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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꿈인가 하노라

 



 

 

1.

 

. 버둥대는 몸을 감당하기에 침대는 작았고 행동은 컸다. 류우가는 왼팔의 격심한 통증에 눈을 떴다. 가뜩이나 부러져 아픈 팔 쪽으로 떨어졌으니 말할 필요가 있을까. 아침부터 운이 없으려니. 떠지지 않는 눈을 멀쩡한 오른손으로 비비자 잠에 퉁퉁 부었던 눈이 떠졌다. 구겨진 옷들, 어지럽게 쌓인 스포츠 잡지들과 작고 낡은 텔레비전. 먹고 남은 컵라면. 류우가는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다. 어딘가 청결하지만 온기 없고 딱딱한 과학실 같은 곳이 아니라 작고 생활감 넘치게 꼬질꼬질한 이 방이 제 집이고 제 생활이며 일상인 것이다.

 

잠에서 깬 순간, 류우가는 지금까지 본 모든 것이 꿈이었음을 알았다.

 

 

 

 

 

2.

 

때려눕혔다고? 그 스매시라는 괴인을? 류우가가? 맨손으로?”

당연하지! 질 수도 없었지만, 질 것 같지도 않았다고!”

 

시합 때 두 동강이 난 왼팔을 대신해 오른팔로 파이팅을 외치자 그녀는 가는 손으로 박수까지 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힘든 병원 치료 사이에 웃을 수 있는 틈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류우가는 눈물을 훔치며 깔깔 웃는 카스미의 등 뒤로 떨어진 담요를 주워 걸쳐주었다. 기분전환 하는 건 좋지만 몸이 식어 아프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이제 완전히 정례화 된 꿈 이야기는 사실 반은 우연이고, 반은 별 수 없었다. 몸이 약하고 병치레가 많아 긴 시간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카스미에게 가장 기대되는 일은 류우가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다. 당연히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류우가는 언제나 화젯거리를 고민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훈련과 싸움으로 지내는 자신의 생활은 그녀에게 난폭하고 잔인하다. 아픈 이에게 일부러 아프게 되는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다. 그러다 어느 날 꾼 꿈. 괴물이 나오고 그 괴물과 싸우는 전사가 나오는, 한 때 어린아이들이 보는 영웅상을 그린 듯한 내용.

 

위기의 상황에서 날아서 등장한 거야? 굉장하다.”

, 좀 늦기는 했지만 영웅이라면 그렇게 등장하는 게 폼 나지.”

맞아. 류우가가 그 영웅은 아니지만.”

별 수 없잖아! 아무리 꿈을 꿔도 그렇게 안 나오는데!”

 

다른 거라곤 거기서 나오는 영웅은 자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왜 자신의 꿈임에도 이러한 처사인지 류우가는 그 점이 늘 억울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꿈에서 자신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어 제대로 밖에 돌아다니는 것도 어려운 처지였다. 사방이 적으로 가득한 꿈속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도운 것이 바로 그였다. 여러 모습으로 변신해 다양한 방법으로 스매시를 물리치는 남자. 사실상 꿈의 주인공이었다. 어째서 자신의 꿈인데 주인공이 다른 사람이냐고.

 

나는 괜찮다고 생각해. 류우가는 류우가답게 있는 거잖아?”

그런가?”

. 분명 그럴 거야.”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류우가를 제일 잘 알 카스미가 말하니 그럴 것이다. 어서 다른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는 힘없는 재촉에 류우가는 머리를 긁적이며 꿈에서 본 또 다른 세상의 일상을 이야기했다. 사실은 인간이었는데 인체실험을 당해 변한 스매시라는 괴물, 세 개로 나뉜 나라와 전쟁이라도 날 것 같은 긴박한 정세. 이상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네모난 상자와 사람을 구하는 영웅. 히어로.

 

. . 그러니까.”

역시 이번에도 기억나지 않는 거야?”

.”

 

일순간 말이 막혔다. 몇 번이나 있는 일이었다. 꿈에서는 그렇게나 자연스럽게 부르던 이름이 눈을 뜨면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른 이들의 이름은 제법 기억이 났지만 아마 꿈에서 누구보다도 불렀을 남자의 이름만은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덕분에 매번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도 종종 이렇게 말이 멈추고는 했다. 얼굴이며 성격이며 꿈 치고는 참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데도 말이다.

히어로로 변신하는 남자는 류우가의 기준에서 말하자면 굉장히 이상한 사람이었다. 머리가 무서울 정도로 좋은 남자였지만 싸움에 능했고 여유가 넘치는 반면 언제나 쫓기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불안정한 사람이었다. 상반된 이미지가 잘도 결합한다 싶지만 남자는 히어로로 변신할 때도 그랬던 것 같다. 잘 웃었고, 무언가를 흔들었다. 다양한 색이 있었던 것 같은데. 류우가는 멍하게 자신의 빈 오른손을 보았다. 손에 잡히는 정도는 크지 않다. 주머니에도 잘 넣고 다닐 정도로. 작은 그걸 벨트에 넣어 변신을 했는데, 그 변신하는 폼 중에서 그의 이름과 닮았던 것이 있다는 게 불현 듯 떠오른다. 그게 뭐였지?

 

류우가?”


언제나 제대로 듣는 카스미의 목소리를 놓친 것도 여러 날 반복해서 꾸는 꿈의 힌트가 처음으로 나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류우가는 그녀의 부름도 듣지 못하고 중얼거리며 남자의 여러 가지 변신 폼의 이름을 떠올리려 애썼다. 방금 전까지 카스미에게 말하던 이야기는 남자와 류우가가 함께 싸웠던 때였다. 수상한 상자를 빼돌리는 상대를 저지하기 위해 올라왔고 당하기 직전 하늘에서 남자가 내려왔다. 기계와 생물체의 결합이라는 조합을 알려준 건 류우가 자신이었다. 빙글거리며 돌아가는 무기를 남자가 뭐라고 말했다. 개틀링. 호크? 이건 아니다. 남자의 이름은 한자를 알았을 때, 웃었는데.

 

류우가!”

, ? 불렀어, 카스미?”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부르는 것도 못 듣고.”

아니, 뭔가 그 이름이 생각날 것 같아서. ?”

전에 이야기 했지? 나를 담당하시던 카츠라기 선생님이 개인 사정으로 다른 병원으로 가셔서, 새로운 분이 내 담당의가 되셨다고. 지금 류우가 뒤에 인사 오셨어.”

?! 그럼 진작 불렀어야지!”

 

불렀는데. 작은 목소리의 불평은 기겁하고 놀라 일어난 류우가의 기세에 밀려 넘어진 의자의 소음에 묻혔다. 당황하는 두 사람에게 의사는 웃음 섞인 목소리로 진정하라 말한 후 넘어진 의자를 바로 세웠다. 아까와 같은 위치에 선 의자의 선을 따라 류우가의 시선도 위로 올라 자신보다 약간 작은 의사에게 닿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오구라 카스미님과 보호자님 맞으시죠? 저는.”

이 자식?”

류우가?!”

?”

 

. 내가 무슨 소리를. 스스로 말하고도 기가 막힌 말에 류우가는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경악하는 카스미의 외침이 귀에 닿기도 전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었다. 무례에도 정도가 있지 처음 본 사람의 면상에 대놓고 이 자식이라니! 의사한테! 심지어 시비를 건 것도 아니고 의사는 정중하게 자신의 소개를 하던 중이었다. 미치겠네. 얼굴에 오르는 열에 고개를 드는 것이 부끄러웠지만 그보다 이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앞으로 카스미의 치료를 담당할 중요한 사람이다. 자신의 실수로 행여나 그녀에게 불이익이 생기도록 할 수는 없다. 그리고 분명하게 잘못한 건 자신이다. 다시 한 번 정중하게 사과하기 위해 얼굴을 올림과 동시에 풋, 하며 웃음소리가 샜다. 누구한테? 인사를 하고 있을 뿐인데 대놓고 이 자식이란 소리를 들은 의사한테다.

 

, 죄송합니다. 그게, 하하. 인사하다 이런 소리를 들을 줄 몰랐더니.”

 

의사는 정말로 의외라는 듯 한쪽 눈썹을 올리며 웃고 있었다. 불편하거나 화가 난 기색은 없었다. 당황한 류우가와 카스미를 두고 의사는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그 뒤로도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 최악이다. 환자분과 보호자님 앞에서 이러면 안 되는데. 의사는 그리 말하며 빙긋 웃었다.

 

다시 소개합니다. 오구라 카스미님의 담당의가 된 키류 센토라고 합니다.”

 

의사키류 센토의 말에 류우가는 다시 한번 급히 고개를 숙였고 카스미도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하다는 류우가의 말에 그러지 마시라고, 환자분들을 걱정하면 종종 감정이 올라오는 경우가 있다며 그가 웃었지만 류우가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사람의 마음을 풀어주는 장난스러운 미소. 그리고 이름. 키류 센토. 센토(戦兎). 전차와 토끼. 기계와 생물의 결합. 변신 폼으로 대충 지었냐며 당사자가 화를 냈던 바로 그 이름.

 

그가 바로 꿈에서 봤던 히어로였다.

 

 

 

 

3.

 

이렇게 보면 그저 부끄러운 첫인상 정도로 끝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꿈에서도 나올 정도의 인물이 그렇게 가벼운 인연일 리가 있을까.

 

반죠. 듣고 있어?”

? 미안, 못 들었어. 뭐라고 했지? 키류.”

카레 좀 더 매워도 되냐고.”

어어, 상관없어.”

먹고 울지나 마라?”

 

부엌에서 얼굴을 내밀며 묻는 질문에 질색하며 손을 흔들자 다시 가볍게 웃는 얼굴로 바뀐다.

지금 있는 곳은 키류 센토의 집. 그렇다, 현재 반죠 류우가는 그의 방에서 그와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둘이 이웃이기 때문이다. 류우가는 언제나 카스미의 병원 근처에 방을 빌려 생활하고 있었는데 최근 꽤 오래 비워두었던 옆방으로 이사 온 것이 바로 의사, 키류 센토였다. 새로 이사를 왔다는 인사를 듣자마자 어째서 의사가 이런 낡은 곳에 오냐는 두 번째 무례는 차마 카스미에게 말하지 못했다. 참고로 당시의 대답은 취미생활에 돈을 많이 투자하는 편이라 가까운 곳에 살고 싶다는, 꽤나 인간적인 말이었다.

 

편하게 불러도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건만. 내 이름이 마음이 들면 든다고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다고? 반죠.”

됐다고. 말했잖아, 그냥 아는 사람이랑 네 이름이랑 같아서 실수하는 거뿐이니까.”

신기하단 말이지. 내가 말하긴 그렇지만 이런 한자조합이 많지는 않을 텐데.”

 

그야 꿈속에서의 너니까요. 그렇게 말을 할 수 없으니 류우가는 입을 다물었다. 키류 또한 답을 바란 건 아닌지 이내 끓이던 카레에 집중했다. 둘 다 맵게 먹는 입맛은 아니지만 가끔 일이 풀리지 않거나 마음에 들지 않을 때의 그는 조금 화끈한 음식을 찾곤 했다. 이젠 완전히 자신 전용이 된 쿠션을 품에 안고 새삼스럽게 익숙해진 그의 방을 둘러보았다.

키류가 사는 방은 방 두 개를 터서 아마 이 건물에서 가장 넓은 방이다. 그러나 그게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물건이 많았다. 한 쪽엔 취미 중 하나인 건프라로 가득하고 책장에는 봐도 비싸 보이고 알 수 없는 외국어로 쓰인 의학서로 가득이다. 듣기로는 창고까지 하나 빌려서 거기에 물건을 놓는다는데 물어보진 않았지만 사실이겠지. 이렇게 보면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굳이 여기가 아니어도 가까운 좋은 오피스텔도 많을 텐데 왜 하필 여기일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아무렴 어떤가.

 

뭘 그렇게 봐?”

건프라. 그사이에 늘었구나, 해서.”

한정판이 나와서 그만.”

더 놓을 곳도 없네.”

장식장을 하나 더 살까봐. 그러려고 이 집에 온 거고.”

돈도 많다.”

의사잖아. 보통 의사도 아니고 무려 천재, 의사.”

그래, 너 천재다.”

진심을 담으라고, 격투가.”


장난 같은 대화. 잘못 들으면 아니꼬운 말도 스스로에게 당당하고 또 그만한 기반이 있는 사람에게서 들으면 웃음이 나온다. 물론 그건 두 사람의 관계에 어느 정도 신뢰관계를 구축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류우가는 예고대로 맵게 나온 카레를 너무 맵다며 화를 냈고 키류 또한 최악이라며 함께 웃었다.


자신의 무례와 함께 시작된 관계는 의외로 좋은 인연이 되어 돌아왔다. 카스미는 새로 바뀐 담당의가 전 담당의였던 카츠라기 선생님만큼 잘 보살펴준다며 웃었다. 확실히 안색이 많이 좋아졌으니 류우가를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은 아니다. 또 어려운 말과 치료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을 위해 쉬운 말로 상세하게 현재 상태를 설명해주는 태도에서 좋은 의사임을 느낀다. 그만큼 류우가는 감사함과 민망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쩌자고 이런 좋은 선생님에게 만나자마자 그런 소리를 했을까. 덕분에 종종 마주칠 때마다 류우가는 쩔쩔맸고 그런 제 심정을 모를 리 없는 키류 또한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생활반경이 같고 서로가 아는 사이라는 건 마주치는 일이 많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어떻게든 해야 할 텐데. 그렇게 머리를 감싸 쥐던 어느 날이었다.

 

- 내가 아니라니까!

- 증거가 나왔으니까 확인을 해야 합니다!

 

평소 자주 가던 마트에서 벌어진 실랑이. 계산을 마치고 나가려던 류우가가 직원에게 잡혔다. 무슨 일인가 싶어 순순히 다시 가게로 들어왔더니 다짜고짜 도둑이라고 잡혔다. 말도 안 된다고 방금 계산하지 않았느냐 하며 가방을 엎는 순간 모르는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이런 건 넣지 않았는데. 그 순간 떠오르는 건 어이없게도 그간 꾸던 꿈이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아무도 믿어 주지 않는다. 주변에 떠오르는 의심의 시선들은 도와주지 않는다. 무고함도 억울함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세계가 전부 저를 부정하고 밀어냈다. 누구도 자신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 아닌데?

 

단 한사람을 제외하고.

 

- 이 사람 범인 아닙니다.

 

잡혔던 어깨는 누군가의 위로 올려치는 손길에 풀려났다. 류우가는 이 순간이 꿈이 아님을 알았지만 실감이 나지 않아 뒤도 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 뒤이어 나타나는 갈색의 코트나 저 혼자 익숙할 옆모습이 이것은 분명 현실임을 나타냈다. 모두의 시선이 갑자기 나타난 그에게로 향했다. 류우가 또한 아무런 말도 못하고 바라보았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저렇게 태연히 웃지 못한다. 하긴 애초에 모두가 의심하는 이 상황에서 당당히 아니라고 말도 못했겠지. 그렇게 남자는 당당히 류우가의 죄를 부정했다. 마치 꿈속의 히어로처럼.

 

- 그게 무슨.

- 생각을 해보죠. 이 마트는 그리 큰 규모는 아니니 보통 동네장사를 하죠. 맞죠? 그럼 이용하는 고객은 어느 정도 고정적입니다. 흔히 있잖아요, 다들 아는 사이. 그런 곳에서 도둑질을 한다? 자주 이용하는 사람이? 물론 잘 아는 만큼 허점도 보이겠지만 그런 위험수당을 감수하면서 훔친 물건치고는 너무 사소하지 않나요? 가위, , 립크림, 뭐 이런 거네. 이거 해봤자 얼마나 된다고. 보아하니 이 사람이 산 물건들이 더 비싸잖아요. 그런 사람이 뭐가 아쉽다고 이런 걸 훔쳐. 안 그래요?

- , 그건.

- 게다가 보세요. 이거야 말로 이 사람이 가져갈 리 없는 물건인데.

 

순식간에 주변을 말로 눌러버린 키류는 당당히 가위를 들어올렸다.

 

- 이거 왼손잡이 용인데. 이 사람이 이걸 가져갈 거 같습니까? 설사 왼손잡이라고 해도 현재 그 왼손이 부러져서 깁스를 하고 있는 사람이? 나 같으면 오른손잡이 가위를 사겠어요. 왜냐면 집에 이미 쓰던 가위가 있을 테니까.

 

-무 이상하지 않나? 그의 말에 아무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말에 틀린 점이 없었다. 다만 뒤늦게 상황을 알고 나온 가게 주인만이 꼭 사람은 물건이 필요해서 훔치는 것이 아니라는 말에 감시카메라는 둬서 뭐하냐는 대답만 돌려받았다. 키류는 아무런 말도 못하는 주변을 보며 바로 옆에 있는 류우가만 알아차릴 정도의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 제가 이렇게 말해도 이미 물적 증거가 있는 이상 사장님께서도 쉽게 물러나시기 어렵다는 걸 압니다. 이렇게 하죠. 사장님의 생각대로 일단 경찰을 부릅니다. 그리고 함께 감시카메라를 판독하도록 하죠. 그리고 여기 이 분께서 아닐 시에는 제대로 사과를 하세요.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에서 도둑 취급을 받았는데 그 자리에서 해결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 만약 이 사람이 정말 범인이라면 어쩌겠나.

- 그러니까 내가 아니!

- 공범자로 같이 넘기세요.

- ?!

 

키류의 태연한 말에 모두가 술렁거렸다. 경악하지 않은 건 말을 꺼낸 본인뿐이었다.

 

- 됐습니까? 그럼 하나 더. 처음 이 사람을 붙잡은 직원을 잡으세요. 그 사람이 범인일 테니까. 나 참, 뒤로 메는 백팩에 뭐가 들어갔는지 어떻게 알고 잡는데? 진짜 봤으면 그 자리에서 잡았겠지.

 

확인사살 같은 마지막 말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점차 흩어졌다. 작게 웅성거리는 말은 대부분 키류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는 듯 하니 평판엔 큰 영향이 없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랬다.

그 후는 일사천리였다. 당당히 모든 이의 앞에서 말한 것처럼 감시카메라를 확인했고 실제로 그 직원이 류우가가 다른 물건을 살 때 몰래 넣은 것이 확인되었다. 거 보라며 의기양양한 그의 태도에 어째서 이 사람이 이렇게 당당할까 싶기도 했지만 꿈속의 남자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 생각나 이상하진 않았다.

 

그때 진짜 경찰한테 잡혀가나 했는데.”

그러게 말이야. 가위가 있어서 살았다니까.”

?”

 

언제까지고 어색하던 사이가 결정적으로 무너지게 된 사건을 추억삼아 맥주를 들던 손이 멈췄다. 감동적이게 마무리 되려던 분위기가 이상해진다. 류우가가 인상을 쓰자 키류는 큭큭 웃으며 얼마 남지 않은 맥주 캔을 흔들었다.

 

아니. 사실 몰랐거든. 네가 무슨 물건을 훔쳤다고 하는지.”

?! 그런데도 일단 아니라고 들이댄 거야?!”

어쩔 수 없잖아. 사람이 너무 많아서 뭐 보이지도 않았다고. 그냥 네 목소리나 다른 사람들 목소리가 들려서 상황 파악을 했을 뿐이야.”

바보냐, ?! 진짜 대책 없다! 좋은 머리가지고 왜 그런 짓을 했냐!”

바보인 너한테 듣고 싶지 않거든? 그리고 네가 훔칠 리가 없잖아. , 혹시 진짜 훔쳤어?”

안 훔쳤어!!”

그럼 됐네.”

 

뭐가 문제냐는 얼굴에 잔뜩 뭔가 치밀어 올랐지만 애석하게도 류우가에게는 그 감정을 풀어낼만한 말재주가 없었다. 태연하게 말하는 그에게 오히려 힘이 빠져 류우가는 상 위로 엎어졌다. 그러고 보면 꿈에서도 힘의 관계는 이랬던 것 같다. 한 번도 이기지 못했지. 오히려 언젠가 솔직하게 말한 적도 있던 것 같다. 조금은 질투했다고.

 

믿었으니까.”

 

그리고 늘 그렇듯 키류는 웃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 언제나 오구라님에게 그렇게나 정성을 쏟는 걸 내가 보는데. 병원에서 거의 나가지 못하는 여자친구를 위해 열심히 꿈 이야기를 하고 바깥 이야기를 해주는 바보 같은 사람이 무슨 물건을 훔친다고. 너는 확실히 머리는 좀 아쉬운 바보지만, 그런 걸 할 녀석이 아니야. 차라리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서 필요하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몰라도.”

 

설명은 이걸로 끝. 빨리 집으로 들어가라는 핀잔과 함께 키류는 아직도 일어나지 않는 류우가의 머리를 뒤섞고는 빈 캔과 접시를 들고 일어났다. 아마 그대로 목욕이라도 하고 잘 것이다. 하루 이틀 만나고 있는 게 아니며 애당초 바로 옆집이다.

이 얼굴과 이 이름을 가진 남자는 전부 다 이런가. 아니면 이 얼굴과 이 이름을 가진 남자에게 도움을 받는 게 제 팔자인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는 얼굴의 남자, 직업은 의사, 이름은 키류 센토라 하는 그에게 류우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4.

 

굉장히 순조로운 삶이라 생각했다. 부러진 팔은 큰 이상 없이 치료되고 있다. 훈련을 쉬는 것이 조금 걱정이지만 괜히 어설프게 힘을 썼다가 망가지면 의미가 없으니 여기는 의사의 권고대로 푹 쉬고 있다. 카스미는 아직 돌아다니지는 못하지만 휠체어를 타고 바깥 산책은 허락될 정도로 몸 상태가 나아졌다. 그 덕분인지 원래도 잘 웃었지만 최근엔 정말 꽃이 피듯 웃음을 짓는 일이 늘었다. 그보다 기쁜 일이 있을까.

 

그래서 류우가 혼자 떨어진 거야? 아하하! 드래곤인데!”

날개가 없는 걸 어떻게 해! 보틀도 없고! 그 전에 나는 다른 보틀을 못 쓰니까!”

류우가는 드래곤보틀만 사용해서 변신한다고 했지. 그게 더 대단한 거 아냐? 정말 류우가만을 위해서 만들어 준 거잖아.”

 

좋은 사람이구나.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미소에 류우가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온건하고 조용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왜 옛날엔 못 견디고 낯간지러웠는지 이제는 잘 알 수가 없다.

이거 영광인데.”

 

물론 늘 그렇지는 않지만. 류우가는 어느새 열린 문에 서있는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신만만한 웃음과 당당한 태도. 하필이면 오늘 꿈에서 히어로는 병원에 잠입하기 위해 의사로 변장했던 터라 마치 꿈에서 그대로 나온 것만 같다. 혀를 차는 류우가의 모습에 키류의 입가에 머문 미소가 진해졌다.

 

안녕하세요, 오구라님. 오늘도 반죠가 제 이야기를 하고 있던가요?”

안했어.”

. 오늘도 류우가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이런. 반죠, 꿈에서조차 나를 떠올릴 정도로 생각해주는 네 마음은 기쁘지만 그럴수록 나는 오구라님을 어떤 얼굴로 봐야 할까?”

안했다고!!”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그건 꿈속의 키류 센토이며 네가 아니고, 카스미도 그 점은 부정해줬으면 좋겠지만 정작 말을 들어야 할 두 사람은 이미 자기들끼리 신나게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물론 이야기의 주제는 자신이 열심히 설명해주는 꿈 이야기다. 류우가는 양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둘 다 그만 좀 해. 죽이 맞아도 너무 잘 맞잖아. 그 모습에 두 사람의 웃음이 터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셋이 친해지기까진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일단 류우가와 키류가 바로 벽 하나를 두고 밥도 먹으며 오가는 이웃이고 키류의 담당환자가 류우가의 연인이다. 나이도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는 점도 한몫했고 무엇보다 본래 연구원에 가까웠던 키류의 담당환자는 카스미를 제외해도 몇 명 되지 않아 환자 개인에게 투자하는 시간이 길다. 가벼워 보이는 외모와 달리 환자들과 능숙하게 교류하며 소통하는 의사인 그와 키류 센토라는 히어로가 나오는 꿈을 좋아하는 카스미가 만난 이상 이야기가 전해지는 건 당연한 결과. , 셋이 만나면 그 화제로 이야기꽃이 피고 자신은 신나게 그 수치를 감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것이다.

 

언제나 죄송하네요, 제가 반죠의 마음을 가져가버려서 말이죠.”

어쩔 수 없죠. 선생님은 류우가의 히어로이시니까요. 저는 괜찮아요.”

정말, 반죠가 이름이 비슷한 사람이 있다고 했는데 설마 꿈에서 나온 저일 줄이야.”

꿈은 너 만나기 전부터! 꿨다고! 너 아니야!!”

선생님도 히어로도 두 분 다 굉장하다고 생각해요. 류우가를 많이 도와주시고.”

그렇죠? 역시 저는 어디서든 굉장하고 대단하고 천재적인.”

스스로 그런 말이 나와?! 그리고 넌 왜 자꾸 내가 꿈 이야기 하는데 오는데?”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그야 나는 굉장하고 대단한.”

“1절만 해!”

재밌잖아.”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안약을 꿈속의 보틀처럼 흔드는 키류를 보며 류우가는 말없이 오늘도 양쪽 다른 색의 스니커즈를 밟아주었다. 사실 류우가도 이런 사소한 대화나 싸움이 싫은 건 아니다. 친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사는 세상이 다른 사람임에도 터놓고 지낼 수 있는 건 키류가 처음이었다. 배움도 짧고 생각도 단순한 자신을 보며 웃고 놀려도 무시하거나 쓸모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의사로서도 친구로서도 키류 센토라는 인간은 정말이지 좋은 사람이었다. 꿈이나 현실이나.

 

반죠! 아프잖아!”

내가 그거 하지 말랬지!”

몇 번이나 말했지만, 이건 너 놀리는 거 아니거든? 이건 흔들어야 효과가 있어!”

그걸 왜 굳이 여기서 하는 건데!!”

너 보라고?”

놀리는 거 맞잖아!”

 

그저 조금 민망할 뿐이다. 당당하게 놀린다고 선언한 이의 다리를 걷어찼으나 애석하게도 키류가 일어나는 것이 빨랐다. 의기양양한 웃음이 얄미웠지만 류우가는 그 이상 특별히 말하지 않고 본인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연인사이며 치료의 과정이라고 해도 옷을 벗거나 하니 진찰 중에는 자리를 피해주고 있다. 오는 길에 마실 거나 사오라는 키류의 말을 타박하며 류우가는 완전히 병실 밖으로 나섰다.

 

 

설마 이게 안약으로 보일 줄이야. 비슷한 크기도 아닌데.”

 

류우가가 나간 후, 키류는 가지고 있던 보틀을 내려놓았다. 분명 방금 전까지 흰색의 약통이었던 것은 크기도, 모양도, 색도 다른 모습으로 그 모양을 드러내었다. 열고 잠글 수 있는 검은 마개 밑으로 견고한 모양은 마치 동물의 모양이 있는 것도 같다. 백의에 달려있는 명찰을 떼어서 보면 확실했다. 키류 센토. 센토(戦兎). 자신의 이름은 이 보틀에 새겨진 동물의 한자를 따와 이름이 만들어졌다.

 

그래도 이제 보이니까요.”

 

카스미는 손을 뻗어 래빗보틀을 손 안에 담았다. 이 작고 귀한 것을 되찾기까지 얼마나의 시간이 걸렸나. 누군가에겐 한순간이며 누군가에겐 평생을 건 일이었다. 마침내 그 끝이 다가왔다. 이것은 시작이며, 끝이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이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머지않았어요.”

그렇죠.”

다음일까요?”

아마도요.”

의미 없는 질문이었네요.”

 

침대에 앉아 깊게 고개를 숙이는 카스미에게 키류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처음부터 두 사람 다 알고 있는 답이었고, 따라서 두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 모든 일은 단 한사람을 위한 일이다.

키류는 한숨과 함께 가져온 차트를 넘겼다.

 

, 진찰을 시작할까요.”

 

 

 

 

 

5.

 

류우가는 이것이 꿈임을 알았다. 이젠 눈에 익은 공구들이나 사람 상체만한 토끼 인형. 안았을 때 제법 느낌이 좋았다. 여러 사람이 신세 지는 작은 침대와 컴퓨터도 보였다. 주로 센토가 사용하고 있어서 류우가는 그다지 손을 대지 않지만, 신세를 지게 된 후 자신의 생필품을 사도록 했기에 사용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류우가에게 현재 상황이 꿈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정보들이다.

다만 익숙한 상황과 달리 분위기는 익숙하지 않았다. 제 주먹이 벽을 쳤다. 아무래도 꿈속의 자신은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 뭐라고 말은 하는데, 제 입에서 소리가 나고오 있는데도 무슨 소리인지 잘 몰랐다. 다만 분노의 상대는 한 명이었다.

 

? 솔직히 그런 심정이었다. 솔직히 꿈이나 현실이나 처한 상황이 조금 다르지 인물들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부딪치는 이유는 이해할 수 있었다. 실제로 꿈에서 둘은 자주 싸웠다. 그리고 탈옥범이니 누명이니 살인범이니 상황 자체는 이쪽이 말도 못하게 안 좋은 이상 작은 자극에도 울컥하는 것 자체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다르다. 오늘의 꿈은 어딘가 심상치 않다. 미소라에게마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제야 류우가는 뭔가 제대로 잘못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일어나야해. 본능이 강하게 경고를 내리고 있었다. 이 꿈을 진행시켜선 안 돼. 더 이상 보면 안 돼. 그러나 그걸 알아도 일어날 수 있는 방법을 모른다. 기어코 꿈 속의 자신은 센토의 곁으로 다가갔다. 보고 싶지 않아. 그러지 마. 내가 입을 열게 하지 마.

 

- 네가,

 

말 하지 마.

 

- 카스미를 죽였어.

 

 

 

 

6.

 

류우가는 이 모든 것이 꿈임을 알았다.

 

 

 

 

 

7.

 

평소대로 병원에 도착했을 때, 카스미는 가만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문을 살짝 두드리자 돌아보는 얼굴에는 상냥한 웃음이 있었고 병약한 몸 탓에 언제나 덧없던 모습도 여전했다. 평소와 같은 일상이었다. 류우가는 왼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왼팔은 부러진 적이 없었다. 단단히 팔을 고정했던 깁스는 언제 있었냐는 듯 익히 아는 팔만 눈앞에 있었다. 고개를 들자 어느새 병원은 사라지고 병실도 사라져 남은 것은 류우가 자신과, 아름다운 벚꽃나무와, 그 아래에서 다정하게 웃고 있는 그녀가.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

 

카스미의 양 손에는 언제 주웠는지 벚꽃 잎이 한가득 담겨있었다. 이 작은 꽃잎을 하나하나 주워가며 그녀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나. 언제부터? 무엇을 위해? 도대체 그 꽃잎에 무슨 의미가 있어서?

 

알고 있었어?”

.”

키류도?”

. 우리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우리는 류우가의 꿈이니까. 카스미의 말에 류우가는 한숨과 함께 자리에 주저앉았다. 두 사람의 거리는 여느 때와 달리 멀었다. 그러나 이 거리는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것은 그저 꿈이었다. 처음부터 단 한사람의 꿈. 현실이라고 믿고 싶을 정도로 행복했던 꿈. 꿈이었다. 여기가 꿈이었다.

 

나는 왜 이런 꿈을 꾼 거야?”

 

정말로 행복한 꿈이었다. 미래를 생각할 수 있고 네가 살아있고 무엇 하나 불행한 일이 없는 완벽한 세계. 그래서 꿈이라는 것조차 잊었다. 이런 세계도 있었을지 모른다고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어서. 점점 떠오르는 현실과 무너지는 꿈 사이에서 류우가는 고통을 토했다. 어째서 알아버렸을까. 이대로 모른 척, 꿈이 현실이고 현실이 꿈인 척 살았다면 행복했을 텐데. 모든 걸 잊고 이대로 있을 수만 있다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하얗게 물들어가는 배경 사이로 그녀의 목소리만은 뚜렷했다. 류우가는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카스미를 보았다. 그녀는 양 손 가득 담고 있던 벚꽃 잎을 힘없이 모아진 류우가의 손 위로 올려주었다. 바람을 따라 몇 장의 잎들이 하늘로 날려 빛으로 사그라졌다.

 

그 안에 있었다.

 

괜찮아, 류우가. 너는 이미 알고 있어. 나는 알아.”

 

왜냐면 내가 너의 꿈이니까. 류우가는 마침내 제 손에 쥐어진 파란 보틀을 쥐고 울음을 터뜨렸다. 숙인 몸 위로 쓰다듬는 손길이 다정해서 소리를 질렀다. 이제 더 이상 닿지 못하는 손길이 서러웠지만 동시에 떠나보낸 그때만큼의 저밈이 아니라는 사실이 괴로웠다. 그래서 전부 알았다. 어째서 제 꿈이 그녀만을 남겼고, 그녀의 모습으로 제 앞에 서있는지 이제는 전부 알았다.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바로 눈앞에 서있었다.

 

카스미.”

.”

정말로 좋아했어.”

.”

정말로 나는 너를, 평생 사랑하고 싶었어.”


마침내 이루어진 고해에 다정한 웃음이 내렸다. 간신히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류우가는 오열했다. 그녀의 모습으로 나타난 제 꿈은 사랑이었고, 믿음이었으며, 죄책감이었다.

 

가슴이 아팠다. 평생을 믿었던 사람의 죽음이 너무 아파서 이대로 죽어도 괜찮을 정도로 슬펐다. 그렇게 한 번은 모든 것을 포기했었다. 사실 나는 너를 따라가고 싶었다. 그것도 괜찮을 거라고 분명 그 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멱살을 잡혀 앞을 보라고 한 이와 마주한 순간, 필사적으로 손을 잡고 당겨주는 이를 본 순간 그럴 수 없게 됐다. 발이 움직였다. 그 처절한 삶에, 강함에, 눈부심에 몸이 움직였다. 그 순간 다시 살게 되었다. 그 뿐이면 좋았다. 그것뿐이라면 얼마나 차라리 다행이었다. 함께 있으면서 옳은 길을 가기 위해 상처 입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 불안해졌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답답했다. 스스로가 무너지는 와중에도 남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녀석을, 도저히 두고 갈 수가 없게 되었다.

 

마음이 움직이고 있었다.

평생 단 한사람을 사랑하겠다고 한 그 마음이, 움직이고 있었다.

 

깨달은 것은 바로 편지. 앞으로 혼자서 살아가야 할 자신을 위해 남겨놓은 미래. 스스로를 위해 살아도 좋다는 말을 보고 나서야 멍청한 머리는 마음이 움직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서 이런 꿈까지 꾸게 된 것이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부정하고 싶어서 이런 꿈까지 꾸게 된 스스로에게 비참하고, 너에게 미안하고, 센토에게도.

 

류우가.”

 

그녀는 희게 물들고 있었다.

 

류우가는 말을 지켰어. 내 평생을 사랑해줬잖아.”

카스미.”

 

이것은 자신의 꿈이다. 결국 모든 것이 자신의 생각 나름이다. 그럼에도 고개를 들어 볼 수밖에 없는 것은 사랑하던 사람의 목소리였기에. 이젠 세상에 없는 그녀가 정말로 자신을 위해 해주는 말 같아서. 너라면 정말로 그렇게 말해줄 것 같아서.

형체가 거의 없는 흰 손이 내밀어진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제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지? 그 사람이 너에게 주었으니까.

 

잡은 손은, 생각보다 크고 단단했다.

 

 

 

 

 

8.

 

어이. 일어나. 류우가는 깨우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거의 24시간 켜있는 형광등에 눈이 부셔 이불로 얼굴을 가리자 옆구리로 푹 찔러오는 발이 있었다. 저도 모르게 밟힌 소리가 입 밖으로 빠지자 풋 하는 웃음소리가 발의 주인에게서 샜다. 그러니까 이런 점이 싫다고! 류우가는 이불을 냅다 집어 던졌다.

 

기껏 깨워줬더니 뭐하는 거야?”

내가 할 소리다! 깨우려면 곱게 깨우지 아침부터 밟고 난리냐, 너는!?”

아침 아니거든? 일단 어제 일이 많았으니 내버려두긴 했는데 너, 지하에서 산다고 이렇게 막 살면 큰일 난다, 전 격투가?”

툭하면 밤새는 네놈한테 듣고 싶지 않아!”

 

분명 어제 자기 직전에도 공구들 가지고 뭔가 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어지간히 깊게 잠든 모양이다. 아마 그대로 깨우지 않았으면 하루 종일 잤을지도 모르겠지만 천재 물리학자이자 반죠 류우가의 성질 긁기에도 천재적인 키류 센토가 그걸 둘 리가 없었다. 덕분에 완전히 머리가 깼다.

 

배고프다.”

이 근육바보는 일어나자마자 밥이네.”

불만이냐?”

아니? 안심했어.”

 

가늘긴 하지만 의외로 크고 단단한 손이 류우가의 머리에 닿았다. 가볍게 쓰다듬는 손길은 짓궂은 말과 달리 다정하고 상냥하다. 그제야 류우가는 어깨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절로 나오는 한숨에 센토가 한 번 더 웃었지만 타박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가끔 이렇게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부드러움이 민망해 심하게 반응해도 머리가 좋은 이 남자는 전부 알아듣지만, 그저 베풀기 위해 주어지는 호의에 매번 그러기도 미안하다. 일단 방금 새어나온 웃음은 진심이라는 걸 아니까.

 

아무튼 옷 갈아입고 밥 먹으러 올라와. 배고프니까.”

 

센토의 말에 시계를 보니 두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아침을 먹었어도 충분히 배가 고플 시간이다. 제 말만 하고 훌쩍 계단으로 올라가버린 센토를 보며 류우가는 아까와 다른 큰 한숨을 뱉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몫으로 사준 옷을 갈아입고 언제나 같은 자리에 둔 드래곤보틀까지 주머니에 넣으면 끝이다. 안 오면 네 몫까지 다 먹는다, 반죠-?! 작게 울리는 목소리에 간다고 일갈하며 류우가는 올라가버린 센토의 뒤를 따라 카페로 향했다.

 

 

 

 

 

 

9.

 

류우가는 그 모든 것이 제 마음이었음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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