼굴로 곧 끝나니 기다렸다 같이 들어가자는 좋은 말을 남겼다.
"아뇨. 오늘은 좀 피곤해서."
"앗, 그런가요...! 그럼 어서 들어가야, 아, 차, 차를 지금."
"괜찮습니다. 갈 수 있어요. 바람을 좀 쐬고 싶거든요."
"너무 피곤하면 아직 미숙하지만, 제가 선배 대신 갈테니까요! 사장님도 참, 아무리 선배가 믿음직스러워도 그렇지 아직 중학생인데 말이에요. 그렇죠?"
"...네."
이 조직에서 자신을 그나마 중학생이라는 일반적인 카테고리로 생각해주는 사람은 이 사람 정도다. 아이를 배려하는 얼굴. 상냥한 사람. 그런 사람 좋게 웃는 얼굴 뒤로 당신은 또 얼마나 저지르고 있는걸까. 시게오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목울대로 넘어오지도 않는 생각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무표정은 누구보다도 익숙했다.
시작은 최초로 초능력이 폭주했던 날이었다. 제 힘에 대해 파악하고 조절하기엔 시게오는 너무 어렸고 동생은 그보다 어렸다. 괴롭혔던 학생들은 이미 날아갔지만 옆에 피를 흘리는 동생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여린 제 몸을 찢는 초능력보다도 제가 동생을 다치게 했으며, 지금도 다치게 할 지도 모르는 공포감과 혐오감에 시게오는 그 자리에서 부들부들 떨었다. 몸이 당장이라도 튕겨져 나갈 것 같다. 아까처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다. 모르겠다. 리츠. 내 동생. 리츠가 다치면 안되는데.
안되는데.
- 안되겠네.
목소리와 동시에 머리를 잡혔다. 처음 들어보는 낯선 목소리와 낯선 악력. 반사적으로 힘의 출력이 올라갔으나 시게오의 머리를 잡은 손은 풀리지 않았다. 자신의 힘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듯 그의 손은 흔들림이 없었다.
- 적당히 해라. 능력이 있는 건 괜찮은 일이지만 여기서 이러는 건 내게 방해일 뿐이다.
- 아, 어, 어떻게....
- 너뿐일리가 없지.
그 순간을 뭐라고 하면 좋을까. 어린 시게오에게 있어서 이해 할 수 없고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힘을 가진 사람이 자신 말고도 있다. 그것도 어른.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 흔들림없이 저에게 다가와 그러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비록 그 태도는 시게오와 리츠에 대한 걱정이 아닌 제 앞의 방해물을 치운다는 의미가 더 강했지만 그거면 좋았다. 그걸로도 시게오에게는 충분했다. 이 무서운 힘이 무섭지 않다고 해주는 어른이 있어서 좋았다.
혼자가 아니어서 좋았다.
이후로는 자연스러웠다. 그보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힘을 제대로 제어할 수 없는 자신과 그걸 할 수 있는 어른이 만났다. 그리고 그는 어떤 조직을 이끌고 있었다. 스스로와 같은 사람들이 모여 있으며 그 사람들이 살아가기 좋은 세상을 위해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아이의 장래와 안전을 위해 부모는 그곳으로 자신을 보냈고 자신 역시 떠나기를 원했다. 제 힘으로 가족이 다치는 걸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의 힘으로 다쳤음에도 떠나는 날 누구보다 많이 울었던 다정하고 사랑하는 동생을 시게오는 지키고 싶었다. 네 명이 앉는 식탁에 앉을 수 없더라도 가족이, 리츠가 평범하고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했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가족의 슬하를 떠난 시게오는 착실히 능력을 개화시켰다. 초능력은 본디 개성이 강해 특정한 분류를 둘 수 없지만 시게오의 거의 만능에 가까운 힘은 그 조직의 최정상인 그와 가장 비슷했고 당연히 그에게서 많은 힘의 사용을 배웠다. 이따금 감정변화로 인해 폭주를 해도 그가 있었기에 안심할 수 있었다.
편안했다. 힘도 말도 생활도 모두가 감출 이유가 없었다. 저보다 약한 힘을 가진 사람과의 교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상대가 자신에 대해 이미 알고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불편함은 없었다. 이상한 힘이라고 질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서로를 특별하다 말해주었다. 애물단지였던 제 힘은 이곳에서는 축복이라 한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니 격려해주고 인정해준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자 어찌할 수 없던 힘도 시게오의 손에 잡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손톱에 들어간지 약 1년 후, 그리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상처입혔던 동생에게 사과하고 함께 울며 화해하고 다시 같이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시게오는 손톱을 믿었고 그를 믿었다. 가끔 그가 시키는 일이 이상하고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그로 인해 현실은 예전에 비해 무척 잘 흐르고 있었기에 크게 의식하려고 하지 않았다.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고 가족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으며 쓸모도 없을 것 같았던 초능력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의 말대로 불순한 사상을 가진 인간을 재교육하고 필요 없는 요소들을 배제시켰다. 도움이 되지 않은 악령도 많이 지웠다. 초능력과 영력은 근간을 조금 달리해도 아주 밀접하다는 사실을 안 것도 이쯤이었다. 위화감은 도통 사라지지 않았지만 언젠가 초능력자들이 편히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말을 믿었다.
그런 나날의 어느날이었다.
- 어?
시게오는 나지막한 탄식을 내뱉었다. 제 발밑에는 무언가가 널브러져 있었다. 주체못하는 악령이 나왔는데 묶어두는 데 까지는 성공했지만 제령까진 어렵다는 도움요청에 평소처럼 가서 초능력으로 단번에 날려버렸다. 그럴 생각이었다. 시게오는 제 발 밑에 있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인간. 인간이었던 것이 있었다.
-...어?
처음 든 생각은 왜? 였다. 악령이라고 했다. 그런데 왜 인간의 파편이 여기에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혐오감보다도 사태를 머리가 이해하질 못했다. 인간. 인간이었던 파편. 악령은 물질이 아니다. 존재하고 있지만 이젠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들이기에 제령을 하면 사라진다. 물론 흔적이 남을 수는 있고 원한다면 악령의 파편 역시 바로 사라지게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시게오는 그걸 원하지 않았다. 날려버렸다. 그런데 무언가가 남았다.
왜?
- 아, 이런. 남았나요?
- ....네?
- 아마 이 사람, 좀 능력이 있었나봐요. 우리들이 스카우트 하러 가지 않은거 보면 너무 형편 없거나, 본인도 무자각이었을지도. 뭐 이젠 아무래도 상관 없지만. 이거 치워요.
- 잠시만요. 시마자키 씨.
- 그나저나 대단한데요. 카게야마 군의 힘을 받고 무언가가 남아 있는 인간은 많지 않았는데. 아까웠던 일을 했나.
입 안에서 오만가지 말이 맴돌았다. 인간. 그래, 인간이에요. 악령이 아니야. 사람이었다. 살아있었다. 거기에 살아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다들 아무렇지도 않다. 다들 괜찮은건가? 별 일 아니야?
왜?
왜?
왜?
- 카게야마 군.
그 목소리는 지극히 평탄했으며
-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일상적이었다. 그랬다. 처음부터는 아니었겠지만 이게 처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그저 악령이라고 생각했던 것 중 일부, 혹은 상당수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시게오가 깨달았을 뿐이다. 어린 저는 령과 악령을 완벽하게 구분하지 못했고 그 둘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주는 이는 여기에 없었다. 돌아온 시게오가 그에게 이 사실을 따져묻자 그는 매우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악령이든 인간이든 무슨 차이가 있지? 우리에게 방해가 될 뿐인데.
반박은 하지 못했다. 시게오에겐 폭주하지 않도록 누르는 것으로도 이미 힘껏이었다.
─────
'시게오. 왜 멍하게 있어?'
"응? 아.... 이런 저런 생각이 났어."
멈춰버린 손에서 일단 펜을 내려놓는다. 어떻게 채워야 할 지 몰랐던 노트는 쓰기 시작하자 정작 이런 저런 말을 힘껏 써내려가고 있었다. 말로는 할 용기가 없지만 어떻게든 하고 싶었던 자신의 이야기가 눈 앞에 있었다. 아, 뭘 해도 서투른 나를 그저 1년 봤을 뿐인 그사람은 어떻게 이런 것까지 예측하고 있었을까. 신기하고 놀라웠다. 그리고 고마웠다. 어디에도 도망갈 수 없는 자신에게 그는 유일한 도피처였고, 제대로된 세계였다. 동시에 안되는건 안된다고 말해주는 유일한, 어른. 시게오는 다시 펜을 들었다.
...알게 된 후에도 저는 다른 때와 다름 없이 일을 받았고 처리했습니다. 이제와서 발을 빼기엔 저는 너무 깊게 관여해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저의 가족을 알고 있는 위험이 컸습니다. 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수 없다는 말을 누군가에게 하고 싶었습니다. 눈 앞에서 살려달라는 악령, 혹은 인간일 존재를 두고 언제나 머리는 그런 생각이었습니다만 한번도 그런 말을 하진 않았습니다. 저에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들에겐 자신의 존재, 혹은 생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니까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고통 없이 빠르게 없애버리는 것 뿐이었습니다.
스승님. 이건 분명 잘못된 일이겠지요. 하지만 저는 이걸 정말 늦게 알았습니다. 아니, 모르겠습니다. 알았는데 모른척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정말 몰랐을까요. 모르겠어요. 다만 스승님께서 말씀하셨죠. 초능력은 위험하니 사람에게 쓰면 안된다고. 저는 그 약속을 당신과 만나기 이전부터 이미 지킬 수 없었지만, 그 당연한 사실을 알려준 건 스승님 뿐이었습니다.
스승님. 모르는 건 죄인가요. 모르고 한 잘못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자신만이 가장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그 곳에서는 시게오에게 그건 아니다, 라고 말해줄 이가 없다. 그래서 시게오는 현실에서 도망쳤고, 일을 했으며, 자신을 합리화 하면서도 끝없이 머리위로 쏟아지는 죄책감에 허우적거렸다. 둘 곳 없는 마음은 고스란히 힘에 미쳤고 스트레스로 인한 힘의 사용은 커졌지만 컨트롤은 다시 제 손을 빠져나갔다. 그럼에도 살아야했다. 자신이 살아야 제 가족이 무사했다. 밤에 집에서 잠을 자는 것 조차 불안하다.
'그것도 붙이려고?'
"응. 노트에 전부 다 적을 거야. 여기 말고는 내가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곳이 없으니까. 아..."
'왜?'
"어쩌지 에쿠보, 나 수첩을 양면으로 표시해서...."
네 개의 사선과 한 개의 사선이 겹쳐 다섯을 표시하는 갯수의 표식. 수첩에 가득 메워진 표식의 종이를 뜯어내며 시게오는 곤란한 듯 에쿠보를 바라보았다. 괜찮다와 괜찮지 않다의 끝없는 충돌에 고민하다 생각해낸 나름대로의 방식이었다. 처음부터 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희생자는 이보다 많다. 처음 사선을 그을 때는 그렇게나 무서웠는데.
'뭐 그런 걸로 걱정 하고 있어, 시게오! 위에만 테이프로 붙이면 되잖아? 그럼 넘겨서 볼 수 있으니까!'
"...아. 그렇구나."
에쿠보의 조언에 시게오는 허둥지둥 일어나 제 서랍을 뒤졌다. 에쿠보는 그런 시게오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다 수첩을 내려다보고는 테이프를 찾아 올 동안 표식이 새겨진 종이를 얌전히 뜯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시게오. 이걸 레이겐에게 언제 쯤 보여줄 생각이야?
아직은 잘 모르겠어.
쓰고싶은게 많아?
그런 거 같아. 있잖아 에쿠보.
응?
이걸 내가 스승님께 드릴 수 있을까?
그러려고 쓰는 거잖아.
응.
뭐, 걱정마라 시게오. 그 때는 이 몸도 같이 있을테니까.
...응.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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