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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송이, 유채.
이어받은 가게는 자리가 미묘하다. 벌써 몇 년째 운영하고 있는 자신의 꽃집에 대해 센토는 이렇게 분석했다. 모든 가게는 비단 사람의 유동성이 중요하건만 이 자리는 시장과는 거리가 있으면서 근방의 고등학교와 가깝다. 학생은 주 수입원도 아닌데 말이다. 물론 근처 밀집해있는 거주지역의 특성에 따라 어느 정도 상점가가 형성되어있긴 해도 꽃집이 있을 만한 곳은 아니다. 전 주인과 달리 센토는 주로 인터넷에서 판매를 주 수입으로 하고 있기에 특별히 한적해도 상관은 없지만 왜 이런 자리에 꽃집을 냈는지 알 수 없다.
뭐, 아무렴 어때. 센토는 오늘도 느긋하게 흐르는 공기를 만끽하며 읽던 책을 폈다. 등하교 시간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이 골목은 조용하고 소란스러운 것을 즐기지 않는 센토에게 이 곳은 천국과 다름없는 장소였다. 좋아하는 꽃들과 책과 한 잔의 커피. 물론 해야 할 일은 언제나 완벽하게 끝내 놓은 참이다. 오늘도 좋은 하루야. 그리 생각하던 무렵이었다.
“으악!!”
갑자기 문 밖에서 들려온 비명과 무언가 무거운 것이 떨어지는 소리에 일순간 몸이 굳었다. 언제나 조용한 내 가게와 가게 앞에서 무슨 일이? 놀라 나가보자 앞에는 바닥에 나동그라진 남학생과 쿠션이 된 대신 엉망이 된 학생의 가방이 처참하게 널려있었다. 그리고 조금 부러진 잔가지들. 대충 상황은 알았다.
“이봐, 너. 괜찮아?”
“어?”
열었네? 하며 동그랗게 변하는 눈이 제법 귀엽다. 센토는 아직도 앳된 얼굴에 픽 웃었다. 나무에 올라가려다 떨어진 것 치고는 제 아픔보다 이쪽에 관심이 쏠린다.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는 타입일지도 모르겠다.
“꽃집은 일찍 연단다, 지각생.”
“뭐, 아니거든! 경기에 나간 날 다음날은 오후에 등교해도 괜찮다고!”
“그래그래, 알았으니까 일단 일어나자. 길에 누워있는 건 너도 싫지?”
손을 내밀자 입을 삐죽이면서도 순순히 잡고 일어난다. 먼지를 터는 손이나 움직임으로 봐선 다치진 않은 것 같다. 다쳤다고 자신의 책임이 되는 건 아니지만 가게 앞에서 누가 다쳐서 기분이 좋을 리도 없다.
“몸은 어때?”
“괜찮은 거 같아. 그, 고맙습니다.”
“이제 와서 존댓말? 뭐 상관은 없는데, 나무에는 왜 올라갔어?”
“그게….”
야옹. 마치 학생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들려온 작은 소리는 센토가 모든 상황을 이해하기에 너무 충분한 정보였다. 약속한 것처럼 두 사람은 나무 위를 올려보았고 거기엔 아직 새끼처럼 보이는 고양이가 가지에 앉아 밑만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 고양이?”
“아니, 길고양이. 학교 가는 중에 자주 보니까 먹을 거 정도는 주는데 오늘따라 안보여서 잠깐 찾아보니까 저기에 있잖아. 불러도 내려오질 않아서….”
“우리 가게 지붕을 타고 올라가긴 했는데, 어려서 못 내려오는 거지. 기다리고 있어.”
겉으로 드러나는 가게는 작지만 안쪽의 창고는 이것저것 물건이 많다. 그 좁은 곳에서 그런 것도 있냐는 말에 웃으며 센토는 꺼내온 철제 사다리를 가로수에 고정했다. 다 펴지 않은 사다리는 가로수 가지까지 닿지 않지만 센토 본인의 큰 키를 생각하면 이정도가 적당하다. 그렇게 올라서니 아기 고양이는 밑에서 본 것보다도 작았다. 꼬맹이가 생각 없이 돌아다니니 그렇지. 웃음기 어린 말에 고양이는 반항하듯 울어댔지만 센토가 손을 뻗자 순순히 그의 손에 몸을 뻗어주었다. 길고양이라더니 손을 많이 탔네. 그런 생각을 문득 했다.
“잘됐다, 드래곤!”
“드래곤? 이 애 이름?”
“응! 여기 무늬가 그렇게 보이잖아! 그러니까 드래곤!”
“이런 겁쟁이 꼬맹이한테는 너무 거창한 이름 아냐?”
가리킨 무늬를 봐도 딱히 드래곤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그 부분은 접어둔다. 딱히 태클 걸 이유도 없거니와 고양이를 받아들자 환하게 웃는 미소가 제법 마음에 든다. 정말 보는 사람마저 절로 웃음이 나오는 쾌활한 소년이다. 주변에 이런 타입은 많지 않아서 신선하다. 센토는 아예 바닥에 앉아 장난치는 한 마리와 한 명을 보며 평소 같지 않은 일상에 조금 당황하면서도 골목에 울리는 웃음소리에 따라 웃었다. 시끄럽긴 하지만 나쁘지 않네.
“자, 그럼 이제 됐지? 어서 가봐, 유채.”
“유채?”
“Rapeseed. 학명은 Brassica napus, 쌍떡잎식물 양귀비목 십자화과의 두해살이풀이지. 알아?”
“어, 뭐?”
“몰라? 너 머리 나쁘지?”
“바보 아니거든!!”
스스로도 어린 애한테 짓궂다고 생각하지만 생각대로의 반응에 웃음이 터진다. 벽을 잡고 깔깔거리는 자신을 어이없게 보는 눈초리는 생동감이 넘친다. 처음 만난 아이이고 또 만날지는 알 수 없지만 센토에게 있어선 꽤나 특별한 시작을 만들어주었다. 분명 내일이 되면 잊겠지만 적어도 오늘 하루는 즐거운 기분으로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꽃 이름이야. 유채꽃. 꽃집에선 다루지 않아서 보여줄 순 없지만.”
그런 고운 손님을 그냥 돌려보낼 순 없지. 사과와 감사의 뜻을 담아 센토는 가게 밖에 내놨던 프리지아 하나를 손에 들었다. 비록 같은 의미는 아니지만 오늘 가게에 있는 노란 꽃 중에서 가장 화사한 아이다. 손. 마치 강아지에게 말하는 듯한 말에도 순순히 제 손을 펴는 모습에 또 터질 것 같은 웃음을 삼키며 센토는 자신보다 작은 손에 노란 꽃 한 송이를 내려놓았다.
“오늘 하루 유채가 잘 지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줄게.”
“아, 고맙습니다…. 아니, 아니! 나는 반죠 류우가라는 이름이 있어!”
“그래? 나는 키류 센토. 그럼 이제 더 늦기 전에 학교로 가봐, 지각생 유채군.”
“그러니까 유채가 아냐! 지각도 안했어!!”
따뜻한 햇살이 내리는 날이었다.
두 송이, 페튜니아
처음은 선물, 두 번째는 우연, 세 번째는 어쩌다보니.
“안녕, 디디스커스. 오늘도 연습?”
자신의 부름에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류우가는 걸음을 옮겼다. 처음엔 자신을 부르는지도 모르던 것이 제법 눈치가 좋아졌다. 아무튼 잘 모르는 이름과 자신의 목소리가 나면 본인을 부르는 것이다, 까지는 학습이 된 모양이다.
“디, 뭐? 좀 쉬운 이름 없어?”
“네 이름도 다섯 글자잖아.”
“그거랑 이거랑 다르지!”
기대하는 대로 나오는 반응은 즐겁다. 당장이라도 되돌아갈 것처럼 씩씩거리지만 이제 일과가 된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센토는 미리 꽃피워둔 디디스커스 하나를 가져와 기다리고 있던 류우가의 손에 올려주었다. 그 후엔 어쩐지 가게에 자리 잡은 드래곤이란 거창한 이름의 아기고양이를 돌봐주면 끝. 센토는 꽃집 오픈준비를 하고 류우가는 등교중이니 기본적으로 둘의 만남은 길지 않다.
“아, 맞아. 센토. 나 조만간 경기 나가.”
“그래? …음, 보러가야 돼?”
“당연히 오라고 하는 거잖아! 자세한 건 곧 말해줄게!”
길지는 않아도 계속 이어지면 그 나름대로 일상이란 이름으로 묶인다. 절대로 이긴다며 큰 소리를 내는 류우가에게 센토는 어서 학교나 가라며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 * *
“낯을 가리는 센토가? 의외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사와의 말에 솔직하게 긍정하며 센토는 그녀의 앞에 알맞게 내린 커피를 놓았다. 프리 저널리스트인 그녀와의 관계는 10년 이상의 긴 인연이었다. 센토가 어린 시절 물리학천재라고 불리며 수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욕심에 짓눌리고 있던 때, 아이에게 그런 걸 강요하지 말라며 뛰쳐나온 당시 신참기자가 바로 그녀였다. 그걸 계기로 프리로 전업한 그녀에겐 신세를 많이도 지고 있다. 고정적인 손님이기도 했으며 많은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조금 꺼려하는 센토의 인간관계 안에서 수많은 소식과 정보를 들고 오는 사람이기도 했다. 물론 그 모든 것이 아닐지라도 센토에게 사와는 마스터와 더불어 은인이었다.
“오늘은 센토가 아니라 내가 이야기를 들어야겠는데? 그래서 누굴까, 천하의 키류 센토의 꽃을 받는 사람은?”
“사와 씨, 그거 좀 이상하니까요. 나는 꽃집 주인이거든요?”
“어머, 틀린 말은 아니잖아?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에요?”
“저를 가지고 노는 건 한참 이르다고 생각하는데요?”
“들켰어?”
“완전히.”
동시에 완전히 타인의 시선에서 객관적으로 봐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즉 그녀가 의외라고 한다면 정말로 완전히 일상이 된 만남이 자신에게는 특이한 일이겠지. 꽃향기 위로 진한 향을 주장하는 커피를 들이키며 센토는 자신에게 온 새로운 바람에 대해 떠올렸다.
좋은 아이라 생각한다. 흔한 길고양이를 외면하지 못해 이렇게 손을 탈 정도로 예뻐하거나 몸이 자산이면서도 위험하게 나무에 올랐던 것, 경솔한 것도 있지만 솔직하고 거짓 없이 분명한 점도 마음에 든다. 매번 놀림 받고 잘 외우지 못하는 꽃을 받으면서도 웃으며 인사를 잊지 않는 점은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어?”
“응? 왜?”
“아니에요. 잠깐 생각하느라.”
좋아한다면 좋아한다. 싫어할 이유도 없고 좋은 아이다. 그런데 왜 그 말을 떠올리자 마음이 움직였는지 모르겠다. 모른다. 어? 정말 모르나? 갑자기 복잡해진 감정이 얼굴이 드러났을까, 사와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입을 열었다.
“좋아?”
“풉, 네?! 어, 나 말로 했어?!”
그럴 리가. 뱉은 커피를 급히 닦으면서도 경악하는 센토의 눈에 비친 것은 언제나 여유 있는 미소를 짓고 있는 연상의 여유였다.
“정답?”
“사와 씨!”
“넘겨짚어진 쪽이 잘못한 거지. 현직 저널리스트를 우습게보면 안돼요.”
“최악이야! 그보다 그 녀석 바보니까! 아니에요!”
이렇게 말해도 이미 그녀의 눈은 확정이다. 센토는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당장 사와처럼 제 마음에 결론을 내리기는 무리였다. 과거 물리학을 전공했던 사람으로서 제대로 된 근거가 없으면 결정하지 않는 건 이미 본능에 가까운 학습결과다.
확실히 좋은 아이고 함께 있으면 즐겁다. 그러나 긴 시간을 보내지 않기 때문에 가벼운 교류에서 오는 산뜻함일지도 모른다. 센토는 그런 관계를 싫어하지 않는다. 한번 여러 가지의 복잡한 인간관계에 짓눌린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무거운 건 오히려 이쪽에서 사양하고 싶어진다. 스스로도 가능한 타인에게 그렇게 하지 않도록 생각하며 응대하고 연기한다. 그 아이에게도 그랬나? 처음 도왔던 건 단순하게 그랬던 것 같기도 한데, 지금은?
“꽃이….”
“꽃?”
“그게 생각나요.”
당황스럽게 마주한 당장의 마음보다도 솔직하게 생각나는 것이 꽃이었다. 유채는 반 쯤은 농담이었지만 그 뒤로 다시 마주쳤을 때 저도 모르게 또 다른 꽃을 불렀다. 목소리 덕분에 뒤를 돌아봐 마주치지 않았으면 그대로 지나가 끝나게 됐을 인연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마침 불렀던 이름의 꽃을 정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었다. 그 다음은 겉잎이 상한 꽃잎을 떼고 있으려니 마주쳤다. 무시하기도 뭐해 꽃을 든 손을 흔들어주니 인상을 쓰면서도 가까이 왔다. 그러고는 얘는 크기도 하네, 하면서 냉큼 집었다. 딱히 줄 건 아니었지만 다시 가져올 필요도 없어 주었다. 그렇게 쌓여온 시간이 센토에겐 특별하고도 조용한 일상의 하나가 되었다.
응, 역시 좀 이상하지. 센토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어째서 생각하면 할수록 그런 방향으로 흘러갈 거 같은데?! 물론 이 모든 생각은 머릿속의 외침이라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겠지만 누가 대답 좀 해주면 좋겠다. 일단 눈앞에서 웃고 있는 그녀를 제외하고 말이다.
“뭐, 좋은 거 아니겠어?”
“사와 씨는 그냥 재밌는 거겠죠.”
“그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새로운 건 꼭 나쁜 게 아니잖아? 이 꽃집처럼. 예전에 비해서 꽃 종류가 많이 늘었잖아.”
사와가 말하며 집어든 꽃은 원래부터 있었고 조만간 류우가에게 줄까 생각했던 꽃이지만 이 상태로 저 꽃을 주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일단 내일 만나면 초대 당할 경기부터 물어봐야겠지만. 사람 많은 곳을 기피하는 자신이 말이다. 센토는 예쁜 손끝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페튜니아를 보며 심란한 한숨을 내쉬었다.
세 송이, 메리골드
겨울의 꽃집은 한가하다. 센토 역시 마찬가지로 매장에서 꽃을 사는 이는 원래부터 적었지만 겨울엔 거의 없다시피 해 매장을 닫거나 운영시간을 짧게 조정하기도 했다. 실제로 작년까지는 매장 앞에 쉽니다, 는 팻말을 삼일에 한번은 걸어놓고 있었다. 그러나 올 해는 조금 다르다. 가뜩이나 쉽게 몸이 식는 자신으로선 최악의 계절과 날씨를 뚫고 가게를 열다니. 작년의 자기가 보면 미쳤냐고 펄쩍 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닫을 생각을 하지 않는 건 최근 급한 플로리스트 강좌 대타로 며칠 자리를 비웠던 일 때문이었다.
- 센토! 늦어!
- …반죠?
집은 오로지 쉬는 곳, 즉 일에 관련된 모든 건 가게에 놓는다. 자영업을 하는 사람으로서 자신과 업무의 경계를 나누는 일은 꽤 중요한 일이라 센토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철칙 하나는 지키는 편이었다. 컴퓨터가 있으니 반 쯤 무너진 거나 다름없지만 적어도 서류는 가지고 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들렀던 꽃집이었다.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던 만남에 서둘러 걸어가자 코끝이 조금 빨간 류우가가 잔뜩 얼굴을 구긴 채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추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쌀쌀했고 학교에서 온 건 아닌지 복장은 얇았다.
- 세상에, 너 왜 여기에 있어? 내가 안 왔으면 어쩌려고!
- 뭐? 무슨 소리야, 오늘 온다고 한 건 너잖아! 기껏 기다려줬더니!
- 기다려? 뭘 기다려? 아니 일단 들어가자. 춥잖아.
일단 자신이 두르고 있던 스카프를 둘러주고 가게 열쇠를 찾아 문을 열었다. 꽃들은 미리 정리해 넣어놨으니 문제가 없지만 며칠 비웠던 가게는 빈말로도 따뜻하진 않았다. 일단 가지고 있던 담요를 건네주고 포트에 물을 올렸다. 따뜻하게 먹을 게 있던가. 커피야 있지만 류우가에게 준적은 없고 학생에게 주기도 좀 그렇다. 우유가 있으면 좋을 텐데. 자주 열어보지도 않는 냉장고와 지금이라도 나가서 사와야 하나 고민하며 우왕좌왕하는 센토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조용하던 류우가가 고개를 숙였다.
- …미안.
- 반죠?
- 아니, 그, 바쁠 때 온 건가 해서. 요새 계속 가게 안 열어서 무슨 일 있나 물어보니까 네가 그랬잖아. 오늘 온다고. 그래서 만나러 오고 싶어서, 온 건데….
미안합니다. 당당하게 쳐다보던 평소와 달리 바닥을 숙인 고개에서 진심이 느껴진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지? 언제나 조금 소리가 커졌던 만남은 오간데 없고 불편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제법 덩치가 커진 드래곤이 류우가의 발에 몸을 비벼도 어지간히 상심했는지 숙여진 고개는 올라오지 않았다. 확실히 센토는 오늘 류우가에게 돌아온다고는 했지만 어째서 그게 만나자는 약속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냐면 너무나 자기에게 좋은 형편이 아닌가. 이쪽 입장에서는 문자 보내는 걸로도 조금 긴장했을 정도인데. 그런 상대가 만나고 싶어서 만나러 와 준 것이다. 오늘 가게에 안왔으면 어쩌려고!
아-아, 진짜! 센토의 갑작스런 외침에 흠칫 하고 떠는 몸도 귀엽다. 조심스럽게 올려보는 작은 머리는 큰 손에 가로막혔다. 지금 이 얼굴 보이면 큰일이다. 정말 최악이니까. 갑작스러운 상황을 따라가지 못해 굳은 류우가의 머리를 마구 뒤섞으며 센토는 큰 한숨을 내쉬었다.
- 세, 센토?
- 괜찮아. 나도 만나고 싶었으니까 어서와, 라고 하고 싶지만 기다리고 있다고 연락은 줄 수 있었잖아?
- 어, 어? 그러게?
- 하여튼 이 바보.
- 바보 아니거든!
- 그럼 반죠, 우리가 못 만난 지 며칠이 됐지? 날짜는 셀 수 있지?
- 뭐? 셀 수 있어! 어, 5일?
- 좋아.
꽃을 떠올리게 만드는 사람에게 꽃을 주는 건 꽃을 파는 사람에게는 당연한 일이겠지. 센토는 류우가의 머리에서 손을 떼고는 꽃들을 정리해놓은 곳으로 성큼 걸었다. 계절에 맞지 않는 꽃들이 아직 남아있다. 특별 주문으로 모처럼 멀리서 수입해 온 귀한 꽃들이지만 어차피 납품기한은 넉넉하니 사와타리 씨에게 부탁하면 되겠지. 스스로 바보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센토의 손은 거침없이 꽃을 뽑았다. 너를 위한 꽃은 아니었지만 너를 위한 꽃이 된 이상, 주인에게 줄 수밖에 없다. 꽃은 본래 꽃일 뿐 어떠한 의미도 없다. 그저 씨앗의 전 단계라고 볼 수도 있다. 꽃에 의미를 주는 건 인간, 오로지 어리석고 마음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뿐이라서.
- 자.
평소보다 무뚝뚝하게 목소리가 나오는 건 봐줬으면 좋겠다. 얼떨떨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류우가의 손에 쥐어주고 나서야 센토는 류우가에게 꽃다발의 형태로 준 것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작약과 안개꽃과 오늘의 류우가를 말하는 꽃으로 풍성하게 꾸며진 제대로 된 꽃다발. 꽃은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니지만 한 송이와 다발은 부여하는 의미가 다르다. 이제야 눈치 챈 스스로에게 민망하면서도 이미 건네 준 이상 끝난 일이다. 센토는 난방 탓인지 꽃다발이 부끄러워서인지 혹은 자신의 생각대로 흘러가는 마음이 있을지 모르는 붉은 얼굴을 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 어서와, 달리아.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센토는 별 일이 없으면 반드시 하루 한번은 가게를 열었다. 덕분에 늘어지던 겨울 일에도 제법 속도가 붙어서 지갑은 좋다. 돈은 벌 수 있을 때 바짝 벌어야 한다는 사와타리 씨와 그 일당들이 자부심 넘치는 얼굴이 이제야 조금 이해가 간다. 물론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건 센토가 이 추운 겨울, 눈도 오는 최악의 날씨에 가게를 여는 이유는 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추워! 너무 추워!!”
“눈 너무 오더라. 어서와, 메리골드.”
찬바람이 불고 가게 문이 닫힌다. 부지런히 옷에 묻은 눈을 터는 류우가를 보며 센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에 묻은 눈은 분명 단순한 이 아이는 못 보고 있을 테니까.
네 송이, 개나리
자, 실험을 시작하자. 필 것인가, 질 것인가.
곧 나간다는 목소리는 꽤 당황하고 있었다. 그럴 것이다. 지금까지 센토와 류우가는 주로 꽃집에서 만났으며 개인적으로 만난 적도 있었지만 적어도 집 근처까지 찾아온 적은 없었다. 집을 알고 있는 건 몇 번 데려다 준 적이 있어서였지만 설마 이렇게 불쑥 찾아올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겠지. 천천히 나와도 된다는 말을 남기고 센토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눈이 내리는데도 바람이 차고 추웠다. 전화를 할까 말까 고민한 시간까지 포함하면 한 시간 정도는 서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제 어쩐다. 연락도 했으니 5분도 안돼서 류우가는 이곳으로 달려 나올 것이다. 그러니 지금이 마지막 기회가 된다. 손에 들린 건 실험의 결과이며 내기를 위한 도구. 사실 지금이라도 이걸 버리고 적당한 변명으로 평소와 같은 나날로 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강직하지만 순진하고 남을 믿을 줄 아는 좋은 녀석이니 다소 어설픈 제 말에도 맞춰줄 것이라 생각한다. 아니면 편의점에서 무언가 사와도 좋다. 일상과는 분명히 다른 당혹스러운 만남이지만 큰 탈 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있을 정도로 서로의 거리는 분명 가까웠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손에 있는 꽃다발은 버리는 쪽이 앞으로도 좋을지 모른다.
정말로?
아니.
단호하게 나오는 자신의 마음에 센토는 헛웃음을 지었다. 평소 만들던 것과 달리 소박하고 거친 꽃다발을 손에서 놓는 일은 마음이 도저히 허락해주질 않을 것 같다.
커지는 마음에 시작한 실험이었다. 지면 그걸로 끝내고, 피면 말하자. 쌓여가는 마음을 결정하는 것 치고는 우스운 일이었지만 사와타리로부터 묘목을 구했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차를 끌고 농장으로 달렸고 뭐 이런 걸 이제 키우냐는 말에도 동료인 키바를 소개받으며 열심히도 키웠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한 때 천재라 불리던 머리는 한 겨울에도 피지 않는 꽃을 훌륭하게.
“센토!”
기다리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집에서 정말 급하게 나왔는지 잠옷에 점퍼만 걸치고 뛰어오고 있었다. 뛰지 마, 넘어지면 어떻게 해. 눈도 많이 오는데. 그렇게나 나를 보러 오는 게 급했을까 생각하면 웃음이 나왔다. 추운 겨울에 나오는 것도, 누군가를 기다린 적도 없었지만 이런 느낌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 정말로.
“또 춥게 나왔네. 따뜻하게 입고 나오라니까. 늦게 나와도 괜찮다고 했는데.”
“아니, 센토가 기다리고 나도 집 앞이고…. 그런데 이런 시간에 갑자기 무슨 일이야? 뭔 일 있어?”
“응. 주고 싶은 게 있어서.”
“선물? 어? 근데 나 경기 우승 꽃다발은 받았잖아.”
시야가 아래로 향한다. 원래 꽃다발로 만드는 꽃도 아니고 가지에서 피는 꽃이기 때문에 가지를 꺾어 만든 다발은 크고 거칠어 숨길 수 있을 만한 크기가 되지 않았다. 애초에 샛노란 포장지가 흰 눈에 비하면 눈에 띌 수밖에 없다. 직접적으로 언급을 받으니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다. 센토는 한 손으로 가지고 있던 꽃다발을 양 손으로 안았다.
이걸 주면 너는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준 모든 꽃을 너는 기억할까. 기억하지 않아도 좋다. 그 꽃이 무슨 의미로 너의 이름이 되었는지 몰라도 좋다. 꽃이 너에게 한번이라도 웃음을 짓게 했다면 그 꽃은 시들 가치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주고 싶은 게 있어서.”
꽃이 피어나는 시기는 아는데 마음이 피어난 시기는 모른다. 하지만 꽃도 마음도 피어나면 안다. 알게 된다. 그것을 너로부터 배웠다. 그러니 이건 처음 너에게 줬던 그 때와 같을지도 모르겠다.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작은 꽃집으로 충분히 살던 내가 조금은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막연한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닌 한사람에게 걸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준 너에게의 감사이기도 하다.
“나의 꽃, 나의 개나리에게.”
우연인지 운명인지 처음 류우가에게 준 것도 노란 꽃이었다.
* 유채: 쾌활
* 디디스커스: 아이
* 페튜니아: 마음의 평화
* 작약: 수줍음
* 달리아: 당신의 마음을 알아서 기쁩니다.
* 안개꽃: 기쁨
* 메리골드: 반드시 오는 행복
* 개나리: 희망, 기대, 나의 사랑은 당신보다 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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