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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먼지가 인다. 레이겐은 두 눈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눈을 뜨려 애썼다. 갑자기 휘몰아친 먼지바람이 눈에 들어가 다시 눈을 뜨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었으나 그 정도였다. 느낄 수 없어서 어느 정도의 힘이 몰아쳤는지 가늠할 순 없지만 좋지 않은 힘이 정통으로 자신에게 내려 꽂은 것에 비하면 눈 따가운 것 정도야 대수겠는가. 아마 아무런 고통도 상처도 없는 건 공격을 받기 직전 모브가 어떻게든 해준 모양이었다. 안 돼! 하며 비통하게 외친 것 치고는 재빠른 반응이다. 늘 그렇듯 비상한 능력에 속으로 감탄하며 레이겐이 어떻게든 한 쪽 눈을 떴을 때는 자신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광경이 그곳에 있었다.
아마 악령일 것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검은 안개와도 같은 것이 바람과 괴이한 빛의 띠에 휘감겨 파악하기 어려운 소리로 외치고 있었고 악령의 앞에는 레이겐, 그리고 두 존재의 사이에 그가 있었다. 검은 코트를 바람에 휘날리며 서있는 낯선 남자의 뒷모습. 그의 오른손은 악령에게로 펼쳐져 있었다. 모브가 흔히 그러하던 것처럼.
그렇다, 모브. 모브는? 이 남자의 정체는 몰랐지만 그보다는 자신을 향해 손을 뻗었던 제자가 우선이다. 그렇게 생각한 레이겐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때였다.
"위험하니까 아직 일어나지 마세요."
땅을 기는, 낮은 목소리. 그건 모든 것을 거절하듯 건조하고 차가웠지만 레이겐은 알 수 있었다. 그 덤덤한 안에 담겨있는 조금의 당황과 걱정. 애초에 모를 수가 없었다. 남자아이는 성장하며 목소리가 다소 변하긴 하지만 원래 사람의 목소리는 크게 변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가장 늙지 않는 부위 중 하나가 바로 성대다.
나는 저 남자를 알고 있다. 확신에 가까운 단어가 입에서 나왔지만 그보다 악령의 비명이 크고 빨랐다. 좁지 않은 공터에 울리는 비명에 나무들과 땅이 울린다. 머리를 때리는 소음에 레이겐이 양 귀를 틀어 막았고 소음과 함께 밀려오는 영력 탓인지 남자가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흙먼지로 흐린 시야와 판단되지 않는 상황에서 레이겐이 할 수 있고 알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다만 남자는 레이겐의 앞에서 물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까의 말과 더불어 믿을 수 있으리라 판단해 남자의 말대로 일어나지 않고 자세를 낮춰 주변을 둘러보았다. 있다!
"자, 잠깐만! 모브가 저기에 있어!"
레이겐의 다급한 말에 남자의 시선이 처음으로 악령에게서 옮겨졌다. 반 이상 엉망이 된 교복을 입고 의식없이 바닥에 넘어져 있는건 분명 조금 전까지 레이겐에게 비통하게 소리를 질렀던 제자. 모브. 남자는 악령에게 펼치고 있는 오른손 대신 왼손을 들어 소년을 가리키곤 마치 무언가를 퍼내듯 검지 손가락을 위쪽으로 돌렸다. 방향의 끝에는 소년이 공중에 떠 있었다. 아, 이것 역시 자주 보던 거다. 레이겐이 언제나 뜨거운걸 먹고 뱉어낼 때마다 한심한듯 쳐다보면서도 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회전시키는 차, 혹은 타코야끼, 혹은 또 다른 무언가를 자주 보았다. 몇 년이나.
거의 던져지듯 날아온 소년의 몸을 레이겐이 간신히 받아내자 두 명의 주변으로 오색의 일렁임이 일어나고는 잠잠해졌다. 얼굴을 때리던 흙먼지도 앞뒤없이 불어대던 바람도 일렁임 이후로 두 명의 주변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견고한 배리어에 감탄을 끝맺기도 전에 다시 악령이 울부짖었다. 배리어 안에서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지만 아까처럼 땅과 나무들이 요동치고 있었기에 그러리라 추측할 뿐이다.
그리고 공터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어?"
"도망갔군요."
당장이라도 덤벼들 것 같았는데? 레이겐의 의문을 아는지 남자는 머리와 옷을 털며 입을 열었다.
"도망가는 것도 힘이 있어야 하니까요. 아마 불리한 걸 눈치채고 간 모양입니다. 지금은 저도 제대로 대응하긴 어려우니까 잘 된 일이지만."
"그 정도로 강하다고?"
"강하기도 하고, 말했다시피 지금은 제가 제대로 대응하는게 어렵습니다. 상황이 이러니까요."
상황, 상황이라. 레이겐은 의식 없이 제 등에 업혀있는 제자를 한번 본 후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마지막으로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털고 있었다. 사실 바람으로 헝클어진 것은 있어도 남자의 몸에는 그다지 먼지가 많이 붙지도 않았다. 시야를 가릴 정도의 흙먼지가 불었음에도 말이다. 레이겐은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모브."
레이겐의 말에 남자가 뒤를 돌았다.
"네, 스승님."
머리카락 만큼이나 검게 빛나는 무광의 구두와 발목에 알맞게 떨어지는 바짓단, 부드럽게 목을 덮은 터틀넥. 그리고 그 모든것을 자연스럽게 덮는 검은 코트까지. 남자는 일색이 검정이었으나 마치 그게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소화하고 있었다. 하긴 그 남자는 과거에도 이렇게 입고 다닌 적이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레이겐에게는 현재의 소년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지금 사무실 한편 간이 침대에 눕혀놓은 소년이 지금 그러하다.
"어, 음.... 커피? 녹차?"
"뭐든 상관 없.... 아, 아니. 같은 걸로 주세요."
세상에서 제일 귀찮은게 아무거나,다. 저건 그나마 낫지. 남자의 말에 레이겐은 조금 고민하고 녹차를 꺼냈다. 그래봤자 싸구려 티백이지만 모브가 커피를 먹지 않았기 때문에 떨어지지 않도록 늘 채워둬 아슬아슬한 커피보다 사정이 나았다. 포트에 물을 올렸지만 금방 데워지는 것은 아니라 사무소에는 적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지금은 자고있는 소년이 깨어있었다고 해도 원래 먼저 말을 하는 법이 드물고 길게 말하는 아이도 아니었기에 사무소는 시끌벅적한 것보다 조용할 일이 더 많았다. 그래서 이 침묵도 레이겐에게는 그리 어색하진 않았다. 어색한 건 사무소의 침묵이 아닌 남자의 존재, 그 자체였다. 감히 말하기로 한다.
"그러니까, 음. 모브 군은 미래에서 왔다고?"
"아마도, 요. 보여주신 신문 일자나 현재 나이를 들어보면 14년 쯤 차이가 납니다."
모브. 카게야마 시게오라 쓰고 훈독으로 모브라 읽는 그 모브. 자신의 제자인 모브가 바로 저 남자라고 한다. 믿고 싶지 않아도 압도적인 힘과 익숙한 목소리. 단정한 얼굴. 저를 스승이라 부르는 호칭까지 남자는 모브 그 자체였다. 그저 레이겐이 알고 있는 모브는 아직 14살의 중학생이며 정장보다는 교복이 어울리고 아직은 내려다보는게 익숙한 아이였다면 눈 앞의 남자는 28살, 즉 레이겐과 같은 나이며 조금 올려다 보아야하는 키에다 옷을 무척이나 맵시있게 입는 성인 남자였다. 남자-모브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땐 레이겐은 진심으로 지금 한참 자고있는 자신의 제자를 깨우고 싶었다. 모브야, 그렇게 육채개조부인지 뭔지 하더니 그 성과가 14년뒤에는 나타나는 것 같구나 장하다 하면서 말이다.
"14년이라니.... 여기 모브가 산만큼 더 살아야 되는 거잖아. 멀리서도 왔네."
"제가 오려고 한 건 아니지만요."
"네가 온 게 아냐? 나이 먹고 강해져서 과거에 온 건 아니고?"
"아닙니다."
때마침 포트의 물이 끓어 스위치가 올라가는 소리가 났다. 레이겐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모브는 손으로 그를 말렸다. 엉거주춤 레이겐이 다시 앉자 모브의 왼손가락이 몇번 움직인다. 포트는 부드럽게 공중에 떠올라 각각의 찻잔에 뜨거운 물을 붓고는 임무를 끝낸듯 제자리에 안착했고 찻잔 하나는 모브의 앞에, 또 하나의 찻잔은 레이겐의 앞에 놓이는 직전까지 공중에서 빠른 회전으로 김을 뺀 후 자리했다.
"...편하네."
"뭘 새삼스럽게. 지금도 그러지 않나요. 전에도 툭하면 뱉어냈잖아요."
"그야 뜨거우니까."
당당한 레이겐의 말에 과거로 온 후 처음으로 모브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긴장, 보다는 아마 현재의 갑작스러운 상황을 머릿속에서 정리하느라 바빠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레이겐이 차를 가져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정리해보자. 너는 미래에서 왔고. 네 의지로 온 건 아니다 이거지?"
"네. 과거에서 미래로, 미래에서 과거로 갈 수 있는 능력은 저에겐 없습니다."
"그럼 너는 왜 여기에 온 거야?"
"모르겠어요. 갑자기 어딘가에 휩쓸리는 느낌을 받았더니 정신 차렸을 땐 공격을 받기 직전이었어요. 그래서 일단 막은 겁니다. 사실 그 때는 당신인줄 몰랐어요. 제 스승님은 마흔...."
"응, 모브 군. 거기까지."
아직 내 먼 미래의 나이를 받아들일 자신은 없단다. 레이겐의 말에 모브는 특유의 무심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여기는요?"
"뭐, 늘 그렇듯 의뢰를 받아서 제령하러 갔는데 모브가 어느 순간부터 여기는 느낌이 안좋다고 어서 해야겠다고 말했지. 그래서 악령을 찾다가 아까 우리가 만났던 공터까지 간거야. 갑자기 악령이 나타났고, 내가 공격을 받으려는 순간이 모브가 나한테 안된다고 소리를 질렀어. 그 직후 네가 나타났고."
"...특별할 건 없네요."
"그렇지."
"하지만 대충 알 것 같아요."
"그렇지.... 뭐?"
"원리는 중요하지 않아요. 여기에 제가 온 이유가 중요한 거지."
대체 이 대화에서 뭘 얻은 건가. 당황하는 레이겐과 달리 모브는 방향을 잡았는지 조금 식은 녹차를 단숨에 들이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이겐이 서둘러 일어나 모브의 옷자락을 잡지 않았다면 아마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렸을지도 모른다. 미처 다 마시지 못한 찻잔이 넘어져 책상을 적셨으나 두 사람에게 그건 전부 중요하지 않았다.
"이유라니?"
"제령이요. 말씀해주신 그 악령."
"그게 네가 온 이유라고 생각해?"
"네. 그것 말고는 없어요."
"어째서?"
"이 곳의 제게 그 악령은 무리거든요."
이상해. 레이겐은 미간을 찌푸리며 쥐고 있던 옷자락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순순히 따라온다. 이것 봐라. 그의 시선에서 모브는 아까부터 행동과 말투가 끝없이 충돌하고 있었다.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만 자신으로부터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상대방을 거절하면서도 옷을 잡아당기자 기꺼이 가까워진다. 이 괴리감이 레이겐의 신경을 자꾸만 긁었다.
"너, 정말 모브냐?"
"...네?"
"네가 '카게야마 시게오' 라는 건 알겠어. 그런데 정말로 '모브'가 맞냐고."
성장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눈 앞의 남자는 분명한 '카게야마 시게오'였지만, 레이겐이 아는 '모브'는 아니었다. 자신이 아는 모브는 서툴고 모르고 흔들려도 무언가의 주체성을 반드시 잡고 나아가는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자라서 이렇게 될 리가 없었다. 그렇게 자라게 자신이 만들 리가.
"맞습니다."
레이겐은 자기도 모르게 잡았던 옷을 놓았다. 지독하게 낯선 사람이 지금 눈 앞에 있다.
"당신은 나를 '모브'라고 불렀어요. 나도 당신을 '스승'이라 불렀고. 당신은 초능력자도 영능력자도 아니었지만 나를 지도했고 나는 당신을 지표삼아 살았습니다. 우린 분명히 사제였어요. 당신의 지금도, 저기의 내가 그러고 있죠?"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아무 의미없는 말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스스로를 모브라고 말하고 있다. 자라서가 아니고 자신과 함께 겪은 시간이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 남자는 정말로 레이겐이 모르는 '카게야마 시게오'였다.
14년. 한 아이가 태어나 교복을 입기까지의 시간을 지낸 28살의 모브와 42살일 자신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카게야마 시게오는 모브가 아니게 되었으며 한때 모브였을 이 남자와 자신은 남보다도 못한 관계에 놓여지게 되었는가. 레이겐은 혼란스러웠다.
"그렇지만 지금은 시게오라고 불러주세요."
"뭐.... 뭐?"
"구분해야죠. 여기의 저와, 지금의 저를 둘 다 '모브'라고 부르실 순 없잖아요?"
"너, 대체."
굳어버린 레이겐을 대신해 그는 얕게 웃었다.
"대충 알아요. 카게야마든 뭐든 상관 없으니까, 모브라고 부르시지 않으셔도 돼요. 아니, 그렇게 부르지 말아주세요. 어차피 지금 이 시대 28살의 레이겐 아라타카의 모브는 14살의 카게야마 시게오지 28살의 내가 아니잖아요. 애초에 불릴 이유가 없습니다."
"잠깐만, 나는."
"스승님. 그런 것보다 저희, 중요한 일부터 처리하도록 해요. 당신의 제자를 위해서라도."
여유가 생겨나며 피어났던 아까의 미소와 달리 완벽하게 만들어진 얼굴이었다.
3.
'그래서 그 시게오랑 노닥거리느라 오늘에서야 왔다 이거지? 리츠가 학교에 있으니 망정이니 널 죽이려고 들 거다.'
"누가 노닥거리는데?! 애초에 모브를 집에 업고온 것도 나고 동생군에게 설명한 것도 나잖아?그리고 논 게 아니라 그 녀석이랑 돌아다니고 뭐 그랬거든?! 얼마나 불편했는지 알아! 저녁에 잠도 못잤어!"
'사무실에서도 졸던 니가 어쩐일이냐.'
"그녀석이 안자서! 불안해서 그랬다 왜!!"
갑작스럽게, 더군다나 미래의 사람이다. 돈이고 뭐고 원래 이 곳에 없는 사람이니 어쩌겠는가. 사무소에서 생활해도 괜찮다곤 했지만 미래라고 해도 자신의 제자를 이런 곳에 둘 순 없어 그 후 레이겐은 줄곧 그를 자신의 집으로 부르고 있었다. 적어도 제 눈앞에 두고 안정을 얻고자 하기 위함이었지만 이 선택은 레이겐을 요 3일간 더욱 심란하게 만들었다. 가뜩이나 지금 자신의 제자인 모브는 깨어나지도 못하고 있건만 미래의 제자란 놈은 잠을 자지도, 먹지도 않는 것이다. 밤이 되면 악령이 활개를 친다고 해서 하늘로 사라지고 낮에는 아예 사무소든 자택이든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레이겐이 그와 함께한 건 현재는 살지 않아서 기억이 안난다는 쵸미시를 안내한 첫째 날 뿐이었다. 첫날 밤을 꼬박 새 잠시 돌아온 틈에 물어보니 하늘에서 밤처럼 탐지망을 치고 있다고 한다. 식사는 레이겐이 볼 때마다 권하고 있지만 어떤 작용이 어떻게 일어날지 모른다고 거절하니 또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럼 지금 3일째 먹지도 자지도 않고 악령 잡겠다고 저러고 있다고? 살벌하구만, 미래의 시게오.'
"그런 수준이면 차라리 낫지."
협력하게 만들때는 웃는 얼굴로 협박하더니 거절할 때도 반박 못하게 웃는다. 어느 놈한테 배운 기술이냐. 나냐? 세월이냐? 레이겐은 답없는 질문에 머리만 벅벅 긁었다. 담배라도 피우며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현재 그가 자리한 곳은 모브의 방 안이다. 미성년자의 방에서 담배를 피우는 양심없는 어른은 아니고 원래 레이겐은 모브의 앞에서 담배는 거의 피우지 않았다. 특히 육체개조부인지 뭔지 운동부에 들어간 이후로는 아예 사무실에서도 치워버렸다. 담배가 좋지 않기도 하고 그 나름대로의 응원이기도 했다.
'본인이 본인을 인질로 잡아서 의도대로 휘두른다라. 머리 좀 쓰는데? 지금이라면 이 몸이랑 대화가 될 지도 모르겠어.'
"그 소리 동생군 앞에서 해봐. 깔끔하게 제령될 수 있을거다."
에쿠보는 재수없는 소리 말라며 몸을 떨었지만 형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동생이라면 반 정도는 진심으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건 비밀이다. 물론 에쿠보야 악령다운 농담이겠지만 어떤 의미로는 모브보다도 쉽게 흥분할 아이다.
그래, 아이. 레이겐은 제 앞에 가만히 자고 있는 모브를 바라보았다. 미래의 제자가 나타나서 악령을 찾은지 3일. 그리고 모브가 잠들어 일어나지 못하는 날도 3일을 맞이했다.
몸에 맞춘 것마냥 딱 떨어지는 옷의 선처럼 완벽하게 웃은 시게오는 굳어버린 레이겐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쏟아내었다. 현재의 악령은 모가미 때 처럼 모브보다 강한 악령이며 지금의 모브에게 그 악령의 제령은 무리라는 것. 당시의 상황을 생각하면 아마 자신보다 레이겐의 위험에 어떻게든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자신을 불러냈을 것이라는 추측을 설명했다. 원래 자신이 마음에서 정하면 움직이지 않는 녀석이란걸 알고 있었지만 이건 그와는 달리 상대방의 의견을 완벽하게 무시하고 자신의 말만을 내뱉고 있었다. 아마 다음 내용이 이어지지 않았으면 분명 더 듣지 않고 쫓아냈을게 분명했다.
- 그 악령을 없애지 않으면 제가 돌아갈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여기의 저는 깨어날 수 없어요. 지금 제 힘은 전부 여기의 제게서 흡수해서 사용하고 있으니까요. 제가 위험해질 지도 몰라요.
말도 안되냐는 소리로 밀어버리기엔 과거에 비슷한 일을 이미 경험했다. 예전에도 가족들에게 일이 생겼을지도 모르던 순간 바짝 긴장해 힘을 마구잡이로 폭주시키던 모브가 긴장이 풀리자마자 기절하듯 자지 않았던가. 뭘 해도 일어나지 않던 그 때는 나중에 힘을 보충하여 일어났으니 망정이지만 지금은 눈 앞에 있는 미래의 시게오에게 흡수되고 있다. 회복할 틈조차 없다. 지금 일어나지도 못하고 계속 자고 있는 것도 같은 이치리라.
- 그러니까 스승님이 좀 도와주세요.
망할 자식! 당장이라도 주먹을 저 감정없는 얼굴에 날려버리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제 앞에 있는 건 누구보다 소중한 자신의 제자의 안위였고 제자의 미래였다. 같은 얼굴과 비슷한 목소리로 시게오는 분명히 레이겐을 협박하고 있었다. 자신을 돕지 않으면 모브가 위험할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레이겐이 선택할 수 있는건 내밀어진 손을 잡는 것 뿐이었다. 아직 작고 어린 모브와 달리 제대로 성인 남자의 손이다. 딱딱하고 세월을 거친 단단해진 손. 레이겐은 인간의 손이 그렇게나 기분 나쁠 수 있음을 그 때 처음 알았다.
'그런데 말이다, 레이겐. 이 몸이 걸리는 게 있는데.'
손에 남던 이질적인 느낌을 떠올리던 레이겐은 에쿠보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스스로 불렀음에도 에쿠보는 한참이나 창문에 달라붙어 밖을 바라보았다. 창 밖의 하늘, 시야에 잘 넣지도 않는 높이의 장소에 화제의 인물이 있다. 그러고보면 에쿠보는 한번도 시게오를 만난 적이 없었다.
"뭔데?"
'왜 저 시게오는 너를 끌어들였지?'
"뭐?"
'여기의 시게오라면 이해가 가. 힘은 세지만 아직 어리니까 너라는 방향과 지시가 필요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저 시게오에게는 네가 필요할까? 너의 이야기만 듣고도 자신의 현재 상태와 존재의 이유를 바로 알 정도로 이해력과 경험도 있는데다가 입만으로 먹고 사는 너를 협박이란 형태로 눌렀잖아, 네 장기인 대화로 말이야. 그렇게나 성장했으면서 왜 시게오는 너에게 협조해달라고 했을까? 막말로 네가 한 건 시게오의 가족들에게 설명한 일 뿐인데 그건 저 시게오가 리츠에게 직접 설명했어도 상관 없었잖아.'
에쿠보의 말에 레이겐은 머리부터 내려오는 감각에 몸을 떨었다. 이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전에 오지 않는 모브를 찾아 손톱 지부에 찾아갔던 날, 망상을 현실로 믿는 그들의 설득하지 못했을 때 바로 이런 기분이었다. 예상하지 않았던 실패. 지금까지 상식 하의 일반적인 대화로써 사람을 설득하지 못한 적이 거의 없던 레이겐에게 있어서 상식 밖의 사람들과 그들의 망상에 대화로는 이겨낼 수 없음을 깨달았다. 당시에는 모브의 힘이 자신에게 옮겨졌기 때문에 그들과 동급의 세상에 잠시 발을 들이밀어 억지로 현실로 끌어내렸지만 결국 그것도 모브의 힘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생각하자. 실패했던 이유는 뭐지? 그 때의 원인은 자만과 당연함. 지금 느끼는 기시감이 당시와 같은 의미의 실패라는 단어라면 지금 내가 저질러버린 자만과 당연함은 무엇인가.
하나 밖에 없잖아.
"...맙소사."
'이제야?'
"나도 내가 멍청한 걸 방금 알았어. 젠장."
사람을 상대하는 자라면 응당 해야하는 일을 자신이 아는 사람이라고 다 넘겨버린 걸 3일이나 지나서야 알게되다니. 레이겐 아라타카, 이 무슨 한심한 모습이냐. 그 놈이 망할 자식이면 나는 멍청한 자식이다. 레이겐은 앉은 상태 그대로 머리를 숙였다.
레이겐은 사람을 믿지 않는다. 정확하게는 그들의 말을 전부 다 믿지 않는다.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주체적으로 말을 하기때문에 시야가 좁다.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단 하나의 시야만을 가진다. 본인의 얼굴에 달린 두 눈으로 보이는 것을 가장 옳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레이겐은 의뢰인이 오면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의 말에서 가장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것과 가장 주관적으로 보이는 것을 찾아낸다. 끝없는 의심과 경청을 통해 가능한 자신이 대처할 수 있는 방법과 그들의 사실을 조합시킨다. 마사지도 그 방법 중 하나였다. 악령을 그다지 믿지 않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고민은 우울한 상태와 힘든 몸에서 시작한다. 모브가 오기 전까지 그렇게 살지 않았던가.
모브가 오기 전까진. 레이겐은 누워있는 제자를 바라보았다. 레이겐에게 모브는 중심이었으며 주요했으며 거짓없는 진짜였다. 그래서 레이겐은 모브를 의심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악령이 있다고 해도 믿었고 모두가 아니다 라고 주장해도 모브가 그렇다 라고 하면 그 말을 믿었다. 물론 거기엔 모브의 힘에 대한 믿음도 있었지만 그토록 대단한 힘이 있는데도 스스로의 힘으로 살고자 발버둥치는 카게야마 시게오라는 아이의 본질을 믿었다. 경험이 적고 마음이 복잡한 아이니만큼 모브의 의견에 생각하고 대화를 나누지만 제자의 말이 거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언제나 의심을 바닥부터 깔고가는 레이겐에게 있어 모브란 그런 존재였다.
그래서 그 역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의심을 해야했다. 그가 정말 자신의 모브와 같은 카게야마 시게오인지, 그의 말이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의도가 정말 맞고 저의가 무엇이며 도대체 왜. 에쿠보의 말처럼 아무 힘도 없고 필요도 없을 터인 자신을 굳이 끌어들여 협력이란 관계로 묶어 정말 뭔가를 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는지 그 전부를 의심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당황스러운 상황의 기류를 놓치지 않고 그는 레이겐이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머리를 뒤흔들었다. 누구보다 자신에게 중요한 존재인 모브, 즉 '카게야마 시게오'라는 존재 자체로 말이다.
모브가 레이겐을 믿고 레이겐이 모브를 의심하지 않는건 이미 서로 그 과정이 끝났기 때문이다. 서로에 대해 생각하고 의심하는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상대방을 믿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고 레이겐에게 모브는 그 모든 과정을 지나 믿는게 당연한 존재였다. 어리석은 일이었다. 레이겐이 쌓아올린 믿음은 지금 제 눈앞에 있는 모브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카게야마 시게오는 아니었다.
정말 그를 믿고자 한다면 그의 정체부터 파고들며 의심했어야했다. 믿어주기 위해서.
"에쿠보. 뭐가 보여?"
카게야마 시게오는 초능력자다. 그렇다면 어떤 초능력자인가? 시작은 거기서부터 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지 못하는 자신 대신 볼 수 있는 존재가 필요했으며 에쿠보는 그 상대로서 최적이었다.
'네가 당분간 파리 날릴 거라는 미래라면.'
"웃기지 말고."
'농담 아닌데. 레이겐, 너 왜 내가 이 3일간 한 번도 너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고 생각하냐?'
"모브 때문 아니었어?"
'저쪽의 시게오를 모브라고 부른다면 맞는 말이다만.'
보여주는게 빠르겠다며 에쿠보는 머리로 추정되는 긴 꼬리에서 작은 덩어리를 뚝 떼어냈다. 원래부터 불덩이 같은 모양이었기에 떼어낸 부분은 흔적도 남지 않고 흔들렸다. 뭐하는 거냐는 질문에 에쿠보는 보고만 있으라면서 제가 떼어낸 물질을 창 밖으로 향해 던졌다. 떠다니고 있던 성질 탓인지 령의 특성인지 던져버린 그건 먼지처럼 둥실둥실 창으로 향하더니 창문을 넘어가자마자 오묘한 빛을 내는 무언가와 부딪치며 터지고는 사라졌다. 봤던 광경이었다.
'지금 시게오의 탐지망은 쵸미 시 전체를 감싸고 있다. 뭐 시게오 정도면 어렵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이 탐지망의 종류는 평소와 달라. 적을 추적하기 위한 건 맞지만 정확하게는 약한 영은 전부 제령해버리는 <배리어>다.'
"배리어라고? 탐지망이 아니라?"
'탐지망이지만, 배리어에 더 가깝지. 다만 이건 질이 안좋아. 바깥에서 들어오는 악령을 차단하지만 동시에 안에 있는 악령도 제령해버려. 아마 가장 먼저는 동물령, 그 외에는 크게 의지가 없고 악의가 없는 영들 순으로 제령됐을 거다. 이 몸은 거기까진 되지 않겠지만 나가서 좋을 것도 없어. 이 집은 시게오가 오래 살아서인지 전체적으로 결계가 쳐져있고 결계의 주인인 시게오의 힘에 붙는게 허락된 거라 이 안에서만큼은 무사하지만 말이야.'
언제의 의뢰였던가. 악령이 되지않은 령과 자신을 동일시하던 그 모습에서 깨달았던 실수가 있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까지 보는 이상 모브의 시야는 넓고 구분이 모호하다. 그래서 쓸데없이 신경을 쓰고, 타인과 자신을 구별하지 않으며, 상냥하다.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두 가지를 전부 겪고 있기에 죽은 자와 산 자, 어느 한쪽에 차별을 두지 않는 모브의 그런 점을 레이겐은 아꼈다. 우리가 알던 모브는 그런 초능력자였지.
"고맙다, 에쿠보."
'나머진 맡긴다.'
"그 때 제령시키지 않고 냅둔 보람이 있는걸? 무당벌레 악령."
'보이지도 않았던 주제에.'
이 대화 또한 그 때의 무름이 남긴 것이 아니던가. 둘은 서로를 마주보며 웃었다.
꿈인가?
레이겐은 고개를 갸웃했다. 일단 마지막 기억이 모브의 집에서 나와 나름대로 이것저것 생각을 정리하고 집에 돌아가긴 했다. 잠깐 쉬러 갔을 뿐인데 잠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건 꿈이겠지. 더군다나 내려다보는 자신의 몸은 반쯤 투명하질 않나 주변 광경은 참 환상적이었다. 하늘은 달도 태양도 별도 없이 온통 지독한 검은 안개에 휩싸였고 간간히 오묘한 색의 벼락만 지상으로 내려치고 있었다. 벼락이 지상까지 떨어져 그 근방을 폐허로 만드는 광경은 생전 처음봤다. 물론 그 전에 폐허가 아닌 곳이 없었지만 말이다.
뭘까 이건.
꿈이라고 하기엔 간단했다. 그러나 감각이 꽤 현실적이다. 무슨 의미냐 하면 지금 레이겐이 발을 옮기자 마자 바스러진 잡지의 글씨를 정확하게 읽어 내용을 알아낸다거나 부서진 건물들의 파편의 감촉이 어느 정도 느껴진다는 점이다. 꿈 치고 리얼하다고 판단해야 할지, 아니면 또 다른 가능성인지 레이겐은 고민했다. 최근에 겪은 상황이 상황이라 무슨 일이 일어나도 참 그럴듯 하니 판단이 어려웠다. 이렇듯 생각도 선명한걸 보면 완전한 꿈도 아닌 듯 했다.
뭔가 없나.
이 세계에 대한 힌트. 하다못해 자신이 있던 곳과의 연결점이 되는 흔적이라도 없을까. 발에 채이는 것들을 이리 저리 걷어보던 레이겐은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 밑에 있는건 부서진 건물과 대부분 부식된 물건 뿐이었다. 건들면 무너지고 밟으면 으스러진다. 플라스틱이 분해되는데 몇 백년은 걸린다는데 레이겐의 발치에 널린 것들은 약간의 충격에도 맥없이 바스라졌다. 참 허무한 세계다.
...익숙한데.
레이겐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 맥없고 의미없는 세상이 이상하게 익숙했다. 집처럼 편안한건 아니고 낯설지 않은 느낌이었다. 어리둥절한 사이 그의 곁으로 괴물이 하나 지나가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조금의 동요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아서인가? 아니다. 이들이 나를 인식하지 못해서? 그것도 조금 다르다. 그냥 이 괴물들이 위협적으로 느껴지질 않았다. 마치 제령을 하러 다닐 때처럼.
아. 그렇군.
아무런 힘이 없는 약자인 제가 저런 걸 보고도 태연하게 있을 수 있을 때는 지극히 정해진 조건밖에 없다. 레이겐은 생각을 그만두고 주변을 크게 둘러보았다. 해도 달도 없는 이곳은 낮과 밤에 의미도 없는 것 같지만 동시에 어둡지도 밝지도 않았다. 그런 곳이니 분명 다른건 선명하게 보이리라.
거 봐라. 있지.
예상대로 약간 떨어진 곳에서 희미한 빛이 있었다. 레이겐은 달렸다. 딛는 곳마다 부서진 잔해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지만 어차피 밟는 족족 부서져 개의치 않았다. 어째서 몸이 반 쯤 투명한데 제대로 물질로 존재해 물리적으로 힘을 가하는지 모르지만 어차피 초능력이란게 다 그렇지 않겠는가. 현실적으로 이루어낼 수 없는 일들을 해내기 때문에 뛰어넘는(超) 능력이다. 벽도, 생사도, 시간도, 세계도, 경계도,
인간도.
거긴 지금까지와는 다른 공간이었다. 희미한 빛의 반구로 덮인 지면은 잔디까진 나지 않았지만 제법 고운 모래로 부드럽게 덮여있었다. 시험삼아 몸을 들이밀자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정말 지금 제 상태는 어떤 원리인지 모르겠다.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아니면 이 반구는 애초에 거절하는 게 없으려나. 모르는게 끝없이 머리에서 떠오르지만 해결해줄 이가 없었다. 하늘을 날고 땅을 기는 기괴한 것들과 대화는 통하지 않는 듯 했고 애초에 그들은 부드럽고 따뜻한 이 반구를 꺼림칙한듯 멀찍이 맴돌 뿐이었다. 레이겐은 그런 모습을 보며 자신과 저것들은 근본을 달리함을 알았다. 외형은 둘째치더라도 레이겐에게 이곳은 기분이 좋았다. 허무한 바깥과 달리 여긴 아주 조금 온기가 돌았다.
그 가운데 반구의 소중한 것이 있었다. 거의 다 부서져 흔적만이 남았지만 분명 아주 오래 전에는 누군가의 이름을 새겨넣고 있었을 비석이 하나. 바깥의 모든 물질마냥 이 비석도 대부분 형체는 망가져 있었지만 그래도 깨끗했다. 전부 부서진 세계에서 유일하게 소중하게 여겨지는 걸까. 무엇에게 사랑받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세상에서조차 사랑받는다면 꽤 의미있던 인간이었겠지.
...소중하게.
레이겐이 비석에 손을 대는 것과 동시에 반구가 크게 흔들렸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을 때 레이겐은 자신이 보는 것을 순간 믿을 수가 없었다. 검은 안개가 불타듯 이글거리는 덩어리. 안 돼! 하며 외쳤던 비통한 외침을 낳게 했던 악령이 눈 앞에 있었다.
왜 여기에 있지? 나를 쫓아왔나?
그렇지만 형태가 좀 더 다르다. 모브와 함께 만났던 것보다 이건 형태가 더 흐트러지고, 더 컸으며, 더 일그러졌고, 더 어두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사는 지독한 불길함에 허둥지둥 레이겐은 비석에서 떨어졌다. 괴물들에게 인지되지 않듯 그 악령에게도 레이겐은 보이지 않는 거 같았다. 아니면 악령에게는 이 비석만이 보이고 있을 지도 모른다. 반구의 중앙에 있는 비석을 향해 비틀거리던 악령은 절반 정도 걸어오더니 바닥으로 무너졌다. 희고 곱던 모래 위로 검은 안개와 진흙이 쏟아지는건 결코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레이겐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봐야 할 것 같았다. 아니, 봐야만 한다.
그리고 레이겐은 자신의 모든 생각을 후회했다.
뻗어진 검은 안개가 비석에 가까워지자 휘날려 사라지고 안에서 희고 긴 손이 나온다. 검은 안개는 상당히 휘날려 반구 밖으로 빠져나갔지만 날려나가지 않은 것들은 함께 얽히고 묶이며 섬유가 되고 그 흰 몸에 붙어 옷이 되었다. 색이 빠진 흰 팔목과 대비되어 보이는 검은 니트와 그 위를 덮는 코트. 바닥을 딛는 검은 안개색의 구두. 내려앉은 머리와 콜록이는 숨결조차 검은 색이었으나 피부는 유난히 창백한
자신을 시게오라 불러달라 했던 그가 있었다.
모브.
레이겐은 아무런 의미 없는 소리를 뱉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은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부서진 잔해들을 밟고 부술 순 있어도 이 세상 위에 존재하는 것들에겐 영향을 줄수도 없었고 그들도 레이겐에게 영향을 주진 못했다. 반사적으로 그를 향해 움직이던 몸을 멈췄다. 어떠한 영향도 줄 수 없다면 왜 자신은 이자리에 있으며 이 것을 보고 있는걸까. 여기에 온 건 이걸 '보기 위해'가 아닐까.
왜?
이 세상은 레이겐에게 답을 해주지 못한다. 그래서 레이겐은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다.
아아....
시게오는 모래바닥을 기었다. 검은 안개를 토해내며 몇 번이나 머리와 몸을 바닥에 처박으면서도 비석으로 향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팔과 다리를 버둥거리며 향하는 몸짓은 필사적이라는 말조차 부족했다. 처음 만났을 당시의 모습과 달리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진 머리며 얼굴에 말라붙은 핏자국은 낯설고 고통스러웠다. 옷만이 레이겐이 봤을 때와 같았다. 고운 모래알갱이 하나가 달라붙지 않는 옷과 엉망이 된 몸으로 시게오는 바닥을 뒹굴고 기어 비석에 닿았다.
스승님.
내 무덤이었구나. 감흥조차 일지 않았다. 실감이 나지 않는 것도 있었지만 멸망한 세계에 평범한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을리가 없다. 모브는 특별한 아이였으니 그 강한 힘으로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아냐.
살아남은게 아니다. 살아버린거다.
힘들어요.
소년은 청년이 되었다. 마냥 어리던 아이가 지금 눈 앞에선 자신과 같은 나이가 되었다. 이 나이가 되면 마음대로 울지도 웃지도 못한다. 사회라는 틀 안에 살아가기 위해서 이런저런 포장과 거짓말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그래서 지금 제 앞의 그가 비석 앞에 목놓아 통곡하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안다. 원래부터 감정을 올곧게 전달하던 아이였다고는 해도....
괴로워요.
시게오라 불러달라고 한 이유를 생각하지 않았다. 만들어진 웃음에 경계하여 생각할 기회를 놓쳤지만 아마 처음부터 그걸 목적으로 불러달라 했을지도 모른다. 레이겐은 고개를 털었다. 흐느끼는 소리에 너무 많은 생각이 몰려왔다. 모브라고 부르지 말아달라고 했다. 왜냐면 자신이 먼저 그에게 너는 모브가 맞냐고 물었기 때문이다. 이미 너무 많이 변해버린 자신은 모브가 아니라 생각했을까, 아니면 정말 단순히 과거의 모브와 자신을 구분하기 위해서였을까. 애초에 너는 모브였고, 모브인데. 카게야마 시게오는 모브인데 그걸 내가 구분한 시점에서 너 역시 과거의 너와 지금의 너를 나눠버린걸까.
...내 탓인가? 또 실수를 해버린 건가? 분명 너는 내가 처음 봤을 때, 모브라고 불렀을 때 뒤를 돌았는데.
죽고싶어요.
최선을 다해 살던 아이가 운다. 죽고싶다고 제 발 밑에서 통곡한다. 언제나 이용만 하고 지금도 쓸데없이 경계하고 의심하지 못해 실수만 저지른 볼품없는 제 아래에서 운다.
죽고싶어요...
미래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왜 벌써 죽어서, 왜 쓸데없이 죽어서 지금 당장 울음을 토해내는 아이의 어깨 하나를 잡아주지 못하는걸까. 모브.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아이. 누구보다도 강하지만 누구보다도 상냥한 그 존재를 위해서라면 죽음 정도는 극복하라고. 하나뿐인 제자를 위해서라면 악령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았어? 죽고싶다며 네 앞에서 우는 아이를 보며 대체 뭐 하는거야? 신의 스승이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불현듯 생각이 멈췄다.
잠깐, 방금 내가 뭐라고 했지?
레이겐의 생각보다 상황의 변화가 빨랐다. 지진처럼 땅이 크게 흔들려 레이겐과 시게오가 동시에 바닥으로 넘어졌다. 바닥의 모래들은 먼지를 일으키며 레이겐의 주변으로 퍼졌기에 누군가라도 여길 봤다면 무언가 있었다 알아차렸을지도 모르지만 애석하게도 여긴 정체를 모를 괴물들과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레이겐과 시게오만이 있을 뿐이다.
모브!
급히 레이겐이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더이상 그는 시게오의 형체를 유지하지 않았다. 노이즈와 같은 괴성과 함께 일렁이는 검은 안개는 희게 변하고 있었다. 눈이 있을 자리에선 보랏빛의 안광이 매섭게 빛난다. 하늘에는 반구를 매섭게 내려보는 괴물이 크게 입을 벌리는 것과 시게오가 땅에서 박차오른 것은 거의 동시였다. 발을 딛음과 동시에 땅에서는 부서진 건물들이 솟아올라 괴물에게로 날아가고 있었다. 싸움이었다.
떠오르는 건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었던 거대한 브로콜리.
몸이 날아갈 정도의 폭발.
처음 보는 초능력의 폭주.
거대했던 힘.
어떤 아이.
작은 아이.
- 괜찮아요.
레이겐이 정신을 차렸을 땐 몸은 알 수 없는 폐허에서 떨어져 어디론가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어둡지도 밝지도 않았던 그곳과 달리 주변은 온통 흰 빛이었다. 마지막으로 본 모브의 모습도 흰 색이었지만 그건 아무런 온도도 없었다. 지금 그의 주변에 가득한 흰색은 따뜻했다.
- 모브.
- 네, 스승님. 이제 곧 돌아갈 거예요.
- 어디로...?
- 스승님이 계셨던 곳이요.
손을 잡고 있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리니 잘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한건 방금 전까지 비통함에 젖어 울던 모브도 아니며 자신의 제자인 14살의 모브도 아니었다. 그러나 모브였다. 이 모든 세상을 탈탈 털어도 자신을 스승이라 부를 사람은 단 하나 뿐이다.
- 너는?
- 저도 가요.
- 왜?
- 스승님이랑 같이 있고 싶으니까.
- 왜..?
나는 네게 해준 게 없다. 적당히 동전이나 쥐어주고 제령을 시켜먹고 위험한 일에 혼자 보낸 적도 있었다. 그리고 결국 너를 두고 죽어버렸어. 네가 나를 필요로하지 않는다면 몰라도 저기에 울던 너는 나를 부르며 울고 있었는데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 그렇게 알고 싶으세요?
드물게 모브의 목소리는 웃음끼가 섞여 있었다. 이쪽은 심각하고 진지한데 왜 웃는지 원망스러운 마음에 쳐다봐도 역시 잘 보이진 않았다. 다만 웃고 있다는 건 알았다. 만들어진 웃음도 아니고 긴장에서 풀렸던 웃음도 아니라 정말로, 자연스럽게 터뜨린 웃음을 짓고 있었다.
- 부탁 하나 들어주시면 알려드릴게요.
- 네 부탁이라면.
- 돌아가게 되면 전부 말해주세요. 저에게 모든 일과 모든 생각을 알려주세요.
- 그거면 돼?
- 충분해요.
- 그러면 너는 안 울어?
- 네.
- 그럼 그렇게 할게.
죽고싶다고 울던 너를 다시 볼 바에야 훨씬 낫다. 내 잘못도 생각도 이 상황도 너에게 말하는 걸로 네가 그렇게 울지 않게 된다면 못할게 뭐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따뜻하게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웃음소리가 정겹다.
- 언젠가의 오늘을 기대할게요, 스승님.
눈이 뜨였다.
스승님. 악령을 찾았어요. 그렇게 말하며 피터팬처럼 창문으로 들어온 시게오를 레이겐은 가만히 바라보다 옆에 놓아둔 휴대전화를 열었다.
"지금 몇시라고 생각하니?"
"중요한가요?"
"상식은 그렇지."
안내해. 바로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는 레이겐의 등을 바라보며 시게오는 가만히 웃었다. 시간은 새벽 4시 3분을 막 지나고 있었다.
당신의 이런 점을 좋아했다고 말하면 어떤 얼굴로 나를 볼까.
"스승님은 대단하시네요."
"스승이니까. 그런데 뭐가?"
뭔지도 모르고 일단 존경은 태연히 받는 태도도 존경합니다. 얼굴에는 드러나지 않는 웃음과 함께 모브는 읽던 만화책을 내려놓았다. 깔끔하고 정갈한 이 남자의 목에 감긴 넥타이는 늘 그렇듯 단정하게 자리했다. 좀 전에 자신과 함께 타코야키를 신나게 집어먹다 소스에 더러워진 넥타이는 얌전히 물로 닦아 지퍼백에 담겨 그의 가방에 있을 것이다.
"넥타이요. 예비를 두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더러워진 걸 매고 있을 순 없잖아? 접객업인데."
"그런가요."
"당연하지. 모브, 너는 꼬질꼬질한 인간을 앞에 두고 상담하고 신뢰할 수 있겠냐?"
"여긴 이름부터 수상하지 않나요."
"너 제법 말을 하게 됐구나? 이상한 쪽으로 성장하기는."
말은 투덜거리면서도 레이겐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모브도 이번에는 따라 웃었다.
"저는 교복으로도 힘껏이에요."
"그건 네가 아직 어려서 그래. 그리고 교복은 좀 그래도 괜찮아. 적당히 어린애같잖아."
"스승님의 나이가 되면 안되겠죠?"
"뭐 넥타이까진 아니더라도... 깔끔한건 좋은 인상을 남기니까. 모브, 옷은 늘 단정하게. 중요한 거야."
"명심할게요."
그런 날도 있었다.
정말 간신히 여기까지 왔다. 멀리서 몸을 웅크린 채 움직이지 않은 악령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시게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악령 하나 때문에 그 긴 싸움을 벌였고 아무 잘못도 없는 이 곳에서는 수많은 령을 내보내야 했다. 미안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그 이상으로 시게오에게 저 악령의 존재는 중요했다. 간신히, 겨우 저 악령을 제령할 기회가 왔다. 여기서 전부 끝을 낸다.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다. 긴 시간을 또 버틸 자신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사정으로 여기의 자신에겐 꽤 무리를 시키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 만약 14살의 자신이 지금의 스스로가 된다면 분명 같은 일을 했을 것이다. 일단 뭐라고 해도 아직 자신은 이 곳의 미래다.
"저게 악령? 생각보다 작은데."
"힘이 약해져서 그럴겁니다."
"네가 쳐둔 배리어 때문에?"
"...그렇죠."
령을 보내고 차단하는 배리어 안에서 악령이 힘을 끌어올 방법은 거의 없다. 자신이 기억하는 레이겐은 분명 좋아하지 않을 방법이기에 알지 못하게 일을 처리할 생각이었지만 혼자만의 삶이 너무 익숙해진 탓일까, 아니면 스승은 역시 스승이란 걸까.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니 분명 같은 어른의 삶을 살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상대-에쿠보겠지. 이 배리어의 상태를 확인하고 현재의 자신을 살필 수 있으며 그와 객관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을 가진 존재는 그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운 광경이겠구나. 레이겐에겐 보이지 않을 시야에서 시게오는 자조했다. 그 그리운 광경을 눈 앞에서 성사시키지 못하게 만든 것은 자신이건만 무슨 자격으로 그걸 그립다 바라는가. 나는 그 무엇도 바랄 자격이 없다. 어서 저 악령을 지우고 이 세상을 떠난다. 할 수 있는 일은 그 정도며 그것만을 해야한다. 그렇게 마음 속으로 다짐하며 제령을 위해 손을 뻗은 때였다.
"잠깐. 그 전에 이야기 좀 하자."
미처 펼치지 않은 손 위로 올라온 감촉이 낯설고 그립다. 장갑을 끼고 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 손을 알고 있다. 언제나 가장 힘든 순간에 괜찮다며 어깨며 머리며 올라왔던 다정함은 지금도 제대로 기억한다.
"제령 후에 부탁드립니다."
"안되겠는데."
목소리에 여유보다 단호함이 크다. 드문일인데. 뻗은 팔에서는 아래로 내리려는 무게감이 느껴진다. 레이겐의 강한 의지에 시게오는 결국 팔을 내렸다. 분명히 처음 만났을 때 이 악령이 존재하고 자신이 존재함으로써 발생하는 해로움을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머리 좋고 요령 좋은 이 남자가 자신을 막아 서는지 잘 몰랐다. 그럼에도 팔을 내린 이유는 하나 뿐이다. 레이겐이 그러길 원하니까.
"...지금 이시간에도 제가 존재하는 이상 당신의 제자가 힘들어진다고 말씀 드렸을텐데요. 아니면 아무래도 좋은 겁니까?"
"그럴리가. 제자는 내 목숨보다 소중하다고. 빨리 깨어나면 좋지만, 너도 그래."
"네?"
"너도 모브잖아."
그렇게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게오 입니다."
"그리고 저것도 너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건 웅크린 채 이쪽을 주시하는 악령. 시게오는 확신을 가지고 자신을 바라보는 레이겐을 바라보기 어려워 고개를 내렸다. 흔들림 없이 가리키는 저 긴 손가락을 멋지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초능력도 영능력도 없는, 무언가가 없어도 자신만의 의지와 힘으로 늘 똑바로 보고 문제와 해답을 가리키는 이 사람을 스승으로 따랐다. 기껏 숨기고 숨겨온 사실이고 힌트도 주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아니 그에 대한 생각조차 할 틈을 주지 않으려고 했다. 그저 저 악령을 잡는 것에만 협력하고 아무 일도 없던 것 같이, 마치 평소에 있는 흔한 제령 일처럼 그렇게 지나가고 싶었다.
"...무슨 말이신지."
"네가 저기서 나오는 걸 봤어."
"저건 악령입니다."
"네가 깨우기 직전까지 본 거야."
"꿈이네요."
"너야, 모브."
그러나 상대는 자신의 스승이다. 어떻게 한 건지 앞으로도 알 수 없겟지만 언제나 그는 자신의 상태를 자신보다도 잘 알았다. 괴로울 땐 손을 잡아주었고 슬플 때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자신이 한 선택을 언제나 응원해주었다. 그리고 결국 이렇게 한심한 모습으로 나타난 자신을 알아보고, 알아주려고 하고 있었다.
상냥한 사람. 그런 당신이 정말 좋았다.
"역시 스승님은 대단해요."
시게오는 레이겐을 향해 손을 뻗자 비누방울처럼 동그란 배리어가 레이겐을 감싸 하늘에 띄웠다. 저 악령의 목적은 그가 아니었으며 일전 도망간 것도 그 이상의 전투를 하게 된다면 아무 힘도 없는 그에게 피해가 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걸 시게오가 레이겐에게 설명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으로부터는 어떠한 힌트도 주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그 짧은 대화와 원인 모를 꿈으로 그는 이미 자신의 정체를 거의 알아내지 않았는가. 머리가 좋은 남자이니 자신의 의도를 알아챌지도 모르지만, 그러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제 말은 들리나요?"
뭔가 말하고 싶은지 레이겐은 연신 배리어의 안을 때리며 외치고 있었지만 시게오에겐 닿지 않았다. 최대한 견고하게 만들 생각이었는데 성공한 것 같다. 덕분에 자신의 소리가 배리어 안에 닿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괜찮았다. 시게오는 여기서 모든 걸 끝낼 생각이었다. 이제 그만두고 싶었다. 이 싸움도, 절망스러운 자신의 존재도, 저 악령도, 그리운 당신도.
"제자의 마지막 부탁 하나 들어주실 수 있나요?"
세게 내려치던 레이겐의 손이 멈췄다. 들리는 것 같다. 다행이다. 시게오는 웃었다. 들리지 않을 걸 대비하여 다른 수단을 남겨뒀지만 다행히 그에게 직접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 의무도 없을 그를 휘말리게 한 죄책감이 있었지만 역시 최후만큼은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말을 하고 싶었다. 사실 그를 끌어들인 이유는 과거에서 자신이 있는 미래로 오는 관문을 차단하기 위해이기도 했지만 그냥 너무 그리워서이기도 했다. 비록 거의 당신과 함께 있진 않았지만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목표로 움직인다는 그 사실로도 벅찼다. 지금 이렇게 나의 말이 당신에게 닿는 사실이 기쁘다.
나는 당신을 좋아했다. 함께 있고 손을 잡고 서로 안을 수 있다면 그보다 행복한 일이 없을거라 생각할 정도로 당신을 사랑했다. 나의 앞에서 있는 힘껏 어른의 행세를 해준 것, 당신 역시 불안했을텐데도 내 손을 잡아준 걸 기억한다. 그 상냥함도 다정함도 나를 위한 많은 거짓말도 전부 좋아했다. 당신보다 소중한 이는 없었고 앞으로도 없다. 당신을 사랑한 채 죽을 이 순간마저 기쁘다고 하면 화를 낼까. 그렇지만 그정도로 당신이 좋았다. 좋다. 지금도.
"일이 끝나면 자고 있을 저한테 이 모든 일을 말해주세요. 저에게 모든 일과 생각을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자신의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전해듣진 못했다. 이 일을 전부 목격한 레이겐이 입을 다물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이미 꽤 규모있게 일을 벌려놓았다. 레이겐이 말을 하지 않아도 에쿠보, 리츠, 하나자와 군 등 수많은 사람들이 기현상을 겪고 목격하고 있는 상황이니 분명 누군가를 통해서 이 일은 잠들어있을 자신에게 전해진다. 그러면 된다. 그러면 지금의 자신과 이곳의 과거는 끊어진다. 자신이 있는 미래가 어찌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그 때엔 저 악령과 함께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테니 상관없다.
그렇게 해서 당신이 살아주길 바란다.
이번에야말로 누구보다 행복해지길 바란다.
나의 곁이 아니어도 괜찮다. 당신이 선택할 누군가와 함께 있게 된다면 그 누구보다도 큰 박수를 쳐서 축복할테니까 이번에야말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살았으면 좋겠다.
"...당신을 정말 좋아했어요."
고백과 동시에 악령의 괴성이 하늘을 울렸다. 역시 타이밍이 나쁜건 본능일지도 모르겠다. 시게오는 분위기 좀 읽으라며 타박하는 그를 떠올리고, 조금 웃고, 악령에게 달려갔다. 마지막 싸움이다.
시작은 미국의 어딘가라고 한다. 하나자와나 다른 사람들이 말했던 것처럼 초능력을 연구하는 곳은 세계 여러곳에 있다. 그 중 한군데의 연구의 실패로 일어난 참사는 결국 생명의 종말을 불러왔다.
그들의 연구목표는 인간에게 잠재되어있는 능력을 증폭시키는 것이었다. 새로이 힘을 주입시키는 것도 아니고 본인에게 내재된 능력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증폭하자는 목표아래 꽤 많은 연구진이 모였다고 들었다. 그들의 의도는 분명 나쁘진 않았으리라. 연구하는 일반인은 자신역시 힘을 사용하고 싶었으며 모여든 초능력자들은 자신들의 감각에 대한 이해와 힘에 대한 지식을 익혀가는 데 좋은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모른다. 왜냐하면 그 연구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연구소의 폭발과 동시에 그들의 연구는 폭발을 타고 전 세계로 흩어져 생명의 종말을 불렀기 때문에 진의는 알 수 없게 되었다. 대부분 그 폭발로 죽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웃기지 않아? 인류가 여기까지 오는데 진화만 20만년을 했고 지구는 46억년 전에 태어나 35억년 전에 간신히 생명을 낳았는데 인간의 이기심으로 생명이 전부 없어질 거야. 길면 1년 정도 걸리겠지. 지구가 너무 가까워진 탓일수도 있지만.... 그보다 이걸 인위적으로 하려고 한 인간의 잘못이겠지. 카게야마 군. 네가 했던 말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게 됐어. 이런 힘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으면 좋았을텐데.』
시게오가 생명의 종말을 알게 된 건 모든 참사의 근원지 근방에서 생활을 하던 하나자와 덕분이었다. 미국이라고 해도 일본보다 큰 주가 있을 정도로 땅이 컸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하나자와는 폭발한 연구소 근방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소속은 달랐지만 하나자와 역시 미국의 초능력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빨리 시게오에게 현재의 상황과 앞으로의 일에 대해 말해줄 수 있었으나 다시 말하면 그는 그 참사를 가장 직격타로 맞은 인간이기도 했다.
"하나자와 군."
『이 통화가 마지막이 될 줄 몰랐어. 다음달에 일본에 가면 다 같이 모여서 옛날 이야기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자고 약속했는데 지키지 못하게 된 건 아쉬워.』
"끊지 마, 하나자와 군. 저기, 내가 지금."
『안 돼. 카게야마 군, 지금 여기 오려는 거지? 너의 능력이라면 여기까지 오는 데 충분하겠지만 그건 추천하지 않겠어. ....나는 이미 인간이 아냐. 너에게 지금의 상황을 전달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인간으로서의 이성을 잡고 있을 뿐이야. 아마 이 통화가 끝나면 나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겠지. 일본의 뉴스에서도 나를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예전 탐지망을 넓혔을 때 적어도 이 주 안에서 나보다 강한 초능력자는 없었어. 오늘 이 근방은 내 손으로 없어지겠지...? 하하, 어째서 일까, 카게야마 군. 그런데도 죄책감이 들지 않아. 이미 난 인간이 아니라서 그런 걸까?』
하나자와는 시게오에게 최대한 자세히 설명했다. 그는 편의상 폭발과 함께 흩어진 연구성과를 <바이러스>라 칭했다. 연구의 목적은 힘의 증폭이며 힘이란 강한 감정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많다. 원래는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만-이었겠지만 애석하게도 실패했으며 흩어져나간 바이러스는 광기를 불러왔다. 평범한 인간에게 달라붙은 바이러스는 감정의 광폭화를 일으켰고 덕분에 잠재된 힘은 있는대로 터져나갔다.
문제는 초능력자들이었다. 바이러스는 초능력자와 일반인을 가리지 않는다. 원래부터 강대한 자가 강제로 그 힘의 한계를 끌어올려지고 폭주하게 되는 것이다. 상당수의 초능력자들은 이미 인간의 형태로도 남아있지 않았다. 기괴한 괴물로 힘의 폭주만 남아 본능적으로 몸부림을 치며 무수고 폭주하고 내달렸다.
하나자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간으로서 마지막 이성이 잡은 건 누구보다 강한 자, 절대자에 가까웠던 그에 대한 존경이자 믿음이었다.
"아니야, 하나자와 군. 너는 인간이야. 내 친구고...."
『...고마워, 카게야마 군. 그렇게 인정받아서 기뻐. 나는 이제 무리지만, 너라면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잠깐만, 끊지 마..!!"
『너는 살아.』
결국 통화는 끊어졌다. 스피커폰으로 켜놓은 전화에서 의미없는 신호만 사무소에 울린다. 시게오와 레이겐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미국에서 이상한 괴물이 나타났다는 속보와 함께 하나자와에서 전화가 왔다는 시게오의 말에 레이겐이 스피커폰으로 돌려놓고 안부나 물을 겸 저거에 대해서도 물어보자는 가벼운 권유로 돌려놓았던 것이다. 켜놓은 텔레비전에는 끝없이 속보가 전해지고 있었다.
《지금 미 xxx주에서 일어나는 실제 상황입니다. 움직임 없이 웅크리고 있던 괴물이 갑자기 괴성과 함께 주변을 파괴하기 시작했습니다! 근방까지 갔던 기자에 따르면 이 괴물은 어째서인지 몰라도 전화를 잡고 있었으며 현재 추적중이지만 아시아 쪽으로 연결이 되었다고 합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형상은 드래곤이라 불리는 것과 비슷한 형상이나 전혀 다른 생물체이며....》
와작. 시게오는 갑자기 들린 소리에 텔레비전에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자신의 손에서 빼간건지 방금 전까지 통화하던 그의 휴대전화가 레이겐의 발에 밟혀 박살이 나고 있었다. 발로 밟는 걸로는 다 부서지지 않아서일까, 급히 창고로 간 레이겐은 결국 망치를 들고와 형체도 없이 박살을 내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모브. 가자."
어디로? 레이겐의 말을 듣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바이러스는 빠르게 세계로 퍼지고 있다. 일반인과 초능력자를 가리지 않고 감염되며 사람들을 미치게 만든다. 더군다나 초능력자는 그 힘에 이기지 못해 변이가 일어나고 만다. 언제나 당당하게 웃던 그는 지금 텔레비전의 속보에 나오고 있는 괴생물체로 소개되고 있다. 초능력자들에게 더욱 위험하다.
초능력자들은.
"모브!"
"오지 마세요!"
레이겐이 다가오는 동시에 시게오는 뒤로 물러났다. 하나자와가 당했다. 나이를 먹으며 시게오는 자신이 강한 초능력자임을 인지했다. 그러나 자신만큼 강한 자들도 많았다. 세리자와도 있었고 하나자와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당했다. 유언만 남기고 인간으로서 죽었다. 이 바이러스는 힘을 타고 퍼진다고 했다. 특정할 수 없으니 속수무책이다. 유능했던 그의 말로는 이틀 정도면 일본에도 도착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전에 가야 한다. 어디로?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눈 앞의 사람은 아니었다. 자신은 초능력자이고, 이 바이러스는 초능력자에게 더욱 위험하다.
"이럴 시간 없어, 모브."
"알아요, 알, 알고 있어. 그러니까 스승님은, 저기, 그러니까. 리츠를. 우리집에."
"모브!"
"내 옆에 오지 마!!"
최대한 아무도 없는 곳에서, 최소한 당신이 없는 곳에서. 죽음을 실감하는 것보다 그가 자신의 곁에 오는 것이 두려웠다. 이 힘이 무서워 당신을 찾았지만 이 힘이 무서워 당신의 곁에 갈 수 없다. 힘을 사용하면 바이러스가 달라붙는다. 말없는 대치 끝에 사무소에서 도망가기 위해 먼저 움직인 건 시게오였지만 그보다 레이겐이 빨랐다. 잡혔다는 사실에 사색이 되어 돌아본 시게오를 레이겐은 강하게 끌어안았다. 열심히 한 운동의 힘인지 큰 편인 그의 키를 간신히 넘어섰던 때에도 이런 비슷한 적이 있었다. 기분은 전혀 달랐지만.
"괜찮아."
잡힌 등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그랬다. 이 사람도 무서울 것이다. 두 눈으로 지금까지 자신이 해온 수많은 일을 목격하고 지시한 사람이 바로 그가 아니던가. 도망가야 할 건 자신이 아니라 그였다. 막말로 자신은 망망대해 한중간에서 폭발해버려도 괜찮다. 그럴 힘이 있지만 이 사람은 아니다. 당장 가야 하는건 이 사람이다. 자기 같은 폭탄 따위 뿌리치고 고함치며 쫓아내던가 도망가는 게 맞다.
"스승님."
"괜찮아, 모브."
"스승님."
"가자. 도망가자. 내가 예전에 말했지? 싫고 힘들면 도망가도 괜찮다고. 다 괜찮아. 나만 믿어. 이 스승만 믿어."
"스승님, 제발."
"모브. 가자."
그런데도 그는 자신을 잡았다. 초능력자에게 무엇보다도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머리 좋은 그는 이미 알텐데도, 레이겐은 자신의 두려움과 공포보다도 시게오의 절망을 잡았다.
"제가 먼저 스승님을 못 놓는거 아시잖아요."
"당연하지. 내가 그렇게 했어. 비겁한 어른이라고 해도 괜찮아."
"제가 어떻게 그래요."
"응. 넌 좋은 녀석이니까."
"그러니까 스승님, 제발 놔주세요."
"모브, 부탁이야."
나랑 같이 가. 흐려지는 목소리에 결국 시게오는 맥없이 늘어뜨린 양 팔을 들었다. 부들부들 떨면서도 자신을 꽉 안아 놓지 않는 등을 마주안았다. 이 사람의 말은 무엇 하나 흘리고 싶지 않았고 이 사람의 부탁은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냥 이 사람 곁에 있고 싶었다. 그렇게 살고 싶었다.
27살의 여름이었다.
그러고보니 정말 1년이었지. 시게오는 문득 생각난 자신의 나이를 떠올리며 하나자와가 죽기 직전 한 말을 생각했다. 길면 1년. 그는 정말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27살 여름에 도망쳐 28살 자신의 생일날 지구는 멸망했다. 완벽하게 채운 1년은 아니었지만 어찌되었든 그 쯤은 됐다.
"...이쯤 되면 죽을 법 하지 않아? 나."
대답을 딱히 기대하진 않았다. 시게오는 목에 차는 피를 바닥에 뱉었다. 입안에 느껴지는 게 무슨 맛인지는 이미 잊은 지 오래다. 다만 입에서 뭔가 계속 흐르는 건 영 좋아보이지 않기 때문에 옷 소매로 닦았다. 저 악령과 같은 물질로 만들어진 옷은 아무리 더럽혀도 더러워지지 않는다. 처음에는 왜 이런게 있는지 잘 몰랐지만 확실히 '죽음'이 가까워지니 주마등까진 아니더라도 이런 저런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다.
"옷은 늘 단정하게...인가."
이 옷을 봐줄 사람은 아주 오래전에 생을 달리했고 이 옷을 봐준 사람은 별 다른 말이 없었다. 그럼 이렇게 입은 게 합격이란 걸까. 물어볼 걸 그랬다. 그런 맥없는 생각을 하자 악령이 다시 달려들었다. 그렇게 비명을 지르면서 달려들면 누구라도 안다. 피할 이유가 없었기에 시게오는 달려드는 악령의 전면에서 뻗은 손에 힘을 집중해 터뜨렸다. 정확하게 머리를 날려버릴 생각이었는데 보호 본능이 강한 곳이라 그런지 악령은 몸을 비틀어 공격의 방향을 피했다. 그래도 다 피하진 못했는지 시게오의 왼쪽 눈 위쪽의 머리가 폭탄이 닿은 듯 폭발했다. 정말 아깝다. 죽을 수 있었는데.
악령이 다시 운다. 기괴한 노이즈를 섞은 괴성으로 울부짖었다. 괴성과 함께 흔들리는 바람에 머리가 멋대로 휘날렸고 자갈이 몸을 때렸지만 시게오는 개의치 않았다. 저것도 고통스럽겠지. 결국 너도 나니까. 이번에야 말로 제대로 죽을테니까, 힘들어하지 않아도 돼.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모브!!》
손에 모으던 힘이 풀린다. 사방에서 옭아매던 힘이 터지자 악령은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왜 도망가는 거야. 이번에야말로 죽을 수 있는데. 아, 그 전에 스승님이 불렀지. 변함없는 목소리에 웃음이 난다.
"텔레파시를 쓰다니, 스승님도 이젠 엄연히 초능력자네요. 배리어에 익숙해진건가? 원래 다루는건 잘하셨죠."
《모브! 내 말 들리냐?! 당장 이거 내려놔! 그리고 그만둬!》
"둘 다 들어드릴 수 없네요."
시게오는 머리에 울리는 레이겐의 소리를 뿌리치고 악령에게 달려갔다. 레이겐의 말을 들어 좋은 일이 없었다. 평범한 날의 스승과 제자로서면 몰라도 생명의 존재가 멸망되는 것이 결정된 날, 함께 도망가자는 그 말 이후로 레이겐의 모든 말을 들었던 시게오는 그가 떠난 후의 모든 시간을 후회로 지냈다. 이젠 그러고 싶지 않았다.
바이러스는 결국 피할 수 없었다. 공기를 타고 소리를 타고 힘을 타고 흐르는 그 존재를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시게오가 강한 힘의 그릇인 것처럼 바이러스는 힘을 타고 흘러 닿았다. 예전 에쿠보의 말로는 레이겐의 영력은 정말 터무니 없을 정도로 약했다고 하더니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어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영력이 비상하게 길러진 정도로 그쳤지만 역시 문제는 시게오였다. 아무도 없는 땅에서 시게오는 몇번이고 울부짖고 몸을 비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려꽂는 고통과 힘에 발버둥쳤다. 그러다 쓰러지면 레이겐은 둘 만이 사는 곳으로 옮겼다. 제정신이 들 때마다 시게오는 몇번이고 울면서 빌었다. 제발 떠나라고. 분명 대피소에 사람들이 있고 살아남은 인간들이 있을테니 거기로 가서 살아달라고 울고 화도 내고 머리를 조아려봤지만 레이겐은 끝내 시게오의 곁에 머물렀다.
《모브!!》
"당신 말은 안 들어."
달려드는 악령을 향해 손에 모은 힘을 내던졌다. 오른쪽 어깨가 한웅큼 떨어져나갔다. 이제 오른팔은 무리구나. 확실하게 죽어가는 감각이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죽을 수 있다. 다만 죽어가는 지금까지도 그가 왜 자신의 곁에 있어줬는지 모른다. 스승으로서의 책임감인지 어른으로서의 의무인지, 혹은 당신도 조금은 나와 같은 마음에서였는지. 물어보고 싶어도 이제 당신은 없으니 어찌할 수 없다. 배리어 안에서 울부짖는 당신은 나의 당신이 아니니까. 그래도 너무 그렇게 외치면 목이 상하니까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 스승님. 나의 스승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레이겐 스승님. 당신은 당신을 위해서만 살았으면 좋겠다. 그게 나를 위한 일이란 걸 좀 알았으면 좋겠다.
《그러다 죽어! 죽는다고, 모브!!》
"그러려고 하는 겁니다."
원래 진작 죽어야 했던 목숨이었다. 그러나 당신의 상냥함으로 바이러스에 감염되고도 약 1년을 살았다. 고통에 몸부림치다 기절하기를 1년을 반복했다는 소리지만 솔직히 그 사이의 기억은 그다지 없다. 그저 눈을 뜨면 당신이 있었고 눈을 감아도 당신이 곁에 있었다는 사실만 기억이 난다.
그렇게 시게오는 떠나달라 빌고 레이겐은 붙잡고 있는지 약 1년. 레이겐의 노고가 무너지게 된 건 공교롭게도 그들이 도망가게 만든, 평범한 일반인들 때문이었다. 사회에서 도망가고 약 1년 동안 세계는 엉망이 되었으며 살아남은 인간들은 모든 능력자들에게 그 분노를 쏟았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살아남은 인간들 또한 일반인에서 능력이 비상하게 증폭되었기 때문에 근거지는 발각될 수 밖에 없었다.
그 순간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여전히 고통에 몸부림치다 기절해 얼마나 자고 있었을까, 갑자기 레이겐의 목소리가 머리에 울렸다. 기절하고 깨어나고 몸부림치기 바빠 몰랐지만 시간이 그렇게나 지났는지 제자의 생일이니 좀 맛있는거나 가지고 오겠다며 즐거운 목소리로 나갔던 사람이었다. 다급한 소리에 시게오가 퍼뜩 놀라 일어났을 땐 이미 전부 끝나버리고 있었다. 혼자 살았다면 어떻게든 살았을 그는 시체가 되어 사람들에게 끌려오고 있었고 그들의 눈은 대부분 분노에 미쳐 돌아간 상태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게오는 눈을 감았다. 제 곁에 있던 레이겐을 위해 간신히 잡고 있던 무언가를 버티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모브!!》
"나는 죽어야 해."
악령의 힘에 밀려 시게오의 몸이 레이겐의 배리어 근처까지 떠밀렸다. 여기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일어나지 못한다. 그럼 저 악령을 제령할 기회를 놓친다. 그래서는 안된다. 레이겐이 급히 다가오려고 했지만 시게오가 먼저 손을 뻗어 막았다. 배리어는 아직 튼튼했고 자신의 힘 아래 있다. 정확하겐 이 시대에 사는 카게야마 시게오의 힘이지만 말이다.
《네가 그럴 필요 없어!》
"나한테 길을 열어주지 마!!!"
갈라진 목소리로 외쳐진 건 레이겐이 단 한번도 모브로부터 받아본 적 없는 감정, 분노였다. 악령과 마주한 이후 처음으로 시게오의 시선이 악령에게서 레이겐에게로 돌았다. 아. 레이겐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작은 탄식이 새어나왔다. 감정에 브레이크를 걸 필요가 없는 만큼 시게오는 온 몸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만 좀 해! 나를 위하는 건 그만둬요!! 당신은 당신의 삶을 살아! 사기꾼이잖아? 영능력도 초능력도 아무것도 없었잖아!! 그냥 그렇게 살아!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만 살고 자신의 이익만 추구해! 그렇게 살았잖아! 나 같은건 그냥 버려놓고 살아, 살라고, 살아줘, 제발 살아줘!!"
이제 없는 당신에게 말하고 싶었다.
"당신 말대로 저 악령은 나에요. 내가 직접 갈라놓은 나의 영혼!!! 당신이 그렇게 죽어버리고 나서 놓아버린 인간의 의식이 나라면, 저건 나의 힘, 내 영혼, 당신이 그렇게나 써먹었던 내 힘!! 그 불길함 자체에요, 알겠어요? 악령이야, 아니 악령보다 더 한 거야. 알아 듣겠어요? 내가 뭐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죽어버리고, 나를 버리고 가놓고, 멋대로 살려놓고 멋대로 죽어버리고 혼자 남은 내가 뭐가 됐을 거 같아?! 신이 됐어!! 죽어버린 별과 죽어버린 생명과 인간이 아닌 것들만이 남아버린 세상에서 그 모든걸 부수기 위해 남은 신이 됐다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이 맑아져있었다. 그리고 주변엔 아무것도 없었다. 손을 대면 부서졌고 발을 딛으면 무너지는 폐허만이 펼쳐져 있었다. 뭐가 뭔지 몰라 한참이나 서있었다. 그러다 깨달았다. 이 별의 생명은 자신이 놓아버린 뭔가에 있었고 그걸 포기한 동시에 지구의 생명이 전부 증발했음을. 남은건 변해버린 인간, 혹은 초능력자, 혹은 아마 영험했을 무언가들의 변이체들 뿐.
그럼 나는 왜 남아있지?
그것도 금방 알 수 있었다.
"죽고싶어. 나도 인간이었는데. 그냥 인간으로 평범하게 살고 싶었는데! 그런데 죽을 수 없었어! 신이 됐어! 내게 남겨진 역할때문에 나는 자살도 할 수 없었어요. 머리를 깨고 싶어도 배리어가 막고 손목은 칼이 들어가지도 않았어. 뛰어내려도 떠올라버려. 자지 않고 먹지 않아도 아무렇지도 않아. 신이니까! 그런 내 역할이 뭔 줄 알아요? 그 괴물들을 전부 없애는 거!! 이 별의 생명은 끝났으니까, 생명은 가야할 곳으로 되돌아가서 순환을 해야 하니까!! 나는 그래서 남아버렸어!! 부수기만 하는 신이 돼서!!!"
그래서 시게오는 남아있는 것들과 싸웠다. 놓아버린 끝에 멸망해버린 별에서조차 존재할 수 있었던 변이체들이기에 하나 하나가 벅차고 힘겨웠다. 온 몸이 찢겨진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시게오는 죽지 못했고 싸워야만 했다. 그것이 자신의 일이었다. 이 일이 끝나면 죽을 수 있을까. 아니면 저 변이체에게 죽어버릴 수 있을까. 그런 생각만 하며 얼마나 싸웠는지 모른다. 달이 사라지고 태양이 뜨지 않는 세상에 죽지 않는 존재는 날의 헤아림이 필요가 없었다. 그저 싸우고, 임의로 만들어놓은 레이겐의 무덤에서 쉬고 또 싸움을 반복했을 뿐이다. 그렇게 모든 존재를 돌려보낸 날이 왔다.
그래도 시게오는 죽지 않았다.
"아무 것도 없는 세상에서 고민했어. 어떻게 해야 죽을 수 있을까. 이제 싸울 상대도 없어서 내 몸을 씹어달라 부탁할 수도 없었어. 그래서 고민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악령을 만들었어요."
힘의 근원. 원래부터 싫었던 그 모든 걸 담아 시게오는 제 몸 밖으로 내던졌다. 인간이 아니기에 이젠 살아왔다는 표현을 사용할 수 없었지만 자신이 존재한 모든 시간 중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통증과 함께 영혼은 반으로 찢어졌다. 힘은 대부분 내던진 그것에게 뽑혀갔지만 괜찮았다. 드디어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누구도 죽이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죽을 수 밖에 없게 되었지만 죽을 수 있다는 사실에 환희했다.
그러나 내던진 원한은 생각보다 깊고 강했다.
"설마 나 자신에 대한 분노가 그렇게 클 줄 몰랐어요. 나를 증오하다 못해 '카게야마 시게오'라는 인간을 없애고 싶어서 시간을 넘어갈 줄 몰랐어. 스승님. 처음 만났을 때 제가 그랬죠.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 능력은 없다고. 맞아요. 저는 없어요. 힘을 거의 모두 저 악령에게 던졌으니까 제겐 그럴 힘은 없었어요. 나를 누군가 부르지 않는 이상 나는 쫓아갈 수가 없었어."
《...그래서, 그 때.》
"여기의 카게야마 시게오가 이길 수 없는 이유는 저 악령의 힘이 강해서이기도 하지만 저 악령의 본질 안에 바이러스가 주변에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어요. 여기의 전 아직 어리고 자신의 감정을 감당하지 못하겠죠. 그러다 힘이 터져버리기라도 하면 당신이 위험했을거예요. 아마 본인도 무의식에 그걸 느꼈는지 악령과 연결된 영혼-즉, 저를 찾아서 여기로 끌고 온 거예요. 그래서 여기에 올 수 있었어요."
《모브.》
"저쪽 세상이라면 괜찮았어. 인격인 내가 죽어서 힘인 저것만 남아도 어차피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세계니까. 그렇지만 여긴 아니에요. 과거라도 해도 아직 당신과 내가 살아있는 세상이야. 생명이 남은 세상이야. 그걸 나의 이기적인 마음으로 휩쓸리게 할 순 없어. 이건 나의 책임이지 당신들의 일이 아니야. 그렇지만 나는 당신을 끌어들였지. 왜냐면 당신이 있어야 하니까. 정확하게는 지금 잠들어있을 나에게 이 모든 일을 전달해야 하니까. 그래야만 이 과거는 나에게 이어지지 않아요. 나는 이런 미래가 있는지 몰랐으니까. 나에게 닿지 않은 미래가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죽지는 않겠죠. 살아남겠지. 아무것도 없는 세상이 되지 않을 거야. 그러길 바라요. 그러기 위해 내가 지금 여기에 있어. 그리고 기왕이면 나에게 말해주는 사람이 스승님이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말하지 않을 거란 생각은 안했어?》
"했어요. 그래서 일을 크게 벌렸잖아요. 당신이 말하지 않아도 누군가는 나에게 말해줄 거야."
《내가 막을 거야.》
"무리야. 나의 모든 걸 당신이 알거란 자만은 말아주세요. 하지만 스승님."
나의 레이겐 스승님.
"나는 그런 당신을 사랑했어."
따뜻한 그 등을 따라 걸었다. 언제나 지표로 삼았다. 존경했다.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다.
카게야마 시게오는 레이겐 아라타카를 사랑했다.
《모브, 기다려!!》
"당신 말은 안 듣는다고 했어."
머리로 울리는 절규를 뒤로하고 시게오는 차분히 모아둔 힘을 가지고 내달려오는 자신을 향해 뛰어들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우선은 그 기분나빴던 손. 당시에는 상황판단도 덜 된데다가 모브의 안위로 협박을 밀고 들어오며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기에 그저 상한 기분에 그리 느꼈다 생각했다. 싫은 사람은 같이 숨만 쉬어도 싫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런 걸 보고 쫓아가는 지금 이 상황에서 생각해보니 그건 명백하게 이상했다. 거친 손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일단 체온이 없었다. 살 느낌도 인간의 피부느낌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다음은 모든 동사의 완성. 스스로에 대해 설명할 때, 처음 레이겐이 시게오에게 너는 모브냐고 물었을 때 그는 긍정했으나 거절했다. 그 호칭은 이 곳의 자신에게만 해당된다 못을 박았다. 그러면서 스승'이었다', 제자'였다'고 말했다. 과거형이다. 끝나버린 세계에서 지냈기 때문에 그에게 모든 것은 과거일 뿐이다. 지금은 아니다, 가 아니라 과거에 그랬다, 라고 끝을 맺는다. 모든 가치는 과거에 있고 현재에 남은 건 없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제 앞에 존재하는 카게야마 시게오란 인물은 도대체 뭐가 되는가. 너의 가치는 어디에 있나.
- 걱정마세요. 여기의 저는 괜찮을겁니다. 그러니 어서 악령을 제령하러 가죠.
괜찮냐고 물었다. 악령을 찾았다며 어서 따라오라던 시게오는 레이겐의 말에 아무렇지도 않은 무표정으로 그리 말하고 등을 돌렸다. 레이겐은 뭐가 괜찮은지 물어보지 않았다. 물론 지금 방에서 힘을 흡수당하면서 잠들어있을 자신의 제자가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다. 3일이 넘어가도록 뭐 하나 먹지도 못하고 잠만 자고 있으니 걱정이 들지 않는게 이상하다. 하지만 동시에 제 앞을 걸어나가는 그 역시 마찬가지다. 그 역시 지금까지 그 무엇도 입에 대지 않았고 잠도 자지 않았다. 가끔 레이겐의 집 근처에 서성일 뿐 이내 모습을 감췄다. 에쿠보가 말한 쵸미 시 전체를 감싸는 배리어 때문이다.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저 악령을 제령하기 위해서.
그런데 그게 정말 악령일까. 꿈이지만 실제했고 환상이라기엔 잠에서 깨어났던 그 광경이 지금도 눈 앞에서 또렷했다. 자신과 모브를 공격했던 악령과 같은 모습의 검은 안개에서 빠져나왔던 하얀 손. 얽히며 만들어졌던 검은 옷과 머리카락과 토해지던 한숨. 검었던 숨. 단정한 옷과 달리 엉망이었던 얼굴과 상처. 다 부서진 폐허의 세계속에서 유일하게 따뜻했던 반구의 안. 하얀 모래. 이름없던 비석.
그리고 인간.
고통에 울부짖으며 슬픔에 통곡하는 자.
그건 틀림없는 인간이며 카게야마 시게오라는 이름으로 통칭 모브, 레이겐 아라타카에게 있어서 단 하나뿐인 제자였다.
레이겐은 악령의 자취를 따라 걷는 시게오를 바라보았다. 배리어를 치며 몇 군데 악령을 잡아놓을 함정을 쳐놓았는데 아무래도 목표로 하던 곳에서 도망쳐 다른 곳에 걸린 듯 했다. 저쪽으로 이동하죠. 그렇게 말하며 가리키는 손은 옷과 같은 검은 장갑으로 덮여 있었다. 그 안에 하얀 손이 있음을 안다. 그러나 레이겐이 그걸 본 건 꿈에서 한번, 그리고 처음 만나 협력을 약속하며 잡았던 악수 때 뿐이었다. 꿈에서는 벗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왜 끼고 있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자신이 느꼈던 그 명백한 '인간이 아닌' 느낌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장갑을 끼고 악수를 했어도 좋았을텐데.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게 경계하게 만들기 좋았을텐데 왜 굳이 장갑을 벗고 의심의 여지를 내밀었을까.
레이겐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고개를 저었다. 왜냐고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 이미 보지 않았던가. 필사적으로 기어올라와 자신을 부르며 울었다. 그토록이나 자신을 찾고 있었다. 닿고싶었으리라. 아마 그 상태 그대로 내밀었다면 기분이 상할대로 상했던 자신이 쳐냈을테고 그건 정말 바라지 않는 일이겠지. 비록 수많은 형태와 거짓말로 감추고 있다고 해도 본질은 자신이 아는 카게야마 시게오다. 모브다. 예의없는 행동을 싫어하고 남과 반목하는걸 좋아하지 않으며 이런 사기꾼같은 자신을 믿고 의지해주는, 유일한.
너라는 유일함.
'나도 그래.'
어?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자 앞서 걷던 시게오 역시 발을 멈췄다. 돌아보는 시선에 의문이 가득했지만 의문이 가득한건 이쪽이었다. 안들렸다고? 자신이 들은 소리를 모브가? 반대의 경우는 있어도 이런 적은 처음이라 레이겐은 방금 들린 목소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손만 흔들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커다란 강당에서 직접적인 소리가 아니라 울리는 소리를 밖에서 듣고 있는 느낌같지만 멀리서 애매하게 들리는 그것과 달리 의지와 전달이 명확하다.
게다가 이 소리는 착각이 아니라면, 분명 그건데.
"...스승님?"
"아니야, 아무것도."
사람 의심만 낳았던 전과 달리 약간 고개를 숙이며 묻는 게 꼭 지금의 모브랑 닮았다. 레이겐은 그 얼굴에 입을 다물었다. 짐작이 가는 게 없는 건 아니지만 일단 지금은 그 '악령'이 먼저고, 모브가 우선이었다.
머리가 터진다고 생각했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그 정도로 강한 충격이었다. 양 손이 부어오를 정도로 내려쳤고 서로의 전투중에 받은 여파라고 해도 금도 가지 않았던 배리어가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다. 기절하진 않았지만 혹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절했었을지도 모르겠다. 간신히 눈을 떠 주변을 살폈지만 의외로 고요했다. 나무가 조금 휘어지고 땅이 갈라진 흔적은 있었지만 그정도로 격렬한 충격에 비해서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마치 별 일 없었다는 듯 조용한 공터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좀 더 확인하고 싶어도 충격 탓인지 몸이고 머리고 제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젠장. 레이겐은 떨리는 팔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어쩐지 의식만큼 몸이 따라주지 않았지만 그보다도 지금 상황을 알아야 했다. 싸움이 끝났는가? 모브는 어떻게 됐지? 정말 이렇게 끝나버린 건 아니겠지. 아직 하고 싶은 말이 있고, 해야되는 말도 있는데 이대로 전부 다 끝났으니 일상으로 돌아가세요, 같은 건 아니겠지. 아니겠지?
"모, 브...!"
"네."
조용한 대답이었지만 온 몸에 힘을 주고 있던 힘을 다 빼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레이겐은 급히 제 옆을 바라보았다. 아직 다 여물지 않은 목소리와 작은 키. 평소 단정하게 내려가있던 머리카락은 예전 싸움에서 봤던 것처럼 전부 중력과 반대로 올라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 모습마저도 반갑다. 아직 소년이란 명칭이 어울리는 레이겐의 유일함이 거기에 있었다.
"잠시만요. 흔들리니까."
뭐가, 라고 말하기 전에 밀려오는 심한 멀미에 레이겐은 급히 몸을 웅크렸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고통과 당장 게워내고 싶은 역한 멀미가 한꺼번에 닥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언제 심한 고통이 왔냐는 듯 그것들은 금세 레이겐의 몸을 떠났다. 거짓말처럼 머리의 두통도 동시에 날아갔다. 그러자 몸도 움직이기가 쉬워진다. 몸이 의지대로 움직이는 걸 알자마자 레이겐은 자리에서 일어나 모브를 잡았다. 집에서 봤던 것처럼 잠옷차림에 맨발이다. 눈을 뜨자마자 날아온 건가.
"잠, 모브 너 코피가...."
"...아. 힘을 좀, 너무 써서. 대단한 건 아니에요."
"무리하지 마. 배리어도 그렇고 초능력도 너 지금 계속 사용하는거잖아."
"괜찮아요."
그 말에 순식간에 화가 났다. 레이겐은 목에서 튀어나오는 고함을 이를 악물어 막았다.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나오는 말임을 안다. 고집불통에 내버려두면 이상한 쪽으로 생각을 돌려버리는 아이지만 상냥하니까. 남을 버려두지 못하고 자신이 끌어안고 마는 그런 아이니까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걸 아는데도 화가 치밀었다.
뭐가 괜찮냐. 대체 뭐가 괜찮은 상황인가.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는 자기같은 걸 위해 미래의 자신까지 끌어오고, 그 미래는 멸망한 세계에서는 붙잡은 자신을 내치지 못하고, 그게 도화선이 되어 신이 되고, 누구에게도 무엇에게도 위로받지도 인정받지도 못하면서 그저 책임으로 싸우고 울부짖고 그럼에도 쉴 수가 없어서. 결국 스스로를 찢어내야 할 정도로 고통스럽고 아팠을텐데도. 죽고싶다며 울던 너를 기억하는데. 떠나달라며 울던 네 얼굴이 지금도 선명한데. 사실은 훨씬 전부터 죽고 싶었을텐데도 나 때문에 괜찮다며 웃던 너를 아는데.
"레이겐 스승님."
모브는 가만히 레이겐의 양 손을 잡았다. 아직 열 네살밖에 되지 않은 소년의 손은 작다. 그렇지만 이 작은 손이 얼마나 든든한 지 안다. 그리고 얼마나 커지는 지도 안다.
왜? 내가 아는 모브는 분명 아직 중학생인데.
"진정하세요. 이제 정말 괜찮아요."
아직 완전히 설 수 없는 그에 맞춰 모브는 떠있던 몸을 내려 시선을 맞췄다. 언제나 잘 알 수 없는 무표정 그대로의 얼굴로 모브는 레이겐을 마주봤다.
"다 끝났어요."
차분한 그 목소리에 알았다. 정말로 끝났다. 더 이상 네가 다치는 걸 보지 않아도 돼. 제 손보다 작고 하얀 손을 잡으며 레이겐은 울음을 터뜨렸다.
괴롭게 찢어놓은 자신의 영혼을 악령이라 말하며 자기 자신의 존재부정과 혐오를 아끼지 않는 그 모습도 충분히 괴로웠건만 그 이상으로 가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래서 정말로 모브가 죽는다고 생각했다. 검은 안개의 모습이라도 간신히 인간의 형상은 버티고 있는 그 영혼은 결국 모브의 영혼이고 서로는 이어져있다. 영혼의 상처는 모브의 몸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머리에 맞자 피가 흘렀고 어깨를 스친 공격은 살과 뼈가 날아갔다. 온 몸을 가리고 있는 단정한 몸 아래로 망가진 몸이 피를 흘린다. 발을 딛는 곳마다 붉은 자국이 나타나고 사라진다. 그래도 모브는 싸웠다. 죽고 싶어서. 너무 죽고 싶어서. 괴로워서. 힘들어서.
싸우는 걸 그렇게 싫어하던 아이였는데.
레이겐은 쏟아지는 울음에 숨이 막혔다. 온 몸으로 쏟아지는 오열을 막을 수가 없었다. 괴로워서 어떻게든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머리 한쪽은 이성적으로 돌아갔다.
분명히 괴로웠다. 늘 아이 혼자 위험한 곳에 내보낼 수 밖에 없는 자신이 한심하고 상처투성이로 돌아오며 괜찮다 하는 그 모습이 슬펐다. 그러면서도 스스로에게 자신을 가질 수 없는 아이가 안쓰러웠다. 미안했다. 홀로 설 수 밖에 없는 전장에 곁에 갈 수 없는게 안타까웠다. 물론 대부분의 제령은 모브의 힘으로 손쉽게 끝났지만 그렇지 않은 적도 많았다. 모가미 때는 에쿠보와 함께 달려들어 간신히 진정시켰고 손톱은 말 그대로 거기서 생명이 끝날 뻔 하지 않았는가. 자신이 그동안 혼자 보냈던 전투가 얼마나 처절하고 치열했는지, 얼마나 힘겹게 자신이란 존재를 버티며 싸우고 있었는지, 버섯구름이 일어나던 전투 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래서 괴로웠고, 이 아이를 좀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싶었다.
"스승님. 이제 아셨어요?"
모브의 물음에 레이겐은 고개를 끄덕였다. 숨쉬기도 힘드니 말은 더욱 무리였다. 그래도 이제 알았다. 방금 전, 내적에서 터진 것 같은 충격과 여기 오기 전에 들렸던 목소리. 들은 적 없는 기억과 익숙했던 큰 손. 성장했던 제자.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터지는 감정들과 아무런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이유.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았던 자신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수 있었던 따뜻했던 반구의 온도까지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모브, 나...."
"아마 분명 제가 저쪽의 저를 불렀을 때랑 같았을 거예요. 저에게 에쿠보가 있는 거랑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차분한데, 너."
"저도 스승님과 비슷하니까요. 저는 기억에 신세를 진거지만."
"안되겠어.... 머리가 안 돌아가. 너까지 이해가 어려워."
너무 많은 감정이 몸 속에서 돈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 가운데 네가 있는 건 이제 충분히 알았다. 레이겐 아라타카에게 있어서 카게야마 시게오는 어떤 형태로는 이젠 빠질 수 없는 소중한 존재다. 초능력을 사용할 줄 아는 어린아이의 고민상담과 어른의 필요목적으로 맞이했던 첫 만남이 무색할 정도로 이젠 서로의 손을 놓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용 목적이었던 이 아이가 지금 자신에겐 이 세상보다 소중하고 자신보다도 중요했다. 네가 나를 위해서 어떻게든 웃었던 것처럼 나는 너를 위해서라면 내 생명조차 아깝지 않았다. 알았어, 모브. 나는 네가 어찌할 수 없이 소중한 모양이야.
"아플지도 몰라요."
"괜찮아. 너잖아."
그렇다 하더라도 이 애달픈 감정은 분명 자신에겐 아직 이른 감정이다. 언젠가 다다를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다. 아직 작고 하얀 손이 제 가슴에 닿았다. 이 손길에 마음이 떨리는 것도 분명 아직은, 이리라. 레이겐은 제 옆에 자리한 모브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아직은 작은 어깨, 작은 손. 보호받을 아이지만 분명 시간이 지나면 아이는 성인이 된다. 기다려지는 일이다.
"...힘내세요, 레이겐 스승님."
참고로 나는 즐거웠어. 목소리와 동시에 레이겐은 제 가슴에 강하게 주어진 힘을 받아 무언가 강하게 뛰쳐나가는 것을 느꼈다. 등을 돌리고 있기 때문에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한 건, 지금 제 안에서 튀어나간 그건 그 무엇도 보지 않고 똑바로 달려갔을 것이다. 자신의 생명보다 사랑했고, 그 무엇보다도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어준 사람에게.
'─모브!'
미래의 모브에게로.
령이라고 하기엔 희미하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기엔 분명 제 팔 안에 있다. 시게오는 갑작스럽게 저에게 달려온 그것에 당황하면서도 두 팔을 벌려 맞이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적어도 자신이 카게야마 시게오란 존재로 모브라 불렸을 때는 단 한번도 그를 거절하지 않았다. 거의 반 습관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있는대로 뛰어와 저를 안은 건 예전에 도망가려다 실패했던 그 때 정도이지만 말이다.
"스승님?"
거절하지 않는게 습관이라면 호칭은 버릇이다. 생각도 전에 제 품안에 있는 존재의 정체가 입으로부터 나온다. 제 입에서 나온 소리를 듣고 나서야 시게오는 그것이 레이겐이라는 것을 알았다. 과거의 그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과거의 자신과 함께 있으니까. 그럼 여기에 있는 스승님은.
"스승님."
'그래, 모브.'
나의 스승님이다. 시게오는 자신을 껴안는 허망한 감촉과 멀리서 자신을 지켜보는 과거의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스승님.... 그래, 텔레파시는 당신이었어."
여기의 스승님은 아무런 능력이 없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힘 자체를 다루는 건 잘 하는 분이라 배리어에 감겨있는 힘을 통해서 말을 걸었나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영력을 사용할 수 있었던 제 스승이었던 모양이다. 바이러스로 인해 영력이 올라갔으며 아마 일부는 자신에게 감겨있던 초능력을 다룰 수 있었던 제 스승. 그리고 제 앞에서 죽었던 사람.
"왜 당신이 과거의 당신에게서 나오는 거죠. 죽었을텐데."
'죽었지.'
"과거의 스승님의 상태가 어딘가 이상했던 것도 당신 탓이었군요. 왜 그랬죠? 어떻게 된거예요? 왜...?"
'모브.'
이럴 생각은 없었다. 그냥 너무나 싫은 자신을 죽이고 온 김에 이 과거와 자신이 연결되지 않도록 과거의 스승님에게 부탁해서 연결을 끊는다. 그냥 그럴 생각이었다. 그 이상은 특별하게 바라지도 않았다. 특별히 과거의 자신이 되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으며 과거의 스승님과 무언가 이루고 싶었던 것도 아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저를 놔두고 순환으로 가버린 자신의 스승을 만나고자 했던 것도 아니었다.
"같이 있어 달라고 한 건 당신이었으면서, 먼저 가버린 주제에 왜 이제와서...."
'가지 않았어.'
야속함이 묻어나던 말은 레이겐의 말로 잘렸다. 그러나 단호한 말에 비해서 숙인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예전처럼 부드러웠다. 그립던 광경에 시게오는 급격하게 피로감을 느꼈다. 반갑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 이상으로 피곤했다. 지쳤다. 왜 이제서야, 라는 말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의 존재에 기쁘면서도 그 기쁨을 느끼는 것 조차 지쳐버린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왜 왔어요?"
'네가 여기에 왔으니까.'
"내가 어디에 있던 당신과 상관 없었잖아."
'네 옆에 있겠다고 했잖아. 계속 같이 있었어, 모브.'
"거짓말. 나는 본 적이 없어."
'거짓말 아냐.'
고개를 들 힘조차 없는 자신의 제자의 손을 레이겐은 양 손으로 가만히 잡았다. 좀 전의 과거의 모브가 과거와 현재의 자신에게 그랬듯 잡아올린 양 손은 말끔한 장갑 아래 감춰진 상처로 엉망진창이었다. 남자답게 크면서도 하얗고 길던, 당사자에겐 말한 적이 없지만 꽤 모양이 예쁘다 생각했던 손이 부서지는 과정을 봤다. 작았던 아이가 꽤 훤칠한 청년이 되고, 그 청년이 다시 무언가로 변이되어가는 그 전부를 지켜봤다. 너를 만난 이후로 너를 지켜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설령 그것이 자신의 죽음 이후라 할지라도.
레이겐에게 있어서 제 죽음의 순간은 솔직히 잘 기억나지 않았다. 사람들을 여럿 만나고 위험하다 싶어서 도망간 이후로는 흐릿할 뿐이다. 언젠가 에쿠보에게도 물었지만 그는 너무 오래전 일이라 더 이상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죽음의 순간을 강하게 기억하는건 그리 좋은 일이 아니라고도 덧붙였다. 확실히 생명이 꺼진 이후로도 존재하기 위해서는 좋지 않은 일이긴 했다.
다만 생명의 종말은 기억한다. 레이겐은 죽자마자 령으로 눈을 떴다. 엄청난 속도에 놀랐지만 제 죽음보다 시게오가 걱정이었다. 오롯이 제 욕심으로 여기까지 끌고왔던 불쌍한 아이. 그래서 제 시체을 두고 레이겐은 빠르게 이동했다. 아직 자고 있을 시게오를 향해 위험하다 외쳤고 바람이 통했는지 그는 곧바로 잠에서 깨어났다. 언제나 고통에 반 쯤 넋을 놓고 울부짖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인간처럼 눈을 떴다. 그리고 감았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인간의 의식에 눌려있던 힘은 더이상 제어되지 않았고 폭발한 힘은 가볍게 세상을 덮었다. 허무한 종말이었다. 생명도 령도 그 무엇이었던 것들도 일순간에 사라져갔다.
레이겐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마, 네 힘이었다고 생각해. 너 스스로는 모르겠지만 그 거 말고는 내가 그 순환에 휩쓸리지 않았던 이유가 없어. 바이러스에 전염되고 나서 나는 정말 영능력자가 됐지만, 솔직히 나보다 더한 사람들이 넘쳤던 세상에서 내가 특별했을 리가 없잖아.'
령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미약한 형체였지만 존재가 남았다. 너무도 불안정한 존재.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모습으로 레이겐은 폐허의 세상에 남았다. 에쿠보의 말이 떠올랐다. 이렇게나 명확하지 않은 건 언제라도 사라질 게 자명했다. 그래서 신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 이후 만난 적이 없으니 레이겐의 추측일 뿐이지만 이런 이유 또한 있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불안정하고, 확신이 필요했다. 내가 존재한다는 확신. 존재해야 하는 이유. 절대적인 존재.
신.
나에게는 이미 신이 있다. 레이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늘을 봤다. 레이겐의 하나뿐인 세계였고 특별했던 존재는, 폐허의 신은 거기에 있었다.
'너의 힘으로 남았는데도 네가 나를 보지 못한 이유는 모르겠어. 내가 너무 약해서일지도 모르고 너에게 내가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정확하게 너보다는 신이 된 네게 나라는 의식은 필요하지 않았을테니까.'
불행하게도 신은 신이라는 것 자체로 이미 완전했다. 작은 존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레이겐은 그 사실에 절망했다. 자신이 작은 존재여서가 아니라 자신이 작은 존재이기 때문에 더 이상 신에 눈에는 비치지 않는다. 너무나 소중했던 사람의 곁에 있는데도 그 사람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우는 너의 곁에 있다 소리를 질러도 닿지 않았다. 손을 뻗어도, 소리를 질러도, 울어도. 한 공간에 함께 있으면서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레이겐은 몇 번이고 통곡했다.
".....힘들지 않았어요?"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순환으로 가는 길이 분명 열렸을텐데."
폐허의 세상에서 레이겐처럼 남은 것들은 있었다. 시게오는 그런 것들을 처리해 순환으로 가는 길을 여는 신이었다. 그래야만 생명은 생명으로써 끝을 맺어 도달한다. 생명의 의미를 다한 것들이 도달하는 최종의 곳. 그것은 영원의 휴식일수도 있으며 생명이 지나는 또다른 무엇인지도 모른다. 다만 생명이라는 존재로 태어났으면 응당 가야함을 알았다. 알았지만.
레이겐은 제게서 빼려는 시게오의 양 손을 더욱 강하게 잡았다.
'같이 있고 싶다고 그랬잖아.'
"...나 때문에."
'아냐, 모브. 아냐. 내가 너와 있고 싶었어. 모브. 너는 왜 여기까지 와서 내 걱정을 해. 나는....'
레이겐은 잔뜩 망가진 양 손을 부여잡고 허리를 숙였다. 이 손과 몸을 부순건 나다.
'...나는 너와 마지막으로 보낸 1년이 내 생에 가장 가치있던 순간이었어.'
고해성사의 시간이다.
'세상의 마지막이 온다는 말을 함께 들었지. 그 때 나는 정말 이 세상은 끝이 났구나 생각했어. 모브. 바보같은 생각이라고 해도 좋지만 네가 정말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면 아무런 방도가 없다고 생각했거든. 지금도 그래. 나에게 너보다 믿을 수 있는 건 없었으니까. 그래서 너를 잡았어. 사색이 된 네가 정말 모든 게 글렀다, 라고 판단한 순간 나한테도 세상의 끝이 왔어. 그런데 모브, 나는 그런 때가 되어서야 나한테 솔직해질 수 있었어. 세상이 멸망한다면 마지막은 너와 함께 하고 싶었어.'
"....왜요?"
'네가 좋았으니까.'
인간으로서의 윤리도 사회적 상식도 모든 게 쓸모가 없어진 그 순간이 되서야 잡을 수 있었던 손이었다. 모든 제약으로부터 벗어난 지금에서야 말할 수 있는 말이었다.
'고통에 몸부림 치는 너를 보는 건 힘들었어. 하지만 나보다 네가 더 힘들었지. 그런데도 너는 나를 생각해서 떠나라고 했어. 살아달라고. 근데 나는 너랑 같이 죽고 싶었어. 너를 독점하고 싶었어. 누구보다 특별한 너를 내가 가지고 싶었어. 나만 봤으면 했어.'
"스승님."
'미안해. 너는 그렇게나 고통스러워했는데. 네가 가끔 네 정신을 유지하고 있을 때 나를 설득하려고 하는 게 기뻤어. 나를 생각해주는 거잖아. 변해버린 너 대신 생활에 필요한 걸 가지고 왔을 때 네가 어서오라고 해주는 게 좋았어. 사실 계속 그렇게 살고 싶었어. 너와, 너랑 살고 싶었어.'
몸이 점점 변해가고 고통에 울부짖는 시간은 길어져간다. 그럼에도 레이겐이 시게오를 불렀을 때, 시게오는 제대로 레이겐에게 반응했다. 끔찍한 고통으로 정작 시게오 본인에게 그 기억들은 대부분 날아갔지만 모든 걸 지켜본 레이겐은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검은 안개에 뒤엉켜 죽음같은 잠을 자고 있다고 해도 레이겐이 부르면 반드시 눈을 뜨고, 웃으며 인사를 했다. 어서오라고. 그럴 때마다 레이겐은 지금 이 순간 세상이 멸망하길 바랐다. 그럼 이 사랑스러움을 가지고 죽어버릴 수 있을테니까.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지독히도 이기적이었다. 스스로 뱉어낸 고해성사는 한심하고 처참했지만 무엇보다 레이겐을 비참하게 만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 없는 삶이라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무엇보다도 특별하고 사랑했던 것의 마지막을 자신이 가졌다. 온전히 독점하고 만끽했다. 자신만의 욕심으로. 시게오는 레이겐에게 제발 당신을 위해 살아달라 말했지만 레이겐은 처음부터 자신만을 위해 살았다. 그렇게 죽었다. 그래서 삶에 후회는 없었다. 다만 그 후 무너져가는 시게오의 모습에 가슴 아파 울었을 뿐이다. 그뿐이다.
레이겐의 말이 끝나고도 시게오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난감한 얼굴로 레이겐을 보다가도 잡혀있는 손에 시선을 내렸다. 마음이 어지럽다. 시선을 돌리면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존재로 어떻게든 자신에게 고백을 하는 그가 섧다. 모든게 과거에 끝나버린 지금에 와서야 알게 된 마음도 아프다. 일시적으로 과거의 자신에게 얻은 힘이 다해가 점점 투명해지는 존재도 애달프다. 힘이 다하면 설령 자신의 곁에 그가 남더라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나날이 돌아온다. 그 끝없는 고독은 시게오의 마음을 몇번이고 부수고 망쳤지만, 그래도 살아남았고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그건 당신도 같다.
언제나 제 앞에서 어른이고 싶어했던 그의 용기를 이제 자신이 이어받아야한다.
"...스승님."
시게오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행복, 하셨나요."
언제나 가장 궁금하던 물음이었다. 그렇게 죽은 당신은 만족했을까. 나를 데리고 떠나 그런 최후를 맞은 당신이 과연 무사히 죽었을까. 특별하고 싶었던 욕구는 충족됐을까. 시게오는 언제나 그게 가장 간절했다. 그와 자신의 마음이 통했다는 사실보다도 그게 우선이었다. 모든게 무너진 자신은 스스로에게 가치를 매길 수 없었고 그런 스스로에게 의미는 결국 눈 앞의 존재였다.
'응.'
무척이나.
레이겐의 말에 시게오는 어깨에 들어갔던 힘을 빼고 간신히,
"...다행이다."
웃었다.
꼭 처음같다. 레이겐은 그리 생각하며 기절한 모브를 업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망한 공터에 있는건 황당했던 자신과 기절한 모브와 미래의 모브. 다른 거라곤 보이진 않아도 미래의 자신도 여기 어딘가 있다는 것과 아무 감정도 읽을 수 없었던 남자가 아니라 후련한 얼굴의 시게오가 있다는 점이다. 몸이 아픈지 절뚝이면서도 시게오는 자신의 힘으로 레이겐의 앞까지 걸었다.
"끝났냐."
"네."
"그, 령은...?"
"여기에."
"완전 작아!"
시게오의 손 안에 있는 건 검고 작은 구슬. 이게 그 난리를 피웠던 영혼이라고? 레이겐의 물음에 시게오는 민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한 번 갈라졌다고 해도 본디 자신의 영혼이었고 힘이다. 난리를 피운건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으니 변명할 것도 없다. 그래도 인형보다 못한 얼굴에 감정이 떠오른 모습은 확실히 보기가 좋았기 때문에 레이겐은 한숨과 함께 털었다.
"이제 어쩔거야?"
"돌아가야죠."
그 아무것도 없던 폐허로. 레이겐이 본 그 세상의 편린은 허무하고 공허했다. 그 비참한 세계로 돌아간다. 왜냐면 눈 앞의 제자는 그 세계의 신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세계에서 필요했던 목적은 이뤘네요. 스승님은 미래의 스승님을 봤고, 과거의 전 지금의 저를 봤어요. 제 과거에 미래를 본 적이 없으니까 이제 당신들과 저희는 별개의 존재가 됐습니다. 어떠한 미래를 살아도 저와는 연결되지 않을거예요."
"그럼 너는 어떻게 되는 건데? 여기가 과거였다면서."
"글쎄요. 평행우주로 갈라질 수도 있고 그대로 없어질 수도 있죠. 그건 이제 저희의 몫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걱정하는 게 당연하잖아. 제자니까."
레이겐의 한결같은 말에 시게오는 웃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이제부터는 당신들의 몫이에요. 제대로 하세요."
"어?"
"어? 가 아닙니다. 저와 제 스승님과 당신들이 이어지지 않을 뿐 미래 자체에 대한 변경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어요. 자세한건 제가 일어난 뒤에 들으세요. 세상의 생명을 끝낸 건 제가 맞지만, 제가 원인이었던 건 아니었으니까요. 그걸 막으셔야 제대로 제가 있던 세상의 미래에 도달하지 않을겁니다."
"걱정 마라. 우리는 너희가 되지 않을테니까."
이렇게까지 알려준 미래에 갈 리 없다. 레이겐은 미래의 자신에 대한 기억만 희미하게 있을 뿐이니 좀 더 정확하게 지켜봤을 모브와 이야기해서 제대로 막을 것이다. 이런 참담한 미래를 자신은 그렇다 해도 모브에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배리어 안에서 홀로 망가지던 시게오를 보며 고통스러웠던 건 미래의 자신만은 아니었다.
"역시 스승님은 대단해요."
레이겐의 만족스러운 대답에 시게오는 한숨과 함께 제 힘이 담겨있던 구슬을 부쉈다. 깨진 구슬의 틈 사이로 불길했던 힘이 단숨에 시게오를 감싸올라 레이겐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여전히 기분 나쁜 검은 안개였지만 분위기는 이전과 달랐다. 확인하고 싶어도 휘날리는 바람에 제대로 눈도 뜰 수가 없다. 모래바람에 휘청거리는 레이겐의 모습을 본 시게오는 웃음을 터뜨렸고 이윽고 넘어지는 그들을 다치지 않도록 살짝 띄워주었다.
상처투성이 신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어서와라 모, 브...."
바깥의 추위에 새빨갛게 얼은 얼굴이 보였지만 그보다 지금 제 눈의 광경이 익다. 레이겐은 먹던 음료수도 내던지고 급히 현관으로 뛰어왔다. 현관등이 흰색으로 반짝였다.
"모브! 그렇구나, 너였어!"
"네?"
"너, 빨리 과거로 가! 가서 나 데려와!!"
"네??"
이게 무슨 자다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가. 기껏 오자마자 다시 나가라는 매정한 소리에 모브의 표정이 대놓고 구겨졌으나 이내 생각난듯 레이겐의 소리와 맞먹을 정도로 소리를 외쳤다. 제법 시끄러운 소리였지만 어차피 여긴 자신들만을 위해 있는 숙소이니 염려할 필요는 없다. 어서 가라는 레이겐의 손을 잡고 모브는 급히 연구소에 전화를 걸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브는 과거로 가는 방법을 모른다. 연구소도 알진 못하겠지만 둔한 제 머리보다는 낫다.
"그럼 다녀올게요! 저 늦으니까!"
"알았으니까 얼른 다녀와!"
"네! 아, 그래도."
허둥지둥 풀었던 목도리를 감아주자 레이겐의 어깨가 큰 손에 잡혔다. 희고 큰 손. 당겨지는 힘은 초능력이 아니라 순수한 근력이다. 막 밖에서 들어와서 맞닿은 입술은 찼다.
"밥 먼저 먹어요. 잘자요."
짧은 입맞춤과 다정한 인사와 함께 모브는 휙 밖으로 나갔다. 레이겐은 잠시 그 자세 그대로 굳어있다 서서히 주저앉았다. 아무튼 제대로 보냈으니까 머지않아 꿈과 저쪽 우주의 경계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을 자신을 모브는 제대로 데려올 것이다. 당시에는 흰 빛이 가득해 보지 못했다고 생각했건만 들어오자마자 자신을 데리러 왔던 모브가 바로 지금의 모브임을 알았다. 그럼 흰 빛은 현관등이었어? 부끄러워 죽겠는데? 아니, 이건 가기 전에 웃었던 모브의 눈웃음 때문인가. 쟤는 저런 스킬은 언제 익혔지?
레이겐 아라타카, 42살. 14살 연하 연인에게 오늘도 당했습니다. 레이겐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브에게 사정을 설명받은 레이겐은 첫번째로 기가 막힌 규모에 머리를 감싸쥐었고 두번째로 모브의 영어성적을 확인했다. 미국의 연구소를 찾아가서 깽판을 치던 뭘 하든 일단 가야한다, 미국. 그렇다면 중요한 건? 회화. 있는 돈을 전부 털어서 통역을 마련한다고 해도 실질적인 대화는 스스로 하는게 가장 좋다. 게다가 비즈니스도 아니고 초능력이 어쩌고 하는데 통역이 그걸 제대로 살려 말해줄 것 같지도 않았다. 덕분에 모브의 성적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그 순간까지 영어는 A였다.
다음에 한건 모브에게는 자신과 같은 초능력자들의 협력, 레이겐은 손톱 인프라의 재구축이었다. 미래의 두 사람은 자신들끼리 세상을 완결지었다. 이미 모든 상황이 벌어진 뒤였기 때문에 어쩔수 없다고 할지라도 그게 결국은 파멸의 시작이었다. 그 점을 레이겐과 모브는 서로 동의했다. 그래서 모브는 리츠와 하나자와, 쇼우, 에쿠보를 시작으로 자신이 겪었던 이야기를 들려주며 미래에 대한 협력과 준비를 부탁했고 레이겐은 세리자와와 전 손톱 7지부를 바탕으로 어딘가의 연구소에 있을 손톱의 전 보스, 스즈키 토이치로를 찾았다. 세계정복이란 꿈을 꿨던 남자였고 실제로 그만한 힘이 있었다. 손톱의 내부는 레이겐이 뜯어봐도 허황되고 어설펐지만 거대한 세계를 집어삼키려고 했던 만큼 나름대로의 세계에 뻗은 인프라가 있었다. 그걸 이용해 세계를 멸망하게 만든 연구가 시작되는 곳을 찾을 생각이었다. 아무튼 미래를 바꿀 생각이니까 협력해. 그러던가. 레이겐의 말에 그는 너무 순순히 인프라의 사용을 허용했다. 아직은 돌아갈 수 없는 것 같지만 방 안에 고양이가 한마리 있다는 말에 쇼우가 조금 웃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긴 싸움이기도 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찾은 덕인지, 그들이 연구소를 찾은건 하나자와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고 난 후였으며 당시의 모브는 21세, 레이겐은 35세 때였다. 7년 만에 스타트 점에 닿았을 때, 국제전화로 걸려온 연락에 사무소에 있었던 모브와 레이겐은 서로 만세를 하며 기뻐 소리를 질렀다. 특히 모브는 주변의 물건을 띄울 정도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기억에서 하나자와와의 통화는 그의 죽음 직전에 걸려온 그 통화가 너무 인상 깊어서였으리라. 그 후로 그동안 착실하게 벌어 놓은 돈으로 모브와 레이겐은 미국을 오갔으며─중간에는 몇 번 모브의 초능력으로 건너갔다.─ 연구소와 접촉하고 협상을 한지 3년. 그들의 연구에 협력하는 조건으로 세상을 멸망시켰던 연구의 포기각서를 받는데 간신히 성공했다.
그 3년은 레이겐이나 모브에게 정말 지겹고 힘든 싸움이었다. 언어부터 고집에 뭔 놈의 장황한 설명, 문전박대, 기타등등. 참고로 첫 협상은 아무리 접촉해도 거부하는 연구소에 결국 열받은 모브가 하나자와와 리츠와 짜고 연구동 세 동을 초능력으로 터뜨린 후에야 이루어졌다. 물론 나중에 혼내긴 했지만 그렇게 직접 '자기소개'─여기서 하나자와와 모브는 참 미묘한 얼굴을 했었지만 레이겐은 묻지 않았다─를 한 덕에 첫 협상테이블이 마련되었으니 기가 막힌 일이다. 연구자들은 하여튼 알 수가 없다. 다만 어떻게 공표하지도 않은 연구를 알아냈느냐는 질문에 레이겐은 있는 힘껏 진심을 실어 말했다. 우리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그렇게 세계를 한 번 멸망에 빠뜨렸던 바이러스는 모두의 노력으로 순조롭게 수습이 되었다.
- 좋아합니다. 저랑 사귀어주세요.
- 아.... 역시 고백 하는거야?
- 네.
모브가 레이겐에게 고백한 건 17세의 가을이었다. 여전히 전쟁같은 영어공부를 서로 하던 때라 지금 생각하면 정말 무드도 없었지만 원래 그런 걸 모브에게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인 일이다. 28살이 된 지금도 여전히 분위기 파악은 못하기 때문에 레이겐은 모브에게 그런 건 이제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
- 우리 전에 이 건도 이야기 했잖아?
- 네. 스승님은 미래의 저희에게서 받은 기억과 감정의 영향일지도 모른다고 하셨죠.
- 그래, 기억하는구나.
- 그렇지만 스승님, 저는 계기라고 생각합니다.
- 계기?
- 제가 당신을 향해 가지고 있는 이 감정에 대한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계기.
레이겐은 미래의 레이겐에게서 받은 감정이 있었고 모브는 미래의 자신의 기억을 봤다. 미래의 자신들은 서로를 사랑했다. 연인은 아니었지만 분명 그들은 사랑을 했고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야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레이겐은 짐작이고 모브는 기억을 봤기에 안다. 두 사람은 정말로 서로가 소중했다. 서로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가가지 않았다. 너무 소중한 네가 자신으로 하여금 타인에게 뭇매를 맞고 행여나 그걸로 상처를 받을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서로의 마음이 서로에게 있는 것을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음에도 레이겐은 스승으로, 모브는 제자로 남았다. 그 정도로 두 사람은 충분히 행복했었다. 세계가 멸망하지 않았으면 평생을 그랬을지도 모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할 정도로 두 사람은 서로를 소중하게 여겼다.
- 만약 스승님이 제 앞에서 죽는다면 저는 미래의 저와 같아질 거라고 생각해요. 리츠도 그랬어요.
- 너는 그런 녀석이 아니잖아.
- 미래의 저는 그런 녀석이었나요?
- ...그렇게 됐지.
- 스승님이 저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아시는 건 알지만, 제 모든 걸 안다고 생각하진 말아주세요.
예전에도 누군가에게 지적받았던 말에 레이겐은 드디어 시선을 영어책에서 모브에게로 옮겼다. 아직은 앳된 얼굴이지만 분명 이 모습은 누군가를 닮아갈 것이다. 살아달라고 울부짖던 청년으로, 너덜너덜한 몸으로 사랑을 말한 어떤 남자로.
- 나는 당신이 좋습니다. 어린애의 동경이라든가 착각이 아니에요. 기억을 봤기 때문에 더더욱 알 수 있습니다. 스승님. 사실 저는 당신이 행복하면 그걸로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미래의 저는 마지막에 스승님에게 행복했냐고 물었죠. 만약 제가 미래의 제가 되어 그 상황이 된다면 저도 똑같이 물어봤을 거라 생각해요. 당신이 행복하면 저는 그걸로 괜찮으니까. 그걸로도 행복할 수 있을테니까.
- 모브.
- 하지만 안되겠어. 분명 행복하겠지만, 그래서는 안돼. 미래의 나와 같아질 뿐이야. 그러니까 나는 당신에게 고백해요. 나의 것이 되어주세요. 나도 당신의 것이 됩니다. 한참이나 어리고 분위기도 못읽고 여전히 서툰게 잔뜩이지만 스승님의 평생을 책임지겠습니다. 나는 당신을 좋아합니다. 나의 곁에서 나로 인해 웃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에야말로 내가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나와 사귀어주세요. 14살 이후 줄곧 생각한 나의 진심입니다.
- ...모브.
- 그러니까 스승님, 동정이니 과거의 파편이니 핑계를 생각하지 마시고 진지하게 고민해주세요. 과거의 기억으로 저를 받아주지 말고, 세상의 편견으로 저를 거절하지 말아주세요.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당신, 레이겐 아라타카에게 나는 고백했어요. 그 대답을 듣고 싶어요.
- ...나는 네가 소중해. 정말로.
- 저도 그래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으니까 천천히 생각해주세요.
- 그걸로도 나는 상당히 무겁게 너를 생각해. 너의 대답에 평생이 걸릴 지도 몰라.
- 그럼 평생의 즐거움으로 삼으면 되겠네요.
그렇게 말하며 웃은 후 다시 영어책을 펼치는 너를 두 팔 벌려 안고 싶었다고, 잔뜩 안아줬으면 하고 바랐다는 사실을 서른 넷의 레이겐은 스무살의 모브에게 잔뜩 더듬거리며 말했다. 모브의 일은 애정을 떠나 이미 충분히 소중했다. 그게 연애감정일지 친애의 정일지 판단하지 못했을 뿐이고 모브가 성인이 되고 나서야 간신히 연애로 각오를 굳혔을 뿐이다. 시작이 곧 끝이었던 미래와 달리 그들은 제대로 서로가 서로를 붙잡아 함께 시작을 했다. 그때 서로 너무 벅차 울었던 건 지금은 술 한잔에 웃을 일이 되었다.
혼자서 조용하게 된 숙소에서 레이겐은 과거를 떠올렸다. 떠올리지 않은 적은 없지만 의식해서 떠올리려고 하지도 않았던 과거. 언젠가의 미래가 됐을지도 모르는 과거는 이제 완전히 없던 것이 되었다. 서로를 잡고 있기만 했던 미래와 달리 지금의 자신들은 제대로 연인으로 살아가고 있었고 세상은 문제없이 잘 돌아가고 있다. 바이러스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14년 전, 필사적이었던 카게야마 시게오의 비원이 이제야 제대로 이루어진다고 실감한다. 연구소로 돌아갔을 모브가 박사들과 상의하여 과거로 돌아가는 이론을 대충이라도 완성하면 나머지는 막대한 초능력으로 해결한다. 그렇게 14년전의 자신을 제대로 보내고 지금의 자신에게 모브가 돌아오면 정말로 끝난다. 너희가 되지 않겠다던 약속을 드디어 지킬 수 있게 된다.
"하하, 어쩌지. 모브가 지금 당장 보고싶어졌어...."
훌쩍 커버린 그 몸에 안겨 안심하고 싶다. 이제 다 끝났다는 그 말을 한번 더 듣고 싶다. 같이 웃고 밥을 먹고 같은 잠자리에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네 체온은 언제나 기분이 좋다. 이제 나갔건만 당장 돌아왔으면 좋겠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 없는 생각에 레이겐은 웃었다. 모브가 말한대로 밥을 먹고 씻고 일찍 자자. 다음에 눈을 뜨면 분명 그 동그란 검은 머리가 눈 앞에 있을 것이다. 투정은 그때 부려도 늦지 않다. 그 후에 제대로 14년의 싸움을 끝낸 기념으로 맛있는 걸 먹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어떻게 함께 살아갈지 이야기를 하자. 지금까지는 그 때의 미래가 오지 않기 위한 싸움이었다면 지금부터는 자신들만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시간이다.
그럼 저녁은 뭘 먹을까. 레이겐은 냉장고를 열었다.
세계가 닫히는 걸 느낀다. 시게오는 비석 옆에 가만히 누웠다. 역시 제 옆에 있다던 레이겐의 기척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혼자가 아니란 사실에 안심할 수 있었다. 어디선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을까, 지켜보고 있을까. 그도 아니면 그저 보고 있을까. 뭐든 상관 없었다. 그가 무엇을 하는지보다 그가 옆에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감사해요, 스승님."
뭐가? 그런 말을 한 것 같다. 물론 들리지 않았지만. 제 모습이 너무 웃겨 시게오는 큭큭 웃었지만 애석하게도 그 이상한 모습을 보고 있을 이는 이 세계에 단 한명뿐이며 그 한명은 저를 참 많이 아끼는 사람이다.
"행복했다고 말해주셔서."
당신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 당신의 행복을 위해 내 삶이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그 이상 자신에게 의미가 있을만한 걸 생각할 수가 없다.
시게오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신이 된 이후로 처음으로 몰려오는 잠을 기꺼이 맞이한다. 분명 이제 잠들면 일어날 수 없겠지. 그 후엔 세계가 닫힐테고 그럼 모든게 끝이 난다. 신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인간이었던 자신이니 죽으면 인간이 죽는 그곳에 갔으면 한다. 혼자는 이제 지긋지긋하다.
"...결국 뭐 하나 제대로 된 삶은 아니었지만...."
깜빡인다. 떠오르는 건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던 과거의 자신과 레이겐. 지금의 자신과 동갑이었던 레이겐 아라타카. 언제나 시게오에게 있어서 그는 어른이었고 지표였지만 그의 나이가 되어 맞이한 스승은 그저 사람일 뿐이었다. 그게 조금 생소했고 어색했다. 지금부터 만나러 갈 당신은 어떨런지 모른다. 지금도 옆에 있을 당신은 나에겐 여전히 보다 어른이고 스승일까. 물론 스승이긴 하지만.
"당신을 만났으니, 됐어...."
아직 뭐 하나 정해지지 않은 과거. 어린 자신과 어린 스승이 부디 이 미래에 당도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의 곁에 있을 그와 같이 가고싶다.
"이제 됐어."
신이 잠든 세계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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