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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작은 별은 지금 쯤 어디를 떠돌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어린왕자가 된 너에게





레이겐은 이미 봤던 신문을 내려놓았다. 어제까진 그래도 제대로 배달되더니 오늘자 신문은 끝내 사무소로 들어오지 않았다. 배달이 멈춘건지 신문제작이 멈춘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구가 멸망할 이런 상황에선 별 일 축에도 끼지 않는다.


지구가 멸망한다. 그렇다고 한다. 모든 미디어는 발칵 뒤집히고 엄청나게 시끄러웠지만 결론은 같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소행성과의 충돌. 어디선가 봤던 영화같지만 사실이며 익숙하다 못해 질린 소재라 혀를 차도 사실이다. 그 옛날 지구에 발을 딛고 살았다던 공룡들이 어느 순간 멸망해버린 이유 중 하나의 요인으로 인간 역시 멸망한다. 역사는 돌고 돈다고 해도 이런 것까지 꼭 돌아올 필요가 있을까 싶다. 물론 이런 생각이 이 상황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레이겐이 덤덤하게 신문이나 펼치고 쓸모 없는 생각이나 할 수 있는건 이미 마음의 준비가 어느 정도 끝났기 때문이다. 처음에야 그도 세상이 멸망하는 것에 놀랐고 어찌할바를 몰랐으나 시간은 사람을 침착하거나 미치게 만들거나 한다. 레이겐은 전자였다. 이성을 찾고 주변을 정리했으며 마지막으로 부모와도 통화했다. 가는 버스가 없어서 갈 수가 없어요, 라는 레이겐의 반쯤의 진실을 섞은 말에 부모는 그동안 수고했다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사랑한다는 말도 했던 것 같다. 한번 쯤 얼굴이라도 보러갔으면 좋았을텐데. 후회는 이제 거둘 방법이 없다. 그렇게 모든 것을 정리한 레이겐은 마지막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제자이며 그의 세상에서는 가장 강한 초능력자이자 동시에 아직 고등학교도 가지 못한, 어린 소년을 한 명.


-



레이겐이 처음 소식을 접한 건 지금 그가 자리한 사무소에서였다. 국민 여러분께 고합니다, 라고 시작한 말은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늘어놓았다. 장황한 설명에 비해 요약하면 너무나 간단했다. 인류가 끝난다.  3류 영화에서도 나오지 않는 지구의 마지막을 정부의 높은 관계자가 볼썽사납게 울며 말하니 어떻게 쉽게 그래요? 하며 믿을 수 있겠는가. 긴급속보가 끝나자 레이겐은 전화를 들었다.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일을 도대체 누구에게 물어본단 말인가. 

그때였다.


똑똑.


"스승님."


드물게도 문을 두들겼다. 레이겐이 고개를 돌리자 현실성 없는 소식과 달리 소년의 모습은 그가 알던 그대로였다. 목까지 단정하게 잠근 검은 교복과 눈까지 내려온 검은 머리, 검은 눈. 큰 변화없는 표정과 담담하게 문을 두드린 손. 모브. 벌써 학교가 끝날 시간이었나 싶어 시계를 봤지만 역시 이른 시간이었다. 


"오늘은 빠르구나."

"상황이 상황이니까요."


그의 억양없는 목소리마저 평소와 같았다.


"꽤 태연하구나, 모브. 좀 더 당황해도 괜찮단다."
"스승님은 꽤 당황하셨네요. 얼굴에 보일 정도예요."

"이런 때라면 누구라도 당황하는게 정상이지."

"그런가요."


그의 제자는 조금의 시간 뒤 그렇네요, 하며 레이겐의 말에 동의했다. 너무나 평소와 같은 대화에서 레이겐은 위화감을 느꼈다. 소년은 원래부터 크게 티가 나는 편은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의 감정에 무서울 정도로 집중하고 몰입하기 때문에 그 외의 복합적인 감정을 소화하는게 느리다. 세계가 멸망하는 너무나 큰 충격에 모든 감정이 무뎌진걸까 하는 생각도 얼핏 스쳤지만 그러기엔 소년은 평소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침착하고 단정했다. 이럴 수 있는 이유는 많지 않다.


"모브. 알았니?"


소년은 담담하게 말했다.


"악의 없는 재앙은 알기 어렵네요."


-


그리고 일주일. 소년은 사무실에 오지 않았다. 마지막은 가족과, 라는 마음은 안다. 이제 고작 10대 중반을 보내고 있는 소년에게 가족이 얼마나 큰 안심이며 울타리인지 그 시간을 지나온 레이겐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내일부터 사무실에 오지 않겠다던 모브의 말에 서운함은 특별히 느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렇게 사무실에 나와 소년을 기다리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오지 않겠다던 소년이 말했기 때문이다. 일주일 뒤 말할 것이 있으니 꼭 사무실에 와달라고. 왜 일주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간은 레이겐이 침착하기에 나쁜 시간은 아니었다. 그리고 결심하기에도 좋은 시간이었다. 결심인지 마음먹기인지는 본인도 완전히 이름을 붙이지 않았으니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최후다. 미련같은 건 전부 털어버리는 게 좋다.


"그렇지? 모브."

"...마음대로 혼자 물어보지 말아주세요, 스승님."

"전부터 궁금했는데 초능력으로 텔레파시 같은건 안되는 거야?"

"연습해보진 않았지만 그런 초능력도 있긴 합니다. 저는 모르겠어요. 해보질 않았는데."

"그럼 하면 할 수 있어?"

"말했지만, 안해봤으니까요. 별로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거냐는 얼굴로 사무소의 문을 연 모브는 예전부터 앉던 접수대에 앉았다. 레이겐이 자신의 책상에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걸어올 줄 알았는데 예상밖의 착석에 레이겐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대로도 대화를 못하는 건 아니지만 본래 대화라는건 서로 마주봐야 하는게 아니던가. 이 상태로는 모브의 옆모습만 보게 될 뿐이다. 그건 제 성미에도 모브의 성미에도 맞지 않는다. 사람과의 대면에 여전히 서툴고 어려운 자신의 제자는 그럼에도 이를 악물고 눈을 마주하는 사람이었다.


"모브?"

"네."

"거기 앉아서 말하려고?"

"그건 아닙니다만, 조금 이 광경을 보고 싶어서. 제일 오래 봤으니까요."

"감상적인걸."

"그런가요."


표정은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계속 보면 의외로 알기가 쉽다. 지금은 좀 웃었다. 그러고도 한동안 모브는 말이 없었다. 레이겐도 굳이 침묵을 깨진 않았다. 모브는 원래 말이 없었고 레이겐은 모브에게 온갖 대화를 늘어놓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둘 사이의 침묵은 낯설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침묵을 좋아했다. 가식을 늘어놓을 것도 체면을 만들어낼 필요도 없는 솔직한 이 침묵이 좋았다.

레이겐이 모브를 바라보고 모브가 사무소를 쳐다본지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감상이 끝났는지 모브가 레이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끝났어?"

"네."

"길었네."

"이제 못 볼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무심코."

"음, 알지 그런거."


역시 자신의 예상대로 모브는 사무실의 풍경 감상이 끝나니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앞까지 걸어왔다. 근력운동하는 운동부에 들어가더니 차츰 키가 커지고 있음을 절실하게 느낀다. 이대로 고등학교에 올라가면 성장통으로 쩔쩔맬지도 모른다. 그런 미래를 상상하며 성장통에 좋은 마사지책도 본 적이 있었다. 정말로 그런 미래가 왔으면 좋았을텐데.


"하고싶은 말이 있습니다."

"우연이구나. 나도 있단다."


자신의 말에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깜빡이는 모습에서 아주 어릴 적 모습이 떠오른다. 언제 이렇게 컸을까.


"....의외네요."

"아무렇지도 않게 실례인 말을 하는 건 고치는게 좋지 않을까? 모브 군."

"스승님도 제법 실례인 말을 하지 않습니까. 저부터 말하게 해주세요."

"너야 말로 의외네. 먼저 말한다고 하는거."


원래 한 번 마음 속으로 정한 걸 구부리는 성질은 아니지만 이렇게 먼저 단호히 말하는 일도 거의 없던 제자였다. 레이겐이 모브의 상태를 읽는데 익숙한만큼 모브 역시 레이겐의 변화를 제법 알아차린다. 진심으로 놀라워하는 자신을 보며 제자는 드물게 미소를 지었다. 표정까지 드러나는 웃음은 오랜만이었다. 레이겐은 언제나 그게 안타까웠다. 강한 힘때문에 언제나 감정에 브레이크를 걸 수 밖에 없는 불쌍한 아이. 마음껏 울지도, 웃지도, 화를 내지도 못한체 살아가는게 얼마나 힘든지 안다. 어른이라면 모두가 그렇다고 해도 모브는 우선 아이였으며, 어른이라면 일단 쌓인걸 털어놓을 상대나 장소를 만든다. 모브에게 자신과 이 사무소가 그런 곳이 되었으면 했다.


"스승님."

"그래."


언제나 진지하고 필사적인 네가 이 곳을 얼마나 아꼈는지 안다. 방금도 이런 볼품없는 사무소를 소중하게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그런 너를 나 역시 소중하게 생각했다. 그런 말을 정리해서 레이겐은 모브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저, 소행성을 멈추려고 해요."

"...뭐?"


그러나 모브의 말로 레이겐의 머리는 단번에 텅 비어버리고 말았다. 본래 이 제자는 할 수 있는 영역이 넓다. 세계가 넓다. 그래서 참 터무니없는 말도 많았고 행동도 많았다. 아주 예전에 어떤 제령으로 그걸 다시 깨닫고, 한 소녀를 위해 기꺼이 유체이탈까지 한 제자다. 세계정복도 막았고, 아무튼 정말 할 줄 아는 영역이 넓다는 건 알았지만 방금 그 대사는 그래? 하고 넘어가기엔 규모가 달랐다. 어떤의미론 세계정복을 막은 것과 비슷한 규모일 순 있었지만 적어도 그때는 상대가 인간이지 않았나. 인간이라 부르긴 대단한 규모이긴 했지만, 그래도 인간이었다. 사회의 범위 내였다. 하지만 지금은? 인류멸망 수준이 아니라 물리적인 의미로 지구가 반쪽이 날 수도 있는 천재지변이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감히 누가, 였다. 모브의 초능력은 대단한 힘이다. 그래서 무슨 일이 터지면 모브에게 의지하게 되는 마음을 모르진 않는다. 오히려 그 누구보다 모브의 힘에 의지하고 매정치 못한 상냥함에 매달린건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그래서 레이겐은 더더욱 모브에게 말했다.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 도망쳐도 된다. 너의 책임이 아니다. 결국엔 모브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어도 레이겐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결국에 해내고야 마는 제자였다. 그리고 본인의 선택에 괴로워하는 것 또한 모브였다. 그래서 이 사태에 누군가가 모브에게 소행성을 막아달라고 한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표정에 자신의 생각이 드러나서일까, 모브는 레이겐의 얼굴에 허둥지둥 양 손을 어쩔 줄 모르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니에요. 스승님. 누가 시킨 게 아니에요. 저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한 일이에요. 예전과는 다릅니다. 저밖에 할 사람이 없다....란 생각도 있지만, 해야한다고도 생각해요"

"네가 모든걸 할 필요는 없어, 모브."

"스승님은 그렇게 말씀해주실 거 같았어요.... 그래서 처음부터 말씀드리지 못했어요. 분명 흔들릴테니까."


그렇게나 불안하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 모든걸 네가 할 필요는 없는데도 모브는 자신에게 손이 뻗어져오면 힘들고 무섭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손을 내밀고 만다. 아, 이 아이는 왜 이런 상냥함을 잃지 못한걸까. 그 상냥함에 기대어 온 자신이 할 말이 아닐지라도, 그런 상냥함을 잃고 어른이 되었으면 했다. 좀 더 자신을 위해 살았으면 했는데. 


"일주일 동안 준비를 했어요. 오늘 저는 소행성을 막으러 갈겁니다. 떠나기 전에 스승님을 뵐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사실 준비하는 동안 의식이 별로 없었어요. 일주일동안 제 의식이 돌아오지 않으면 에쿠보에게 좀 더 기다려달라고 부탁하려고 했는데."

"모브, 대체 뭘 하고 있는거야? 위험한 건 안해도 돼. 네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어."

"힘을 모았어요. 지금 제 안에는 저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주 많이, 모여있어요. 다들 도와줬어요. 리츠도, 하나자와 군도, 손톱 사람들도...."


차분한 목소리에 비해 마주잡은 모브의 양 손은 떨리고 있었다. 이게 긴장이 아니라면,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다는 소리다. 무엇을? 힘을. 그 강대한 힘을.


"그 때는 브로콜리에 힘을 모아 터뜨렸지만 지금은, 그 이상을 담아두고 있어요. 덕분에 의식이 별로 없었지만.... 스승님을 만나러 가야 겠다고 어떻게든 생각해서 왔어요. 죄송해요, 스승님. 사실 아까 전 사무소를 보고있던 게 아니에요. 아니, 보고 있었지만 힘을 주체하기 어려워 잠깐 집중하고 있었어요. 여기는 집중하기 좋아요. 여기서 자라서일까요, 여기서 스승님께 배워서 그런걸까요...."


하고싶은 말은 바로 통보였다. 모브는 자신이 말하면 흔들릴지도 모른다고 했으나 레이겐은 이미 모브는 마음 속에서 자신의 결정을 정했고 바꿀리 없음을 알았다. 강하게 자랐다. 자신의 힘이 무섭다며 필사적으로 상담소 문을 열었던 란도셀의 아이는 스스로 위험에 달려갈 정도로 강해졌다. 이럴 줄 알았다면 너를 강하게 자라게 하지 말걸 그랬구나. 목까지 찬 말을 차마 뱉지 못했다. 말을 뱉는다고 해서 모브가 흔들릴 것도 아니겠지만 저런 아이가 그런 결심을 하기까지의 노력을 무시하는 말은 차마 입이 찢어진다 한들 할 순 없었다.


"...어떻게 할 생각인데?"


그렇기에 레이겐은 무너졌다. 어느새 일어나있던 몸을 의자에 무너뜨려 자리에 앉았다. 처음부터 그랬다. 자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브의 이야기를 듣는 입장일 뿐이다. 결정하고 결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건 언제나 소년의 일이었다. 


"빙의를 할 거예요."

"빙의? 어디에?"

"소행성이요."

"......"


너무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레이겐의 얼굴에 모브는 곤란한 듯한 표정으로 당황했다. 분명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있었겠지만 그걸 설명하는게 어렵겠지. 레이겐은 시선을 좌우로 굴리는 모브를 가만히 기다렸다. 자신이 보충해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상의 하나 없이 일주일 동안 방향을 정하고 실행에 옮기기 위한 준비를 오로지 스스로 한 모브의 결정을 온전히 모브의 입에서 듣고 싶었다.


"처음에는 부수려고 했어요."


모브가 악의없는 재앙을 깨달았을 땐 이미 행성이 너무 가까이 오고 있던 때였다. 일반인들은 알 수 없는 국제적인 교류가 전부 실패로 돌아가 결국 인류의 포기라는 선언이 내려진 바로 그 때, 인류가 인류를 포기한 그 순간에 모브는 재앙을 깨달았다. 한 밤중에 잠에서 깬 모브가 급히 창밖을 날아 우주로 향했을 땐 이미 소행성은 지구에 상당히 가까워졌을 때였다. 소행성보다는 별에 가까울 정도로 거대한 크기였다. 모브가 부술 수 있을까 없을까 가늠하기보다도, 부순다 한들 그 파편이 떨어졌을 때 지구가 온전할 것 같은 느낌은 없었다. 거기까지 판단한 모브는 그 즉시 지구로 내려와 레이겐을 찾아갔다. 그의 집은 알고 있었다. 멀리 제령의뢰를 갔을 때 몇 번 그의 집에서 잠을 잔 적도 있었고 혹시나 하는 일이 있을지 몰라 레이겐이 적어주기도 했던 길이었다. 

스승님. 지구가 끝날지도 몰라요. 소행성이 떨어져요. 무서워요. 어떻게 하죠? 먼 우주에서 지구로 하강하며 수많은 말이 머리를 맴돌았지만 창문 넘어 침대에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레이겐을 본 순간, 모브는 비행을 멈췄다. 편한 얼굴로 자는 그를 보며 모브는 도무지 문을 두드려 그를 깨울 용기가 나질 않았다. 누구보다도 믿고 의지하던 레이겐의 모습을 본 순간 느낀 감정은 안도가 아닌 공포였다. 


"무서웠어요. 소행성이 지구에 떨어지는 게 아니라, 당신의 안면을 깨우는 게 더 무서웠어요."

"모브."

"내가 당신을 찾았을 때, 당신이 없을 수도 있다는 그 가정을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어...."


지구에 행성이 격돌하면 인류는 멸망한다. 그리고 그 인류에 레이겐이 있었다. 즉, 레이겐이 죽는다. 행성보다도 모브에겐 그것이 더 무거웠고, 공포였다. 


"그 후 집에 돌아와서 에쿠보를 봤어요. 스승님, 에쿠보의 능력이 뭔지 아세요?"

"뭐였지, 빙의한 상대의 능력을 활성화 하는 거였나."

"네. 빙의한 상대의 능력을 100% 발휘하는게 에쿠보의 능력이죠. 거기서 생각했어요. 사람이 아닌 무기체에도 빙의해서 움직일 수 있을까, 하고요."

"....그래서 소행성에."

"네."


소행성을 그냥 밀어내자니 한계가 보였다. 부술지도 확신이 없는 거대한 재앙을 과연 자신이 밀어낼 수 있을까. 그리고 밀어내는 그 추진력을 감당할 수 있을까. 버틸 수 있을까. 그전에 혹시나, 혹시나 예전에 저질렀던 무의식이 튀어나와 모든게 망가지는 게 아닐까. 모브에겐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보다 안전하고, 확실하면서, 폭주하지 않게 밀어낼 방법이 있어야했다. 그러다 에쿠보를 봤고 떠올린 것이 바로 빙의였다.


"에쿠보에게 물어보니 인간이나 동물이 아닌 물건, 무기체에 빙의를 하면 단순한 것 밖에 못한다고 해요. 생물이 아니라 의지가 없어서 의식도 희미해지는 단점이 있지만 단순한 만큼 하나의 효과에 대해서는 확실하다고. 그런 거 있었잖아요. 이 의자에 앉으면 죽는다, 같은 거. 단순하지만 확실한 효과밖에 낼 수 없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저 소행성에 빙의해서 지구 반대 방향으로 가려고 해요. 아니면 지구를 빗겨가던가.... 빗겨나는 쪽이 가장 나을 거 같지만요."

"모브."

"아, 물론 처음부터 빙의를 하진 않을 거예요. 일단 영체로 가서 밀어내보긴 하겠지만.... 그, 영체로 가는 건 초능력을 보다 쉽게 쓰기 위한 겁니다. 스승님도 손톱의 보스를 보셨으니 아시겠죠. 너무 힘이 커지면 몸에도 영향이 가요. 그럴 바에야 처음부터 영체로 간다면 초능력을 보다 쓰기 쉽습니다. 그릇이 없으니까 힘을 쓰는게 어렵지 않은 거죠...."

"모브, 잠깐만."


목소리에 명백한 비난의 색이 담겼지만 그 정도로 멈출만한 게 아니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기가 막혔다. 영혼이 몸을 떠나는건 기본적으로 위험하다. 몇번이나 봤다. 게다가 이 제자는 본인의 입으로 무기체에 빙의를 하면 의식이 흐려진다고 말했다. 설사 지구를 구한다고 해도 이미 자의식을 잃은 그것을 모브라 부를 수 있을까. 그 모브가 다시 되돌아올 수 있는가. 


"안 돼, 모브. 차라리 밀어보고 안되면 돌아와. 빙의까진 안 돼."

"스승님."

"지금 네가 네 입으로 그랬잖아. 의식이 없어질 수 있다고. 네가 너인걸 잊어버린다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어?"
"이 방법 밖에 없어요. 그래서 힘을 모았어요. 최대한 버티고 밀어낼 수 있도록 초능력자들에게 힘을 모아서...."

"모브, 너는 영웅이 아니야. 네가 그렇게 전부 희생할 필요 없다고 했잖아."


아이가 있다. 누구보다도 특별할 그 아이는 자신의 특별함을 싫어했다. 언제나 뭔가가 되고 싶었던 레이겐에겐 이해할 수 없는 고민이었다. 그래서 기왕 있는 거 안써먹을 거면 자신이 이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적당한 말로 구슬려 최저한의 양심은 지킨다고 300엔씩 주며 제 곁에 두었다. 그런 오만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안다. 이제는 알고 있다. 그 오만함은 결국 허울 좋은 제 자존심 뿐이었으며, 아무 것도 몰랐던 아이는 자신의 제자가 되어 그 모든 걸 다 알고 있었음에도 저를 스승이라 올려주고 있었다는 걸 안다. 특별함은 대단한 일이지만, 그리 대단하지 않다는 사실도 이제 안다. 당연히 누리리라 생각했던 일상이 누군가에게 특별하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그래서 레이겐은 모브가 더 이상 특별해지길 원하지 않았다. 본인의 생각대로 본인의 의지대로 살고자 하는 세상에 녹아 평탄하게 살아가길 원했다. 


"영웅이 되려는 게 아니에요!"
"그럼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너는 아직 애야, 모브. 지켜지고 있으면 그걸로 됐어."
"저보고 지금 그냥 가만히 있다가 같이 죽자는 거예요? 힘이 있는데?!"

"적어도 너 혼자 그렇게 희생할 필요는 없다는 소리잖아!"
"당신이 죽는게 싫다고!!"


힘이 많이 담긴 상태여서 그런지 짧은 언쟁에도 모브의 앞머리가 위를 향해 흔들렸다. 그의 감정이 흔들리는 것에 동조하듯 사무실의 가구들도 흔들리거나 떠올랐다. 레이겐이 앉아있는 의자와 탁자만이 고요했다. 

지금과 감정은 다르겠지만 레이겐은 이런 모브를 예전에 단 한번 본적이 있다. 자신이 공격당하자 그걸 스위치로 일시적으로 모조리 개방됐던 감정. 자신은 그 때 모브의 온전한 감정의 형태를 처음으로 목격했다. 에쿠보는 이미 상대했던 강한 감정. 자신의 힘이 두렵다고 온 어린아이가 말했던 힘이었으며, 언제나 브레이크를 걸 수 밖에 없던 모브의 진심이기도 했다. 함께 알아온 긴 시간에서 그 날이 되어서야 처음 보게 되었던 힘이었다.


"...죄송해요, 미리 말씀드리지 않아서. 사실 몇 번이나 스승님께 말하고 싶었어요. 무서워서, 두렵고, 확신도 없고. 그리고 분명 스승님이라면 말릴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무서웠지만, 말씀 드릴 수가 없었어요."

"......."

"스승님이 죽는게 싫었어요...."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너에게 어떻게든 스승으로 있고 싶었던 것처럼, 너도 나에겐 그에 맞춰 제자로 있고 싶어 했구나. 나는 나와 너를 위해, 너도 너와 나를 위해 우리는 익숙한 형태로 함께 살아가길 선택했었다. 


"모브."


그러나 그것도 여기까지다.


"네게 나는 그렇게나 중요하냐."

"네."


레이겐은 자리에서 일어나 모브와 마주섰다. 물음에 부끄러움도 의문도 없는지 제 말이 끝나자마자 돌아온다. 모브. 지금 네가 하는 말을 알고 있는 걸까. 네가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던 첫사랑 츠보미나 동생 리츠, 가족, 친구들을 지키고 싶다는 말을 단 하나도 하지 않았다는걸 알까. 우리가 함께 선택했던 관계에 비해 너의 말이 너무 무겁다는 생각은 하고 있지 않는걸까. 


"그럼 나도 그만큼 네가 소중하단 사실을 알아둬."


거기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겠지.


"네가 지금 인류보다 나를 중하게 여기는 것처럼."


이녀석은 나를 위해서 필사적이었으니.


"...나도 네가 이 지구보다 중요해."


뛰어들어온 작은 몸이, 나보다 더 커졌으면 했다. 가능하면 바로 곁에 두면서 지켜보고 싶었어.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는지 바닥에서 떠오르는 몸을 붙잡고 나지막히 말한 레이겐의 말에 모브는 그의 등에 팔을 두르며 웃었다. 역시 초능력은 아무래도 좋은 힘이었다. 자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제 스승처럼 듣고 싶은 말을 들려줄 자신이 없었다. 아마 지금 자신의 가슴 안에 벅차오르는 이 감정의 이름도 그는 벌써 전망하고 있으리라. 


"방금 스승님께 하고 싶은 말이 생겼어요."

"그 전에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아, 그랬죠. 그럼 스승님부터...."

"그런데 안하려고."

"네?"


시간의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모브는 자꾸 떠오르는 제 몸의 균형을 포기했다. 그보다 지금 자신의 팔을 붙잡고있는 그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길게 보고싶었다.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힘을 위해 이제 나가야만 했다. 물리적으로 가두는 그릇을 떠나 보다 불안정하고, 보다 거대한 힘을 누릴 수 있는 영체로 어떤 악의보다 강한 의지없는 재앙으로 나아가야했다. 그러니 그 전에, 조금 더 당신을 보고 싶다. 


"모브."

"네."

"하고 싶은 말, 들어줄테니까."

"네."

"내가 하고 싶은 말도 해줄테니까."

"..네."


꼭 돌아와.


언제나 옆에서 보던, 두려움 없이 웃는 얼굴. 본디 잘 웃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제대로 활짝 웃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모브도 레이겐을 따라 웃었다. 지금이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갔군.'

"응."


에쿠보가 사무소에 돌아왔을 때 레이겐은 자신보다 아직 작은 모브의 몸을 응접용 소파에 눕혀놓고 그 옆에 앉아있었다. 영혼이 비어버린 몸은 아무런 의미가 없건만 마치 어린아이 낮잠을 재우듯 레이겐은 모브의 머리를 제 무릎에 놓고 머리카락을 매만져주었다.


"에쿠보. 시게오의 몸은 예전처럼 네가 지키는 거냐."

'뭐 그렇지. 시게오의 몸은 꽤 훌륭하니 가만히 두면 악령들이 너도 나도 집어삼키려고 들 거다. 모브가 이야기했나?'

"그럴 시간 없었어. 그렇지만 모브가 몸을 비우는 게 처음은 아니잖아."

'그렇긴 한데.... 괜찮냐?'

"내가 뭘 했는데. 아무렇지도 않아."


악령이 걱정을 다하냐며 터져나온 웃음에도 에쿠보는 반응없이 물끄러미 레이겐을 쳐다보았다. 여기에 오기 전 집에서는 리츠가 통곡을 하고 있었다. 차라리 그렇게 고통을 온 몸으로 토해내는 게 보기 편했다. 에쿠보가 입을 다물자 레이겐도 곧 웃음을 멈췄다. 고른 숨과 안정되게 움직이는 가슴에서는 생명이 있음을 나타내고 있었지만 그 생명의 주체는 돌아오기 힘든 길로 달려가고 있음을 안다.


"<어린왕자> 라는 이야기 알아?"

'모르는데.'

"별 건 아니고, 외계에서 온 작은 별의 왕자가 지구에 왔다가 다시 자기 별로 돌아가는 내용인데 말이야."

'정말 별 거 없네.'

"마지막에 왕자가 자기 별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 육체는 너무 무거우니 두고 가겠다고 해. 죽는 게 아니라 돌아가는 거라고 하면서. 그런데 파일럿-그러니까 지구인인 우리에겐 죽는 거랑 두고 가는 차이가 대체 뭘까? 너무 먼 별이라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고, 그래서 육체를 두고 가니 슬퍼하지 말라고. 웃기는 말이지."

'레이겐.'

"그냥 이야기일 뿐이야. 모브는 왕자가 아니고, 카게야마 시게오라는 어엿한 이름이 있는 지구인이잖아."


에쿠보는 뭔가 말하기 위해 입을 뻐금거렸지만 결국 한숨으로 말을 포기했다. 무기물의 빙의는 어려운 일이다. 물질로 존재하지 못하는 영들은 그만큼 의지가 강해야 자신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그저 숨만 쉬고 눈을 뜨고 살아만 있다면 자신이란 주체를 유지할 수 있는 생명과는 다르다. 그렇기에 아무것도 없는 무기물에 빙의를 하면 그 무기물의 무(無)의지로 흡수되는 확률이 높다. 에쿠보는 그 모든걸 모브에게 자세히 설명했지만 모브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작은 물건에 빙의도 힘겨운데 상대는 별. 한낮 영 하나가 어찌할 수 없는 우주의 존재이며 태고의 시간을 간직할지도 모르는 존재다. 만약 이걸 해낸다면 정말로 에쿠보의 이상대로 카게야마 시게오는 하나의 신이 될 지도 모른다. 막말로 이 지구와 동화되어 이 지구를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다면 그게 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레이겐.'

"왜."

'시게오는....'


그렇지만 그건 누구도 바라지 않는 일이다.


'....왕자가 아니야.'

"에쿠보, 그건 방금 내가...."


말했다는 말은 흐느낌과 함께 쏟아진 눈물로 나오지 않았다. 굵은 물방울이 자고있는 아이의 얼굴로 후두둑 쏟아졌지만 의지없는 생명은 깨어날 수 없고 잃어버리고 보내버린 자의 흐느낌은 멈출 수 없었다.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서로를 먼저 생각해버리는 두 사람이었으니 이승에서의 이별일지도 모를 마지막까지 서로는 서로를 위해 웃었을 것이다. 가린 양 손에서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나오는 눈물과 고통어린 흐느낌에서 에쿠보는 등을 돌려 창밖으로 빠져나갔다. 

하늘은 맑고 높았다.






"레이겐, 또 위에 있었냐. 너 자꾸 일 안할래."

"제령은 어차피 네가 하잖아, 에쿠보. 위험하니까 비키라고 한건 너일텐데."

"그렇다고 아예 쏙 빠지란 말은 아니다, 이 자식아."

"좀 봐줘, 오늘은 날이 맑으니까."


저 뻔뻔함은 악령도 못잡아먹으리라. 에쿠보는 속으로 악담하며 옥상에 올라서 하늘만 바라보는 레이겐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아마 요 4년간 레이겐이 가장 많이 시간을 허비한 일 중 하나는 저 하늘을 쳐다보는 일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구는 무사하고 인류는 생존했다. 지구로 떨어지던 행성은 하늘을 가득히 채우고 지구를 정말 아슬아슬하게 빗겨 태양을 향해 돌진했다고 한다. 당시 별이 하늘을 채웠던 나날, 레이겐은 틈만 나면 창문에서 하늘을 바라보거나 아예 사무소 건물 옥상에 드러누워 있고는 했다. 온 몸으로 저 무자비함을 받아들이고 싶었는지 아니면 저 별에 스며든 소년 한 명을 보고싶었는지는 모른다. 에쿠보는 아마 그 둘 다이리라 생각했지만 레이겐에겐 묻지 않았기에 그저 짐작일 뿐이다. 그렇게 빗겨나간 별이 더 이상 하늘에서 보이지 않게 되자 옥상에 드러눕는건 그만두게 되었지만 하늘 바라보기는 여전했다.

이미 이 위에 시게오는 없건만. 그렇게 한숨을 내쉬며 에쿠보가 고개를 내리자 의외로 레이겐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자신보다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소년의 몸이다. 이젠 소년이라 부르기엔 제법 자랐지만 말이다.


"왜?"

"아니. 모브 몸 다친 곳 없나 해서."

"이 몸이 삼류같은 짓을 할 리가 있냐. 예전과 달리 몸도 커져서 그릇 자체도 좋아졌고. 별 문제 없다."

"그럼 다행이지만."


상처라도 나면 일단 리츠부터 가만히 있지 않는다. 에쿠보는 지긋하게 노려보는 레이겐의 시선에서 고개를 돌려 시게오의 몸을 살펴보았다. 제 몸이 아니기에 육체에서 나오는 상처나 고통의 감각은 꽤 무디다. 그래서 어지간히 다쳐도 움직이는 건 이상이 없지만, 다시 말하면 어지간히 다치지 않으면 눈치채는게 느리다. 처음 다쳤을 땐 정말 잠깐 저 몸에서 나오고 싶을 정도로 리츠나 레이겐이 번거로웠기 때문에 에쿠보는 최대한 감각을 예민하게 끌어올려 잠깐 빌린 이 몸이 다치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었다. 


"확실히 꽤 컸지. 시게오 녀석."

"내 키를 넘을 줄은 몰랐는데."

"그게 다 이 몸의 실력 아니겠냐."


4년. 벌써 4년이나 이 몸에 있었다. 그 동안 에쿠보는 주인 잃은 몸을 챙겼다. 대책없이 쌓여가는 힘을 순환시키고 지속적인 운동과 식사섭취로 건강을 유지했다. 중학교때 하던 부활동마냥 운동을 하진 않았지만─에쿠보에게 그들의 몸은 분명 상질의 근육으로 이루어져있다고 인정했으나 그들을 따라갈 자신은 없었다─적어도 중학교 시절 힘없이 말랑이는 몸은 아니었다. 워낙 몸이 허약했는지 이렇게 만드는데 꽤 고생이 뒤따랐지만 말이다. 

그렇게 만든 몸에 욕심이 나지 않았냐고 하면 에쿠보는 의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일 자신이 있었다. 써먹기 좋은 몸은 분명했지만 이건 나의 것이 아니고 잠깐 빌렸을 뿐이라는 의식이 강해서인지, 혹은 이 몸의 건너편에 있는 진짜 주인과 자신을 제대로 구별해서 보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인지는 모른다. 

다만, 어서 이 주인이 와주었으면 하는 마음은 4년 전과 다르지 않다. 그렇게 에쿠보가 한숨을 쉬고 세리자와가 밑에서 기다리니 내려가자고 말을 꺼내려던 때였다.


"...? 음?"

"왜, 에쿠보?"

"아니. 못보던 게 있는데?"


터덜터덜 걸어가던 에쿠보가 걸음을 멈추자 따라오던 레이겐 역시 자리에 섰다. 이젠 제 키보다 위에 있는 머리통이 가렸다고 해도 레이겐이 올라왔을 땐 옥상엔 아무것도 없었고 적어도 지금 보이는 제 시야에서도 특별할건 없었다.


"아무것도 없던데?"
"레이겐 너야 영력이 벌레만도 못하니까 영이 보일리가."

"말하는 꼴 보게, 에쿠보. 내가 너나 세리자와 옆에 있으면서 능력은 없어도 영안은 꽤 트였는데..."


사무소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어쨌든 영적인 능력이 필요하던 차 정말 잘 된 일중 하나였다. 주변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며 에쿠보가 말해줬을 땐 솔직히 기뻤다. 지금까진 보이거나 들리는 것도 너무 드문 일이었기 때문에 위험한 경우에 종종 빠져 에쿠보와 모브의 몸, 세리자와까지 곤란한 일이 처하게 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면 적어도 도망이라도 갈 수 있지 않은가. 그렇게 주절주절 말하던 레이겐은 에쿠보의 이상한 침묵에 입을 다물었다. 저 악령이 가만히 말을 듣고있을 만한 위인이 아닌데. 바닥에 동전이라도 떨어졌다는 말투마냥 영이 있다며 자리에 주저앉은 이후로 조용해졌다.


"어이, 에쿠보. 갑자기 왜 말이 없어?"


이상한 생각 하지 말라고 주저 앉은 어깨를 툭 쳤을 뿐인데 건실한 몸은 마치 줄 끊어진 인형마냥 바닥으로 무너졌다. 반사적으로 몸을 붙잡아 더러운 바닥에 구르는 건 막았지만 갑자기 왜 이렇게 됐는지 영문을 모른다. 레이겐은 예전보다 커 어려워진 몸을 간신히 부축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꽤 오랜만에 보는 초록색의 기분 나쁜 불덩이가 이글거리며 엎어져있다. 


"에쿠보! 너 왜 갑자기 튀어나왔어!! 모브가 다칠 뻔 했잖아!"

'어? 아냐! 갑자기 튕겨진거라고!'

"...뭐? 잠깐, 그럼 모브는?! 갑자기 네가 왜 튕겨져 나갔는데?! 조건이 뭐야?"

'조건? 그야 당연히 이 몸보다 강한 악령이 있거나....'


예민하게 성질내는 레이겐 만큼이나 짜증스럽게 외치던 에쿠보의 말이 돌연 멈췄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만 붕어처럼 뻐끔거린다. 다른 것도 아닌 모브의 관련된 일인데 왜 저렇게 굼뜬 반응인지 답답한 마음에 다시 외치려는 순간 에쿠보는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급차.'

"뭐?"

'구급차 부르라고 레이겐 이 멍청아! 이 몸이 튕기는 게 이유가 뭐가 있겠냐! 이 몸보다 강한 악령이 아니면 본인이 돌아왔을 때 뿐이야!!'

"...뭐?"

'젠장, 너무 작아서 몰랐는데! 그렇게 작아져서 오리라고 누가 생각 했겠냐!'

"잠깐, 에쿠보, 너 방금 뭐라고."

'시게오가 돌아왔다고!!'


그러니까, 뭐라고? 입만 쩍 벌린 자신 대신 답답한듯 에쿠보는 빠르게 바닥으로 사라졌다. 아마 밑에 있을 세리자와에게 부르는 걸 시킬 모양이었다. 머리는 그렇게 냉정하게 돌아가는데 마음이 거기까지 따라오질 못했다. 4년 동안 늘 바라온 일이었는데 그게 갑자기 이루어졌다! 라고 해도 실감이 날리 없다.


"......모브?"


불러도 대답이 없다. 에쿠보가 빠진 몸은 그저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에쿠보가 종종 바깥으로 나왔을 때 레이겐은 그런 모브의 곁에 언제나 함께 있었다. 당장이라도 눈을 비비며 일어날 것 같은데도 이 몸의 주인은 이 곳에 없다. 하늘 위 보이지 않은 우주 어딘가에서 거대했던 별이 됐다. 사람이 죽어 별이 된다는 말이 완전 거짓말은 아니라는 생각을 몇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모브는 죽은 건 아니지만, 죽은 것과 차이점을 모른다. 제 별로 돌아갔다던 어린왕자처럼.


"모브."


하늘을 그만 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리츠나 하나자와, 손톱 지부 사람들, 에쿠보와 세리자와까지 언제까지고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자신에게 한마디씩을 했다. 그만 보라고. 레이겐은 그들의 말을 이해했지만, 도무지 마음이 따라주질 않았다. 지금처럼. 


"모브, 일어나."


저 하늘 위 어딘가에 있을 너를 생각하면 보지 않을 수가 없었어. 너의 작은 별은 지금 쯤 어디를 떠돌고 있을까. 언제나 그런 생각을 했다. 방금 전까지도 그랬는데. 


"....정말, 돌아온거야? 모브. 일어나봐. 저기, 모..."


멱살을 잡힌 것보다, 제 입술이 다른 입술로 막힌 것보다도 빙의했을 때 나타나는 붉은 점이 사라진 깨끗한 얼굴에 떠오른 검은 눈동자가 예전처럼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에서 레이겐은 경악했다. 


입술은 금방 떨어졌다.


"모,"

"들을거니까."

"어, 뭐?"

"당신 말 들으려고 왔으니까 일단...."


잠 좀 재워줘요, 스승님. 제 할말만 하고 넘어가는 몸을 레이겐이 허둥지둥 받았을 땐 눈을 뜨고 당돌한 짓을 한 것 치고는 정신없이 잠에 빠져버린 뒤였다. 너무 순식간이라 뭐라 반응도 못했다. 얼떨떨한 기분에 순간 자신이 너무 그리워한 나머지 꿈이라도 꾼게 아닐까 싶어 남는 손으로 볼까지 꼬집었다. 아프다. 꿈이 아닌가? 레이겐은 아픈 볼을 문지르며 모브를 내려다보았다. 자고있다. 아무런 반응도 없이 정말 숨만 쉬던 모습과 달리 인상도 쓰고 조금씩 몸을 꿈틀거리고 있다. 입 벌리고 자면 나중에 건조할텐데. 별 생각없이 레이겐이 손으로 얇아진 볼을 쓸자 간지러운듯 앞머리에 덮였던 눈썹이 조금 움직였다.


아, 진짜 모브다. 어린왕자가 되지 않은, 되지 않길 바랐던 카게야마 시게오. 모브.


"....재워줘는 뭐야, 이 멍청한 자식. 오자마자 잠이나 자고. 스승 멱살이나 잡고...."


레이겐은 예전보다 커진 몸을 끌어안았다. 비록 헤어지던 그날처럼 마주잡아주진 않았지만 상관 없었다. 오히려 지금 이 터질것 같은 마음에 사랑스러운 팔이 등으로 돌려지기라도 하면 그대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그건 곤란하다. 이제 겨우 만났으니, 그 때 하지 못한 말을 해야한다. 4년이나 먹은 어른스럽게. 그리고 모브도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죽을 땐 죽더라도 그 말은 들어야하고, 일단 하고 싶다. 


모브, 이별은 한번이면 족하지? 레이겐은 제 얼굴을 가린 젖어가는 손을 털었다. 하늘은 아무래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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