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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그의 정신을 비틀었는지는 모른다. 원래부터 그랬을까 혹은 점점 이상해졌는가 이제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미도리야 이즈쿠라는 인간은 더이상 히어로가 아니라는 사실 뿐이다. 수수하고 내성적이게 보였던 모습과 달리 그의 데뷔는 크고 화려했다. 올포원을 잡은 것이 평화의 상징으로써의 데뷔였다면 빌런으로써의 데뷔는 그의 목표이자 미도리야 이즈쿠를 아는 사람 전원이 알고 있는 그의 이상인 올마이트의 살인이었다. 미도리야 이즈쿠는 확실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이제 더이상 히어로와 정의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그는 그의 우상과 평생의 존경이었던 존재를 스스로 죽였다.
히어로가 되고 싶었어.
미도리야는 그렇게 웃으며 바쿠고를 쳐다봤다. 한때 평화의 상징이라는 이름을 업을 정도의 사내였으나 전무후무하며 한때 자신들의 영광이었던 올마이트의 살인이라는 최악의 죄를 저지른 그를 세계는 용서하지 않았다. 미도리야의 도주는 영리했으나 그보다 날고 기는 히어로 또한 천지였다. 처음부터 승산없는 싸움이었다. 바쿠고는 지친 얼굴로 미도리야를 올려봤다. 예전같았으면 이런 구도에 화를 냈겠지만 지금 바쿠고에겐 개성을 발휘할 기운도 없었다. 미도리야는 그런 바쿠고에게 그저 웃었다. 미도리야는 올마이트를 죽였지만 바쿠고를 제 손으로 죽일 생각은 없었다.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
자신은 오늘 여기서 죽을 것이다. 미도리야는 알았다. 마지막으로 대화하는 시간을 준 건 저에 대한 배려가 아닌 제 앞에서 필사적으로 자신을 쫓아왔을 그에 대한 존중이며 동시에 공격 타이밍을 재고 있다는 사실도 전부 알았지만 기꺼이 말려줄 생각이었다. 이 세상에 더이상 미련은 없지만 그래도 한때 사랑하고 지키고 싶었던 세상이다. 마지막 예의는 지켜줄 생각이다. 큰 의미는 없다. 미도리야는 이 세상에 더이상 어떤 의미를 느끼지 못했고 제가 가졌던 수많은 수식어에도 미련이 없었다. 그건 제 앞에 서있는 악우이며 친우이며 한때는 믿기지 않지만 사랑을 속삭였던 연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캇짱. 알고 있었지?
두 사람 사이에 바람이 분다. 미도리야로부터 불어나간 바람은 바쿠고를 지나 히어로들에게 향했다. 미도리야는 마치 사랑을 하는 사랑처럼 더없이 자상하게 웃었다. 아니다, 사랑을 하고 있었다. 미도리야 이즈쿠는 스스로가 느끼는 절망에 희열을 느꼈으며 사랑을 했다. 다정한 웃음에 바쿠고도 따라 웃었다. 미도리야가 깨달았다면 바쿠고는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뭐를.
고백을 한 건 미도리야로부터였다. 바쿠고는 기가 찼다. 지금도 기억이 난다. 뛰어내리라던 옥상에서 죽지는 못할 망정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더듬더듬 말하는 고백을 기억한다. 옥상바람에 흩어지는 숲 색의 머리카락도 기억한다. 그 아래 붉어진 얼굴과 열정적인 눈이 자신을 향한 것 역시 바쿠고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의 바쿠고는 그 모든 미도리야의 요소가 어이가 없었다. 왜냐면 미도리야는 대단히,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사실은 히어로가 되고 싶어한 게 아니었다는 거.
미도리야 이즈쿠가 절망을 느낀 건 아주 오래 전이었다. 그도 정확한 시점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듯 했다. 확실한 건 미안하다며 자신을 부여잡고 우는 어머니의 목소리와 눈물과 함께 무언가가 무너져내려 사라졌다는 것 뿐이었다. 히어로를 꿈꾸고 히어로가 되었던 미도리야는 그 구멍을 히어로에 대한 애정으로 채웠다. 그래도 채워지지 않는 부분을 바쿠고에게 요구했다. 작은 소년의 작은 세계에서 그는 굉장했고 대단했으며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사실을 바쿠고는 전부 알고 있었다.
그래.
그런데 그건 보통 구멍이 아니었다. 천에 구멍이 나면 기워서 입는다 해도 바닥이 없는 원통안에 물을 부어봤자 물은 어디에도 담기지 않는다. 미도리야는 원통이었고 미도리야가 긁어모은 모든 것들은 물이었다. 예상 외였던건 본디 그 물 안에 있어야할 바쿠고가 마치 언젠가 만났던 빌런처럼 진득하니 원통에 붙어있다는 점이었다. 미도리야는 그걸 떼어내지 않았다. 이렇게 되기 전 미도리야는 그것을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캇짱.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착각을 왜 전부 알고 있었는지는 바쿠고도 잘 모른다. 그냥 바쿠고는 미도리야의 상태를 알았다. 분명 미도리야는 한때 히어로를 동경하며 사랑하며 꿈을 꿨지만 그건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미도리야는 절망했다. 어린 나이에 제 모든 걸을 건 절망은 모든 걸 삼켰다. 그리고 뱉었다. 애석하게도 한번 물든 건 돌아오지 않는다. 바쿠고의 눈에 미도리야는 그 모든 걸 사랑하지 않는다는게 보였는데도 행동과 말투가 예전과 같았고 본인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착각위에 착각이 쌓여 그걸 미도리야는 정말이라고 믿었다.
내가 너를
그래서 바쿠고는 점점 미도리야가 어려워졌다. 강에 빠진 자신을 걱정하며 뻗어진 손엔 정말 아무런 타의가 없다고 믿는 미도리야의 얼굴이 있었다. 그건 두말할 것 없는 공포 그 자체였다. 바쿠고는 그날 집으로 돌아가 사전을 찾았다. 미칠 광(狂). 미도리야를 표현하기에 이보다 적합한 글자가 없었다. 그러나 미도리야 이즈쿠를 어떻게 해도 저렇게 부를 수 없으니 그냥 데쿠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렇게 무시하고 무시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랬더니 뒤지라는 옥상에서 고백을 받게 되었다.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도?
바쿠고는 미도리야가 무서웠다. 자신의 생각이 진짜라 믿는 존재가 두려웠다. 그래서 얼른 죽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아직 자신이 믿는 정의로운 미도리야 이즈쿠가 무너져 없어지기 전에 죽는다면 자신에게나 본인에게나 그보다 좋은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미도리야는 죽지 않았고 필사적으로 기어올라와 바쿠고 앞에 서서 사랑을 고백했다. 그게 사랑이 아님을 바쿠고는 알았다. 미도리야 이즈쿠는 끝없는 절망의 인간이기에 그 무엇도 사랑할 수 없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미도리야에게 바쿠고는 그저 히어로에 다가감으로써 넓어진 원통의 틈을 메우는 그 정도의 것임을 알았다.
당연하지, 등신 새끼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쿠고는 미도리야의 고백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의 얼굴을 기억한다. 흩날리는 바람에 큰 눈에서도 눈물이 흩어졌다. 착각의 위라고 해도 그때 분명 미도리야는 아주 행복해했다. 착각의 위, 본인이 진심이라 믿는 마음은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었다. 착각이었지만. 그래서 바쿠고는 받아들였다. 자신을 끌어 안고 뭐라 헛소리를 지껄이며 펑펑 우는 이 따뜻함은 한정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미도리야가 그 절망 속에서 조금이라도 절망이 아닌, 스스로를 자신에게 보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인정했다. 그렇게 둘은 연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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