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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녹(제윱, 윱제 편)
1.
처음 만난건 제갈량이 엄청 어렸을 때일거같음 3살? 정말 작았을 때. 자고 있는데 갑자기 찬기운에 몸을 떨자 목소리가 들렸지. 너무 어린데. 역시 안되겠다.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 그러나 그 누군가가 눈을 가렸기 때문에 보진 못함. 괜찮아, 잘자렴.
그리고 종종 커가며 제갈량은 이게 꿈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음. 워낙 머리가 좋기도 했고 이렇게나 반복적으로 보면 꿈이라고 보기도 어려웠으니까. 변명은 매번 달랐지만 어려서, 아파서, 아직 작아서 등등이었지만 결론은 아직 어려서. 어리다는건 어디까지? 다 컸다는건 또 어디까지지. 그런 고민을 가졌던 제갈량이었지만 중학교 쯤 갈 무렵부터 그런 꿈을 더이상 꾸지 않았음. 적당히 친구들도 생겼고(물론 제갈량이 친구라고 하는것은 서서뿐이다. 주유랑 사마의는 이를 간다) 확실히 그때보다 컸으니까.
그럼 결국 크면 오지 않는다는 거였을까. 가끔 제갈량은 어두운 밤 찬바람이 부는 날씨면 생각하곤 했음. 매번 이유는 달라도 마지막엔 제 눈을 가리며 잘자라고 해준 목소리는 역시, 다정했다고 생각했다.
제갈량이 그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된건 고등학교에 올라간 이후. 학교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에 어떤 여자가 씩씩거리며 옆을 빠르게 지나감. 뭐지? 하고 뒤를 보니 어벙하게 생긴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음. 커플싸움인가. 슬쩍 옆으로 비켰는데 찬아, 기다려~! 하며 들려온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남자의 옷을 잡았음.
어? 그가 뒤를 돌아봤고 제갈량은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았음. 하지만 놓을 생각은 들지 않았지. 오래전이긴 하지만 그 목소리를 내가 잊을 리가 없잖아. 제갈량이 확신을 가진건 눈이 마주치자 남자가 보기 쉬울 정도로 당황했기 때문에. 황급히 입을 벌렸다 다물었지만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신 누구야. 나를 알지? 대체 정체가 뭐야. 묻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지만 그보다 자신이 붙잡고 있던 손 위로 충격이 내려오는게 더 빨랐음. 갈라놓은 손날의 주인공은 앞서 걷던 여자였지.
- 차, 찬아.
- 입 다물고 따라와. 너도 갑자기 모르는 사람 옷 잡지 말고.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남자의 손을 잡고 빠르게 걸어서 골목으로 들어가버림. 제갈량도 쫓았지만 골목에 들어갔을 땐 이미 두 사람의 모습은 없었지. 그 사이에 어떻게? 그러나 크게 놀라진 않았음. 그게 인간이었다면 어렸을 적부터 그리 오진 않았을 테니까.
2.
제갈량은 당연히 유비의 대상자. 유비랑 공손찬은 저승사자. 그래서 제갈량을 데려가야 하는데 유비가 자꾸 놔주니까 공손찬이 속을 끓이는 것. 이러다 20살이 넘어가면 성인이 되며 안정적이게 되니 쉽지 않은데 이 녀석은 데려갈 생각도 안한다
- 제갈량이 가야만 하는 이유: 아직 나갈 영혼이 아니었음.
저승사자는 저마다의 영혼이 짊어진 죄가 있어서 하는 것. 그 죗값을 다 치뤄야 보통의 영혼들처럼 판결을 받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됨. 즉 저승사자들은 재판조차 받지 못한 자들임. 공손찬은 살인. 전쟁에 참가했던 여군이었음. 유비는 자살.
개인적으로 이거 생각하면서 젤 먼저 생각난건 자꾸 유비와 얽히려는 제갈량에게 경고하는 공손찬이었다
- 나는 네가 죽어도 살아도 관심이 없지만 널 위해서 유비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정작 네가 도움이 안되어선 어쩌라는 건데?
- 하지만, 나는.
- 까불지 마라, 산 것. 네가 아무리 대단한 영혼이었어도 결국 너는 산 것에 지나지 않아. 겹칠 수 없어.
공손찬과 유비는 둘다 이탈자 수습 담당. 저승사자는 여러업무를 하는데 크게는 수명이 다한자를 저승까지 안내, 귀신이 되어 패악을 부리는 악령처분, 그리고 명계에서 이탈하는 등 특수한 일에 연루된 영혼(이탈자)의 회수및 판단
공손찬은 궁금했다. 저승사자의 눈은 죄를 표시하는 창이다. 제 값을 치룰수록 붉은색이 벗겨지건만 저와 함께 오래도록 일한 유비의 눈은 처음 만난 그때나 지금이나 온통 붉었다. 어째서 그의 죄는 사라지지 않을까. 초반엔 그리 생각했었다. 죄가 사라지지 않는게 아니라, 죄가 너무 깊어서 사라지는 게 보이질 않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죄가 있기에? 사람좋은 얼굴에 워낙 이것저것 봐주긴 하지만 길에도 도리에도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
사인은 자살. 아주 오래 전에 죽은 사람. 사실 공손찬이 유비에 대해 아는 객관적 사실은 이정도였다. 사람이 좋다거나 그런건 주관적이니 배제한다면 정말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죽은 이는 변하지 않는다. 주관적 사실은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객관적 사실은 저거면 된다. 죽은 이에게 뭐가 더 필요한가. 그렇기에 오랜 시간을 같이 했어도 물어보지 않았고 애초에 그런 잡담을 길게 나눌 정도로 시간이 많지도 않았다. 인간은 언제까지고 욕망의 노예였고 싸움은 언제나 있었다. 둘의 업무배속은 예외영혼 인도였지만 통상업무 역시 함께 진행했다. 악령도 인간도 24시간내내 나타났고 죽었다. 공손찬은 저승사자가 죽은 인간이 하는 이유를 알았다. 아무튼 업무강도가 말이 아니었다. 이래서 다들 얼른 값을 치루고 가는구나.
그래서 아직 어린 이탈자의 영혼을 유비가 발견했을 때, 설마 그냥 놓아두고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 알았는데 그냥 하겠지 하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공손찬은 헤헤, 하며 웃는 유비의 머리통을 내려쳤다. 이리 때려도 어차피 죽어서 안죽는다. 결국 이 행위는 제갈량이 서서와 만나기 전까지 이어졌다. 공손찬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탈자는 불안정한 영혼이기에 자연스럽게 자신을 보호할 방법을 찾는다. 제갈량의 영혼이 선택한 것은 가호였다. 강한 영혼의 비호아래는 저승사자도 함부로 다가갈 수 없다.
서서는 강한 영혼이었다. 전생이 무엇인지 몰라도 빛으로 가득하여 누구라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충만한 영혼. 그 비호아래 제갈량이 있는 이상 건들 수가 없었다. 공손찬은 유비의 멱살을 잡았고 유비는 연신 사과를 반복했지만 괜히 오랜 시간 본게 아니다.
- 야, 유비. 너 쟤네가 만날 걸 알았지. 그래서 그렇게 기다린거지?
그러지 않고서야 계속 놓아준 이유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사연있는 영혼에 약한 것은 알았지만 이정도로 일을 놓은 적은 없었다. 결국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였고 그녀는 주먹을 날렸다.
4.
여기서 알아보는 저승사자의 설정
- 영혼이 갚을 정도의 깊은 죄가 있는 경우에 저승사자로 일하게 됨
- 반드시 검은 색을 하나 걸쳐야 한다
- 죗값을 치룰수록 눈에서 붉은 색이 벗겨진다
- 그들은 잘 필요도 먹을 필요도 없다- 그들은 죽은 자이나 아직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제 육신도 가지고 있고 산 사람들의 세상에서 지낸다. 다만 살아있는 인간들에게 인지는 되어도 기억되지 않기 때문에 인간세상에서 지내는 것에 문제는 없다.
- 육신이 있다 해도 이미 오래전에죽은 자들이라 물리법칙에선 벗어나있어 여타의 영체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생활도 가능하나, 업무 특성상 가지고 있을 뿐. 그냥 좀 단단한 영혼정도.
5.
잔뜩 혼났네. 유비는 터덜터덜 목적지로 향했다. 제갈량을 데려갈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 거리에 있는 악령을 수거해 조금이라도 공손찬에게 용서를 받을 수 밖에. 한때 많은 싸움이 벌어졌던 땅에선 지금도 다양한 원한들이 기어올라왔다.
- 그러니까 형님이 자꾸 놓아주니 그런거잖수! 그냥 처음부터 얘기하라고 내가 그랬구만!
- 어허. 형님이 다 생각이 있는 거지. 그리고 이러시는 마음도 모르지 않고.
우리 싸우지 말자... 양 손에 끼워놓은 반지의 보석들이 번쩍거렸다.많은 이들의 영혼을 데리고 있었고 풀어주었다. 이 둘을 제외하면 마지막까지 있었던 조조는 최근 결혼한 부부를 보고는 만족한 듯 명계로 돌아갔다. 이번 생에는 함께할 수 없겠지만 다음, 그리고 또 다음에는 알 수 없다. 아마 그때에도 자신은 저승사자 일을 하고 있겠지. 유비는 한숨을 한번 내쉰 후 발걸음을 멈췄다. 검은 늪이 독을 토해내고 있는 장면은 구경만 해본 지옥의 일부와 비슷했다. 그 편린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유비는 거기까진 알지 못했다. 어쨌든 아직 지옥으로 가라는 판결조차 받지 못한 몸이다. 언젠가는 갈 곳일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일 할 시간이다.
- 그럼 오늘도 잘 부탁해 관우, 장비. 서둘러 끝내고 찬이에게 가자.
양 쪽으로 펼친 손에는 언제나 익숙하게 사용한 무기가 떠올랐다. 한 때는 변신을 해야만 쓸 수 있었던 무기다. 유비는 저를 인식하는 검은 늪을 향해 터틀 버클러를 힘껏 휘둘렀다.
6.
왜 넷이서 다니게 되었을까. 제갈량은 문득 생각했다. 같은 반이 된 건 서서 뿐이였지만 주유나 사마의는 자주 들렀다. 물론 대부분 싸움을 걸고 씩씩거리며 가버리긴 했지만 제갈량은 이 관계가 썩 맘에 들었다. 이러니저러니 함께 올라온 네명이다. 앞으로의 삶에도 서서를 포함한 자신들 네명은 어느정도 함께 삶을 공유할 것이라는 생각은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 이 셋인지는 몰랐다.
제갈량은 원래 인간의 이해가 어려웠다. 본인도 인간이긴 하지만 불합리적으로 행하는 행위들이 너무 많아서 어린나이에도 그것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그대로 자라났으면 정말 말못할 부끄러운 인간으로 자라났을지도 모르지만 다행히 자신은 서서를 만났다. 아름답기 때문에 아름답다 말하는 그녀를 전부 이해할 순 없었지만 때론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에 적당히 잘 지낼 수 있었다.
주유와 사마의는 서서와 만나기 전의 자신과 비슷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비효율적인 행위'에 대해서 그들도 잘 납득하지 못했다. 물론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 전부를 이해한 건 아니지만 어느정도 성장했고 생각도 할 수 있다. 역시 서서를 봐서 그럴 지도 모르지만 거기까진 제 알바가 아니고.
그래서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냐면 점심시간 밖에서 넷이 있었는데 누군가 물었던 것이다. 누가 누구랑 사귀는거야? 즉각 반응한 것은 주유로 내가 이런 놈들이랑 사귈리가 없잖아! 하고 바락 소리를 질렀고 서서는 우린 친구야 하며 웃었다. 사마의는 대꾸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해 풀던 문제집에 집중하고 있었다. 당연히 제갈량은 한숨으로 끝냈다. 이해하는 것이 쉽다. 그것이 함께 어울리게 된 계기다. 하지만 그 뿐이다. 제갈량은 서서를 보았다. 서서에게 주기위해 가져온 간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자신도 웃음이 나왔지만 거기까지다.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사람은 서서였지만 다른 이가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면 그것도 좋았다. 물론 제대로 검증은 해놔야 하지만 말이다. 사랑에도 종류가 있고 아마도 이건 우정과 가족애의 중간쯤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저 한없이 잘해주고 싶고, 행복해졌으면 한다.
오히려 애가 타는 것은 단 한번 들었던 그 목소리가.
제갈량은 급격히 올라오는 갈증에 한숨을 한번 더 뱉고 가져온 물을 마셨다.
7.
제갈량은 그 남자를 생각 할 때마다 갈증이 났음. 목소리는 어렸을 적부터 계속 떠올려서 그런지 기억이 났지만 골목에서 놓친 이후로 모습은 잘 기억나지 않았음. 그 차이에서 오는 답답함이 아마 갈증으로 오는 것 같았지만...
그런 날의 밤에 일이 터짐. 자고 있는데 언젠가 느껴졌던 찬바람이 느껴짐. 반사적으로 눈을 뜨자 제 위에 뭔가 타고 있었지.
-네가 갈 곳으로 가라.
여자의 목소리가 아주 낯설지만은 않았음. 그러나 그걸 생각하기도 전에 제 머리위에서 찔러들어오는 창이, 막혔어. 바로 제 코 위를 가린 낯선 모양의 방패.
-유비, 내가 방해하지 말랬지!
무게감도 없던 것이 치워지고 제갈량 앞을 막은건 확실히 그 남자였음. 유비. 유비라는 이름이구나.
- 그치만 찬아.
- 이건 일이야. 네가 안해면 내가 해. 비켜.
- 그러지 마. 어차피 안통하는 거 알잖아, 찬아. 지금의 우리론 이 애를 거둘 수가 없어. 그러니까 그냥 두자. 성인이 되면 이탈자에서도 지워져.
- 그러니까 지금 하자는 거잖아. 그 대단한 가호 때문에 낮에는 건들 수도 없는데.
- 모든 이탈자를 거둘 필요는 없어.
공손찬은 예상보다 강경하게 나오는 유비의 태도에서 결국 한걸음 물러났음. 힘으로 밀고나가기엔 주변이 휘말릴테고 이정도까지 하는 데에 분명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으니까. 내다본 하늘엔 달이 없었음. 당연하지. 이 날이라 노리고 왔으니까.
- 다음 달이 없는 날까지 나를 납득시켜. 아니면 이유를 대. 그도 못한다면 상부에 신청해서 이탈자 명단에서 제외시켜. 그렇지 않으면 다음 달이 없는 날에 나는 다시 죽이러 올거야.
그렇게 말하며 공손찬은 창으로 제갈량을 가리킴.
- 그러니 산 것. 나를 기억해. 네 삶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유지되며 너의 안정은 끝없는 사랑이 보호해주는 덕분이라는 것을 알아라.
다음 달이 없는 날을 기약한다며 공손찬은 먼저 나가버렸고 방에는 둘 만 남았음. 혼났네... 유비는 한숨을 내쉬었지. 부산스럽다. 제갈량은 제 앞에서 야단인 그를 보며 생각했음. 뭔가 자신에겐 들리지 않는 것들과 이야기 하는 듯 중얼거려서 솔직히 그토록 찾던 사람이 아니라면 이상하게 보이기도 했음.
하지만 겨우 만났으니까.
- 유비.
제갈량이 알아낸 이름으로 부르자 부산스러웠던 행동이 딱 멈춤. 유비. 입에서 불러본 첫 이름이 어쩐지 입에 익었다. 유비. 한번 더 부르자 그가 뒤를 돌았고 저를 안았음. 훨씬 큰 이가 안아 품 안에 들어가버린게 낯설었지만 훌쩍이는 울음에 뭐라 말을 꺼낼 수가 없었지. 왜 우는걸까.
- 무서웠지, 미안해.
제갈량은 잠시 고민했지만 저보다 훨씬 큰 어른이(산 사람은 아닌거같지만) 훌쩍거리며 우는 걸 보기도 어려워 결국 팔을 들어 큰 등을 토닥였음.
- 저보다 당신이 무서웠던 거 같은데요.
- 하하, 맞아. 찬이는 강하거든.
유비는 가만히 제 품에서 놓아주었음. 예전에 알던 모습과는 역시 달랐지. 흰 코트도, 부채도, 녹색의 선명함도 없었지만 태어나서부터 줄곧 지켜봐온 모습 그대로 너는 자랐다. 너는 이제 나를 모르지만 나는 이 순간을 아주 오래 기다려왔어. 너는 괜찮아. 유비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말했다.
- 너는 죽지 않을거고, 달이 차고 지는 것을 아주 오래 볼 거야. 꽃이 피고 지고 꽃비가 물방울로 눈보라가 되는 것도 여러번 보겠지. 몸도 점점 커질거야. 걱정마. 네 미래는 아주 멀리까지 있을테니까. 그러기 위해서 나는 여기에 왔어.
- 당신은 대체 뭔데요?
- 나는 유비야.
- 저승사자에요?
- 응. 그렇지만 너를 죽이러 온 게 아니야. 나는 너를 지키고 싶어.
왜요? 제갈량의 물음에 유비는 울 듯 웃었지.
- 아주 오래전의 네게, 내가 잘못한게 많아서.
8.
잊지 마세요. 주군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혼자 남게 되더라도, 곁에 아무도 없더라도. 다 잊으셔도. 이거 하나는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저 순리이며, 당신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어요. 부디, 이것만은, 제발.
꿈이구나. 눈을 뜨고 나서야 제갈량은 자신이 어느새 잠들었으며 방금 본것이 꿈임을 알았음. 도대체 뭘 그리 절절하게 말한걸까. 누군가에게 필사적으로 전하려고 한게 있었다. 앞에서 펑펑 우는 누군가가 그만 울었으면 하면서 정말 열심히 말하려고 했다. 그럼 어제본 건 뭐였지? 그것도 꿈? 하지만 현실도가 달랐음. 방금 절절했던 것은 희미했지만 싸움 직전의 팽팽한 그땐 실제같았음.
기억이 나. 유비. 저를 끌어안았던 큰 몸. 상냥한 표정과 목소리에 비해서 아무런 온기도 없던 몸을 기억한다. 그런게 꿈일리가 없어. 제갈량은 다급하게 창문을 열었음. 어제 찬이라 불린 여성은 여기로 나갔는데. 그러자 대문에 누군가 서있는 것이 보였음. 이런 아침부터 누가? 라고 생각했으나 시선을 눈치 챘는지 뒤를 돌아 손을 흔드는 남자는 유비였기에.
- 꿈이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확인시켜 주려고 왔어.
당연하지만 제갈량은 학생이고 등교를 하는 날.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제갈량에게 유비는 기다릴테니 준비 하고 나오라고 했고 덕분에 같이 나란히 등교중.
- 당분간 내가 네 곁에 있을거야.
- 언제까지?
- 다음 달이 없는 날까지. 말했잖아? 지켜준다고.
공부 열심히 하고 오라며 손을 흔드는 남자에게 어색하게 인사한 제갈량은 이상한 기분으로 교문을 넘었고 평소보다 늦은 등교에 서서가 무슨 일 있냐며 물었지만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 고개만 저었다.
학교에서는 서서와 함께 다니는 게 좋아. 하교길 혼자 남았을 때 길게 들어오는 노을처럼 유비는 다시 제갈량 곁에 왔음. 그게 너무 자연스러워서 놀라지도 못했지.
- 서서는 왜. 어떻게 서서를 알지?
- 서서는....음. 굉장한 영혼이니까. 응. 굉장한.
굳이 그렇게 강조를 할 필요는 없는데. 유비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 웃고 있는 것 같긴 한데.
- 근대의 영혼들에게선 볼 수 없는 빛이 있어. 그 빛이 널 지켜줄거야.
- 어째서?
- 서서는 좋은...좋은 사람이니까. 그래서 학교에선 내가 보이지 않을 거야. 워낙 대단한 영혼이라서 우리같은 사람들은 가까이 못가거든.
유비는 황급하게 말을 이었음.
- 학교는 어차피 외부인 출입금지인데요.
- 나는 저승사자라서 인식 못해. 해도 잊어버려. 그래서 다닐수 있어. 오늘도 그랬고.
- 오늘도 학교에 있었다고요?
- 그래야 널 지키니까...요즘 여기 분위기도 좀 안좋아졌고. 왜 내가 등하교를 같이 하고 있다고 생각해?
제갈량은 걸음을 멈췄음. 지켜준다고 했잖아. 그 말 정말이었구나. 그렇지만 제갈량. 만약 학교에서 내가 보이면 서서가 있는데도 내가 보이면. 유비는 한걸음 뒤로 물러났음. 해가 진다. 지금부터는 생명의 시간이 아니다.
- 그 때는 나를 불러. 알았지? 나는 언제나 너를 보고 있겠지만 너에게 내가 보이는지는 알지 못하니까.
9.
- 뭘 어쩌려고?
옷 색처럼 검은 밤에 옆에 앉는 공손찬을 평소처럼 웃는 얼굴로 맞이했음. 어제 이 시간쯤 서로의 무기로 대치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 위에 공문 올려보려고. 제갈량 회수여부를 보류로 바꿀까 해서.
- 가능하겠어? 성공 별로 못했잖아.
- 응....
어제는 당당하게 안된다고 말했으면서 기죽는 모습에 공손찬은 결국 등짝을 세게 쳤음.
- 야! 내가 그래서 그냥 빨리 하자고 했잖아!
- 그, 그치만 찬아.
- 도와달라고 하면 진짜 죽는다?
- 그! 렇게까진 아니지만! 저기, 서식이라도...
정말 내가 못살아. 이러다 자기 가고 다시 혼자 남으면 또 어떻게 이 빨간 눈 벗길 생각이야. 속상한 마음에 공손찬은 일어나서 쭈그리고 앉은 유비를 한번 차버린 뒤에야 손을 내밀었음.
- 어떤 내용으로 쓰는지는 알지?
- 응. 이 영혼이 존재해도 된다는 거. 세상에 존재해도 아무런 해가 가지 않는 것과 영혼에도 이상이 없는 걸 올리면 돼!
- 그래. 그걸 써. 그렇지만 나 안도와줄거니까. 걔 주변에 일어나는 악령도 제거 안할거니까.
- 응! 그건 내가 할게!
- 영혼 주워오지 말고.
- 응!
- ...되겠냐?
- 할거야!
하여튼 고집은. 그래도 함께 있는 동안 이정도까지 고집을 부린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믿어주기로 함. 그래서 유비가 제갈량 주변을 집중하는 동안 보기 어려운 주변을 공손찬이 대신 맡아줌. 뭐 일이 많아지면 그만큼 값을 치루는거니 상관없지만. 주군. 귀에서 작게 속삭이는 느낌에 공손찬은 발걸음을 멈췄음.
- 왜, 조운?
- 정말 괜찮으십니까. 지역이 넓은데.
- 이 넓은 지역을 내가 몇백년을 맡아왔다고 생각하는 거야. 우리가 싸우던 시절보단 낫잖아.
- 그야 그렇지만...
그럼 됐지 뭐. 공손찬은 가볍게 자리에서 뛰었음. 오늘부터 평소보다 더 달릴 생각에 지치긴 커녕 즐거웠음. 일을 많이 할 수록 죄를 벗기고 끝이 온다. 조운. 네. 네가 있어서 나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네가 있으니 힘을 낼 수 있어.
어쩌면 유비에게 제갈량이 그런 존재였을지도 모르겠네. 그래도 다음 달이 없는 날엔 안 봐주겠지만. 신하된 자로서 주군을-하고 시작되는 조운의 말을 노래삼아 공손찬은 밤을 달렸다.
10.
파트너의 허락도 받았겠다 유비는 그 뒤로 제갈량의 주변을 돌아다녔음. 등하교때는 언제나 같이 있었고 밤에도 어쩐지 스산한 날에는 어김없이 나타나곤 했지. 예고한대로 학교에서는 정말 보이지 않았지만 서서가 곁에 없을 땐 가끔 보이기도 했음.
그리고 유비가 곁에 온 후로 제갈량은 늘상 같은 꿈을 꿨음. 누군가 자신을 부르며 울었고, 그런 자신은 그가 울지 않기를 바랐음. 몸이 부서지고 흩어져 삶이 데이터로 무너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제 앞의 유일한 누군가에게 필사적으로 말했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그렇지만 아마, 닿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원래도 잘 울던 사람이긴 했지만 저리 비참한 얼굴로 울까. 그렇지만 이제 자신은 그에게 닿지도 못하니까.
중요한 꿈이라고 생각하지만 도통 생각은 날듯말듯하고. 하지만 꿈을 빼면 일상은 크게 변하지 않았음. 학교생활은 여전했고 등하교때 유비가 함께 있는 것만 바뀌었을 뿐이었음. 주로 유비가 이것저것 물어왔고 제갈량이 짧게 대답하는것 정도의 대화였지만 어쩐지 제 저승사자는 너무나 행복하게 웃었음.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저러는 걸 보면 그냥 평범한 사람같았음.
그렇지만 안다. 저 존재는 이미 죽었고, 사실 밤새 제 주변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 보이지 않아도 자신을 위해서 끝없이 뭔가를 하고있음을 알 수 있었음.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걸까. 제갈량은 이해할 수 없었지. 매번 묻고싶었지만 노을 끝 정해진 위치에서 더이상 다가오지 않는 그것에게 쉽사리 말이 떨어지지 않았음. 웃고 있는데 우는 것처럼 보이는 건 왤까. 일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필사적이게 할 수 있을까. 옛날의 내게 당신이 큰 잘못을 했다고 했지. 하지만 나는 당신이 그럴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어떤 잘못을 했는지 몰라도 아주 어렸던 때부터 소중히 여겨줬다는 걸 이제 알겠으니까.
- 그럼 물어보면 되잖아.
고민 끝에 제갈량은 점심시간 평소대로 모인 멤버들에게 적당히 섞어서 이야기함. 가장 먼저 주유가 한심하단 소리로 말을 꺼냄.
- 너 그사람에 대해 잘 알아?
- 아니.
- 그럼 물어봐야지. 사람관계는 눈치로 되는 게 아니잖아. 괜히 쓸데없이 없는 정보로 생각하니 오해도 생기고 그러는 거야.
- 그래서 네가 어제 복도에서 손책 선배랑 싸운거고?
- 조용히해! 그건 선배가 나쁜, 건, 아니었으니까....
- 누가 누구에게 충고하는지.
사마의 일침에 주유가 기가 죽어 흐려진 의견이지만..
- 나도 그게 좋다고 생각해.
- 서서.
- 음, 잘 모르겠지만. 일단 제갈량을 엄-청 아껴주는 사람이잖아? 그런 사람이 제갈량을 위해 최선을 다 하고 있는 거지. 그걸 물어보는 건 이상한 게 아닌 거 같아. 그리고...
서서는 조금 머뭇거리며 말했음
- 제갈량이 알면 좋을 거 같아.
묘한 확신이 있는 말이었지.
- 최선을 다했을 때, 상대가 알아주면 기쁘잖아. 알아주길 바라면서 하는 게 아니라도 상대가 알아주면 뿌듯하지 않을까? 나라면 기쁠거야. 행복할거야. 고마울거야. 만족할 수 있을거야.
꼭 그런 적이 있는 사람같네? 주유의 말에 서서는 그런가-? 하면서 웃었음. 물어봐서 대답을 해줄지 모르겠는데... 말끝을 흐리는 제갈량에게 사마의가 이상한 듯 말함.
- 네가 그정도도 못하냐.
- 너보단 낫지, 사마의.
- 그럼 하면 되잖아.
- 누가 안한대?
긁는 말에 반사적으로 말은 했지만 그게 쉬우면 상담까진 안했지. 제갈량은 여전히 제 곁에 있는 유비를 보며 한숨을 내쉼. 여전히 다정하고 상냥하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오히려 그게 물어보기 어렵게 만들기도 했음. 바람은 또 오늘따라 찬 건지. 괜히 교복을 문지르던 제갈량은 뭔가 이상함을 눈치챔. 분명히 오늘 바람은 좀 세게 불고 있는데 어째서 제 머리카락 하나 흔들리지 않지. 옆을 지나던 여성의 가벼운 옷도 흔들리지 않았음. 마치 어떤 바람도 없는 것처럼.
- 그렇구나. 제갈량에겐 바람이 불겠네. 많이 차지?
의문은 옆에서 해결됐음. 유비의 말에 고개를 돌리자 그 혼자만 바람을 맞는 것처럼 무거운 조끼도 흔들리고 있는데.
- 이게 뭐죠?
- 저승에서 불어오는 바람. 산 사람에겐 느껴지지 않는게 보통이지만 아직 너는 여기랑 가까우니까. 그래도 괜찮아. 곧 이런 거 못느끼게 될 거야.
그때는 당신도 더 이상 보이지 않겠지. 봐도 기억을 못하거나, 인식할 수도 없을테고 기억하던 목소리도 잊을 것이다. 오가는 길 들었던 저승사자들의 생활이 떠올랐다. 빨리 그 날이 왔으면 좋겠다. 유비의 말에 결국 제갈량은 발걸음을 멈췄음. 제갈량? 유비가 뒤를 돌았지만 움직이지 않았고. 이런 적이 없는데. 왜그래? 어디 아파? 다정하게 물 어오는 질문이 더 화가 났다.
- 나도 그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 으, 응?
- 그래서 이상한 거 신경쓰지 않고 공부해서 원하는 걸 이루고 싶어요.
- 어? 응? 응. 그래서 나 열심히 하고 있는데....
- 왜요?
- 어?
- 왜냐고요. 왜 그렇게까지 나에게 하는지 묻는 겁니다.
- 그야...
- 예전의 내게 잘못해서 그렇다고요?
그 말에 유비는 대답하지 못했음. 사실이니까. 제갈량은 머리 속에서 이렇게 물어볼 생각이 아니었는데, 하는 후회가 지나갔지만 이미 말은 뱉어졌음. 분했지. 그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건 나 뿐인 것 같아서.
- 나는 당신이 그렇게 잘못 할 사람으론 안보여요. 정말 멍청할 정도로 착하면 몰라도.
- 제갈량.
- 옛날의 내게 잘못했다고요. 하지만 나는 몰라요. 당신이 내게 무슨 잘못을 했는지, 내가 당신에게 무엇이었는지, 당신이 누군지조차 나는 몰라요. 하다못해 나는 당신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이름은 익숙했다. 분명 입에선 꽤 잘 굴러갔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내는건 어딘지 이상했다. 그래서 언제나 제갈량은 언제나 얼버무렸지만 그가 크게 개의치 않아서 지금껏 있었다. 하지만 사실 부르고 싶었다. 그렇게 쉽게 자신의 곤란함을 넘겨주지 않았으면 했다.
자신의 말에 언제나 웃던 유비의 얼굴이 드디어 처음으로 굳었다. 처음으로 본 웃지 않는 얼굴은 웃을 때와 달리 무척 피로해보였고, 지쳐보여서. 누군지 순간 몰랐을 정도였다. 가자, 관우. 유비의 말에 오른쪽 손의 반지가 반짝이더니 큰 칼로 바뀜. 역시나 보통은 본 적 없는 형태였고, 제갈량은 유비가 무기를 들고 자신에게 걸어오는 것을 처음 봤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한 웅큼씩 시야가 어두워지는 것 같았지. 저승사자지만 조금도 느끼지 못했던 죽음이 걸음마다 느껴졌다. 이게 분명 본능적인 공포일 것이다. 제갈량은 제 몸이 굳는 걸 느꼈지만 도망치지 않았음. 그럴 수도 없었고, 그러면 정말 다 끝나버릴 것 같았으니까. 죽음이 걸어온다. 늘 지켜주겠다던 그 사람이 죽음이었고, 마침내 눈 앞까지 와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인형이 움직이듯 아무런 예비동작 없이 팔을 든 칼만 크게 올라갔고,
떨어졌다.
- 나는.
유비는 천천히 말했다.
- 네가 나를 기억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제갈량은 제 옆으로 떨어진 칼을 보았다. 무언가 비명을 지르며 사그러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승사자는 악령도 없앤다고.
제갈량.
부르는 목소리는 메마르고, 고통스러웠다. 더이상 네가 나를 부르지 않는다는게 기뻐. 일그러진 얼굴이 지금까지 여러날 봤던 그와 도무지 맞지 않았지만. ....태어나줘서 고마워. 쥐어짜내는 목소리 만큼은 어느때보다 가까이 들렸다. 웃는 얼굴로 넘겨버리던 그 순간마다 바랐던 진심이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부터 제갈량은 더 이상 유비를 볼 수 없었다.
11.
일주일. 제갈량은 더이상 유비가 나타나지 않을 것임을 인정했다. 혼자 다니는 등하교가 쓸쓸했지만 원래 그랬던 길이라 금새 익숙해졌다. 나는 이렇게 당신을 잊을까. 또 잊을까. 그럼 당신은 또 기뻐할까. 물어본 것을 후회하진 않는다. 덕분에 얼마나 그가 필사적으로 저를 생각하는지 알았으니까.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가 진심이라는 것은 알았으니 거기에 더이상 후회는 없었다. 다만 화는 났다. 결국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나는 그냥 당신이 알고 싶었는데. 그게 웃음을 지울 정도로 몰아붙이는 일이 되는 걸까.
제갈량은 이제 꾸지 않는 꿈을 떠올렸다. 꿈에서 자신은 필사적으로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자신은 듣고 싶어한다. 정 반대다.
량아. 걱정스럽게 들려오는 말에 고개를 돌리자 감정을 그대로 표정으로 옮긴 것 같은 얼굴의 서서가 있었지. 나 괜찮아. 이것도 이미 일주일 동안 말했지만 이런 곳에서 감이 좋은 다정한 친구는 도통 표정을 거두지 못했다. 이대로 있어봤자 걱정어린 시선만 받는다. 어차피 다음이 이동수업이니 제갈량은 교과서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 밖을 본 건 우연이었다.
- 서서, 저게 뭐지?
- 응?
제갈량은 교문으로 천천히 들어오는 검은 물체를 가리킴. 저 검은 거. 응? 뭐가? 아무것도 안보이는데. 서서의 말에 제갈량은 이상한 듯 다시 봤음. 뒤뚱거리며 걸어오는 저게 안보인다고? 운동장의 학생들도 전혀 개의치 않고 공을 차고 놀고 있었음. 제갈량은 잠시 그것을 바라봤고 이내 교과서를 내던지고는 교실을 박차고 나갔음. 이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는 알고 있지만 이 방법밖에 생각나는 게 없었다. 제갈량은 단숨에 1층으로 내려와 그대로 운동장으로 내달렸다. 검고 기이한 그것은 불길함을 소리로 내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하하. 공포감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어떻게 이게 안 보일 수가.
그 다음 순간 제갈량은 누군가에게 잡혀 있었음. 허리를 잡히고 얼굴은 누군가의 어깨에 묻혔지만 아무런 온도도 없는 큰 품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 내가 학교에서 어떻게 하라고 했더라? 한숨 섞인 목소리가 반갑다.
훌쩍 옮겨져 그것이 안보이는 곳까지 이동한 후에야 둘은 떨어졌음. 미묘한 얼굴의 유비가 있었지.
- 왜 그랬어?
- 당신이 부르라고 했으니까.
- 부르지도 않았고, 위험한 일을 하라고 한 적도 없잖아. 내가 서서랑 있으면 괜찮다고 했는데.
- 있었는데도 보였으니까. 당신같은 존재를 보는 거나 저걸 보는 거랑 다를것도 없어.
- 그러니까 난 언제나 널 보고있으니까 나를 부르면,
어떻게? 제갈량의 물음에 유비의 말이 막혔지.
- 물어봤잖아요. 하지만 대답하지 않았던 건 당신이야.
- ...내 이름 알잖아.
- 그래요. 유비.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불러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제갈량의 말에 유비의 얼굴이 바뀌었다. 이 얼굴은 어디서 본 적이 있다. 최근에 참 많이 봤는데. 자기도 모르게 손을 올려 그의 얼굴을 매만졌다. 아무것도 없다. 당연했다. 울지 않으니까. 처음부터 이름은 익었지만, 그렇게 허물없이 부를 이름이 아니었던 것 같다. 유비는 굳이 제갈량의 손을 치우지 않았다. 복잡한 얼굴인 것 같았다. 기다리는 것 같으면서도,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대체 이런 사람이 무슨 잘못을 했을까. 궁금했다. 제갈량은 온갖 호칭을 생각했다. 그러다 유비님이 나왔다. 제법 익숙했다. 그래, 역시 이 이름은 감히 부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무언가가 마구 밀려오는 감각에 당황스러웠지만 제갈량은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얼굴은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이름이 아니다. 분명 다르게 불렀다. 관계가 정확하게 드러나는 말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걸 고집했던 것 같다. 처음엔 선을 그으려고 했겠지만, 나중엔 그것이 자신의 얼마 없는 표현이었다. 경애를 담아, 유일한 존재라는 의미로.
왜냐면 내가 그의
"....주군."
신선이니까.
12.
당신 왜 여기에 있어요?
얼굴을 매만지던 손이 옷깃을 잡았다. 역시 우수했던 신선은 막아놓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나보다.
왜 내가 인간이죠?
전보다 작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너무 그렇게 쥐지 마. 이제 인간이니 다치면 힘들거야. 그리 말해주고 싶다.
이 세상은 뭐냐고요!
인간이 된 제갈량도 머리가 좋았으니, 기억이 돌아온 지금은 분명 이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제게 묻는다는 건 그만큼 믿고 싶지 않아서일까. 칭찬은 바라지 않았지만.
- 대체 왜 당신이 그런 꼴이에요...!
- 하하.
제 맘도 모르고 웃어버리는 유비에게 울컥하며 소리를 지르려던 제갈량은 다시 할말을 잃었다. 그렇게 웃지 마. 그렇게 울지도 말아요. 그런 사람이 아니었잖아요.
- 두번 다시 네게 그렇게 불릴 거라곤 정말로 생각 안했는데.
- 말 돌리지 말고..!
그러나 말보다 유비의 손이 빨랐음. 살짝 가려진 시야는 그의 손이란 걸 알았고 그 순간 급격히 잠이 쏟아졌지.
안돼. 제갈량은 멀어지는 의식으로 유비의 뒤에 아까 봤던 검은 물체가 달려들고 있는 것을 봤음. 하지만 더이상 목소리가 나오질 않아서. 안돼 이대로 잠들면 못 볼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더 화가 나는건 흐려지는 시야에서도 그가 저를 보며 웃었다는 점이었다. 안돼, 자면 안돼. 이대로 헤어지면, 당신을 또 두고 가버리잖아....
13.
'신선' 제갈량이 세계가 이상하다는 걸 알게된건 마지막 드림배틀이 끝나고 약 10년 정도 후. 평소 열어놨던 지상 통신으로부터 유비가 다급하게 제갈량을 찾았음. 무슨 일인가싶어 보니 유비가 저를 가리키며 말했지.
- 제갈량, 나 어때?
이건 또 무슨소리? 형님 그렇게 말하면 모르잖수. 옆에서 장비의 태클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음. 유비도 아차 하고는 다시 말했음.
- 제갈량, 나 변한 거 있어?
- 딱히 모르겠는데요. 소원도 작은 머리도 여전하셔서요.
- 그거 말고! 외모가! 내가!
- 네?
- 나, 10년 전부터 하나도 안 변한거 아닐까?
유비는 사진을 올려서 보여줬음. 이 사진은 제갈량도 유비가 보내서 저장하고 있는 거였음. 오호대장군이 인간계로 내려가 처음으로 같이 찍었던 사진이었지. 그래 한 10년이 되었다. 강산이 변하고 사람도,
- 안변하셨어요.
오호대장군은 분명 10년이 느껴졌는데 유비는 그대로였음.
- 그렇지? 찬이가 넌 어째 하나도 안변한다라고 해서 처음엔 그럴까 했는데 사진이랑 나 너무 똑같아. 제갈량, 이거 왜그런거야? 나 어떻게 된거야?
- 진정하세요. 이쪽에서 알아보고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끊긴 했는데 제갈량도 영문 모를 일이었음. 드림배틀에 참여한 군주들에게 문제가 있나 싶어서 살펴봤지만 없었지. 다른이와 제 주군의 차이가 뭐지. 너무 많아서 뭐하나 탁 고를 수가 없었음. 굳이 뽑자면 유비는 우승자라는 것. 하지만 우승자가 늙지 않는다던가 하는건 그런 소원을 빌었을 때 뿐임.
제 주군의 소원은 드림배틀의 폐지. 모든 이의 행복은 세계의 멸망을 초래하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10년. 제갈량은 10년간의 통계를 내봤음. 드림배틀이 끝난 이후의 10년. 유비에게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은 10년. 통계는 조금 이상했지. 그 해부터 태어난 아이들의 꿈들이 많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 이제 가장 나이가 많은 아이들은 9,10세이니 이것저것 꿈꾸어도 좋으련만 이상하게 적은 느낌이었음. 옥새에 수집된 데이터에 비교하니 더 확연했지. 아이들이 꿈을 많이 꾸지 않는다. 성인으로 갈수록 꿈을 꾸는 것은 줄어들텐데, 벌써부터 이러면 미래는.
...잠깐. 머리에 많은 가능성이 지나갔음. 꿈을 꾸지 않는 이유. 꿈을 꿀 가치를 느끼지 못하던가, 현상에 만족하거나. 만족. 제갈량은 그 단어에서 섬뜩해졌지. 자신의 예상이 틀렸기를 바라며 옥새의 모든 프로세스를 열었음. 가장 최상단에 위치한 것을 본 제갈량은 제 우수함을 저주했지. 옥새가 에너지원을 충전하고 재구성하는 바로 그 순간에만 변경되는 프로세스. 소원. 그것이 가동중이었음. 그것도 분명 마더컴퓨터가 불가능하다고 거절했던 제 주군의 첫 소원이.
드림배틀의 폐지는 어떻게 된거지? 분명 그것으로 이루어졌을텐데? 그러나 곧 헛웃음을 지었음. 옥새를 변경한 것은 소원으로 처리된 것이 아니라 버그를 낳을 정도로 비틀렸던 옥새가 설계도를 '수리'로 알아듣고 처리해버린 것이다. 소원이 아니다. 머리부터 내려오는 암담함에 제갈량은 잠시 비틀거렸지만 이내 정신을 잡았지.
기다려. 세계가 멸망한다고 아직 정해진 것이 아니다. 그런데 대체 이 일과 자신의 주군의 불변이 무슨 관계인가. 옥새의 힘일 것이다. 그럼 왜 옥새가 그를 붙잡고 있지. 소원이 있으니까. 아직 옥새가 우승자의 소원을 다 들어주지 못했으니까. 맙소사. 이 옥새는 정말로 우승자의 소원을 들어줄 생각이다. 그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옥새는 우승자를 붙들고, 놓지 않고 있다. 모든이가 만족해 꿈을 꾸지 않는 세상이 오기까지, 모두가 행복해져서 멸망하는 세계를 제 눈으로 보라고 옥새가 잡아버린 거야.
최악의 상황에 제갈량은 처음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음. 이걸 지금, 나보고, 나의 주군에게, 그분께, 말하란 소리야?
혼자라면 차라리 괜찮았다. 쌍수를 들고 환영할 수도 있었다. 시작이 있는 것은 끝이 있고 세상도 결국 그렇게 될 것이다. 만인의 행복을 원한 제 주군의 꿈으로 세상이 멸망한다니! 아주 기쁘게 기꺼이 그 멸망까지 함께할 자신이 있었다.
혼자라면.
그것이 저 혼자라면. 제갈량에게 세상은 도원관 정도였으니까. 작았던 그 세계가 전부였으니 나머지는 알바도 아니고 그마저도 함께했던 이들이 떠나면 그것도 관심 밖이 된다. 하지만 정많고 다정한 그는 그렇지 않을텐데.
한번 소멸을 선택했을 때도 이리 두렵지는 않았다. 승패가 어찌 나더라도 제 주군은 자신이 알던 모습 그대로 끝까지 가실 분이었을테니.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없었다. 이 사실을 전달할 존재는 자기 말고는 없다. 그가 무너지지 않을까 무서웠다. 제갈량에게 유비란 인물은 주군이며 지표이며 꿈이며 세상이란 발판이었다. 차라리 나쁜사람이면 좋았을텐데 하고 생각이 들 정도로 미련하게 착한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에게 당신의 꿈으로 세상이 멸망하고 있다는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하는가.
그래도 말해야 하는 것이 제 일이었다. 차라리 당신이 나를 도구로 여겨주었으면 좋았을것을. 제갈량은 그리 생각하며 관리자가 된 후 처음으로 지상에 내려왔다. 이 말 만큼은 직접 하고 싶었다. 사실 도원관으로 향하는 걸음을 옮길수록 도망치고 싶었다.
그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제갈량은 가만히 기다렸다. 한걸음마다 바뀌던 고민은 결국 전부 솔직하게 말하는 것으로 정해졌고 최대한 담담히 사실을 전했다. 세계는 발전없는 만족에 질식할것이며 당신은 마지막 익사자가 나올 때까지 존재한다는 것 전부.
- 나는 죽을 수 있을까?
해가 없는 시간에 왔는데 해가 뜨고 있었다.
- 모릅니다. 이런 일이 지금껏 옥새의 기록에도 없습니다.
둘은 함께 해가 뜨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고보면 함께 일출을 보는 건 처음이었던가.
- 최소한 노사는 없겠죠.
- 그렇구나.
- 미안해.
- 네?
- 기껏 제갈량이 세상을 지켜준다고 했는데 내가 망쳐서.
- 주군.
- 그리고 그걸 네가 나에게 말하게 해서 미안해. 말하러 오는거 힘들었을텐데.
- 그만하세요!
더 이어지는 말을 잘랐다. 여기 오기까지 눌러왔던 공포가 화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 내가 소원을 말했어.
- 그 꿈을 지지한 건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나 역시 잘못했다고 말하는 겁니까?
- 아니. 제갈량은 그 꿈이 안될 걸 알았잖아.
- 네. 알았어요. 그래도 당신이 미련하게 믿었으니 나도 믿었습니다.
- 그런 꿈을 꾸는 게 아니었어.
- 어차피 끝은 옵니다!
제갈량은 창을 바라보는 유비의 어깨를 억지로 돌려 저를 보게 했다. 그렇게 잘 울고 잘 웃던 사람의 얼굴에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 잘 들으세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계도 그래요. 그것이 조금 구체적으로 되었을 뿐입니다. 새삼스럽게 당신 하나의 탓이 아니라고요.
- 제갈량. 그리고 당장 내일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꿈이 오지 않은 것도 아니에요. 세상은 존재합니다. 알았으면 정신 차리세요. 당신의 꿈을 부정하지 마세요. 저도 오호대장군들도 그 말도 안되는 꿈을 믿고 여기까지 왔고, 우리는 이겼어요. 그리고 저는 지금도 그 사실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 어째서?
- 그 소원을 빈 것이 당신이기 때문입니다. 미련하게 착한 당신은 정말로 그 소원을 진심으로 바랐을 테니까요.
제갈량은 아직 어찌할바를 모르는 제 주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주군. 이 건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주군께선 그저 평소처럼 사시고, 일상을 보내시고, 인간으로 사십시오. 그러고 가세요.
- 가?
- 인간은 태어나면 죽지 않습니까. 그러시라는 말입니다.
- 방금 나는 죽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 그래서 제가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요. 소원은 아직 방법이 보이지 않지만 주군에게 묶인 방법은 어떻게 풀어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그동안 기다려주세요. 할 수 있을겁니다. 반드시 주군께서 다른 이들과 함께 삶을 보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지금의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것만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 그러나 기시감이 든다. 이렇게 마음을 먹으면 꼭 방해가 들어왔다.
- 아냐, 제갈량. 그러지 마.
그래 이렇게.
- 무슨 소립니까.
- 말 그대로야. 네가 그러지 않아도 돼.
- 주군.
- 나는 끝까지 볼 거야. 내가 빈 소원이잖아. 내가 저지른 건 끝까지 봐야할 책임이 있어. 옥새가 그래서 나를 붙잡았다고 했잖아.
- 인간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몸으로 어떻게 살겠단 소립니까? 주군. 이제 고작 10년이라 감이 안옵니까? 주군을 제외한 오호대장군도, 다른 사람들도 시간 속에서 살아갈겁니다. 시간에 속하지 않은 저나 박탈된 주군은 그저 존재할 뿐이에요. 그 흐름속에서 어떻게 살겠다는 겁니까? 우린 사는게 아니에요. 그저 그냥 그 자리에 존재할 뿐입니다. 지금 말하는 건 그런 겁니다. 그걸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살고, 누구보다도 인간의 가능성을 믿은 당신께서 그럴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까? 무리입니다. 저도 원하지 않습니다. 당신에게 어울리는 세상에서 사세요.
- 하, 지만....
제 설득에도 고집스러운 모습에 밀려오는 답답함도 참 그리운 감각이다. 제갈량은 한숨을 내쉬었다.
- 대체 무엇이 그리 걸립니까. 원래대로의 삶을 사셔도 세상은 아주 오랫동안 존재할겁니다. 멸망이 정해졌어도 쉽게 되는 게 아닙니다.
- 네가 있잖아.
무슨 말을 해야할까. 제갈량은 그리 생각했지.
- 솔직히 너무 많고 멀어서 완전히 다 실감이 안나.
- 그러실겁니다.
- 하지만 하나는 알겠어. 내 소원으로, 네가 죽게 된다는 거.
- ...네?
- 제갈량은 이 세상을 계속 지킬 생각이었잖아.
- 네.
영생을 살 생각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제갈량은 본래 제 주군이 있는 세상을 지킨 후, 그가 없으면 옥새를 보강하고 적당히 사라질 생각이었다. 다만 이 의견은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헤어질 때 말을 하기엔 시간이 없었으며 통신을 재개한 후에는 굳이 이런 대화를 할 필요가 없어 말을 꺼내진 않았다. 하지만 제 주군의 소원으로 멸망이 정해진 이상 멸망까지 기꺼이 할 생각이 있었다.
-미안해.
- ......
- 제갈량이 그랬지. 신선계도 인간계의 보조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세상이 없어지면 여기도 없어지고, 네가 하려던 것도, 지킨 것도, 너도, 전부 없어져. 내 소원때문에.
- .....주군.
- 그러니까 적어도 마지막까지 있게 해줘. 나 때문에 너도 이 세상도 없어진다면 적어도 보게 해줘. 제갈량. 부탁이야....
영생을 살지 않으려고 한 것은 자신의 꿈이자 삶이었던 당신이 없어서고, 멸망을 받아들인 것은 당신의 선한 꿈으로 장식되는 마지막에 자신이 빠질 순 없기 때문이다. 눈앞에 있는 남자만이 제 삶이고 전부이며, 최선을 다할 상대이고....
거절해야한다.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아까처럼 받아쳐야한다. 아무리 사람이 미련하게 착해도 정도가 있다. 자신에게 미안하다고 그 긴 시간을 있겠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다. 미래가 훤하다. 분명 그는 앞으로 지독해질 세계를 보며 절망에 빠질것이다. 그런데 말이 안나왔다. 아까처럼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당신이 있다. 무릎을 꿇을 유일한 제 주인이 여기에 있다. 앞으로도 있겠다고 한다. 그 사실이 제갈량에게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가능성이었다. 인간과 신선이기에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사실이 아니게 된다. 그게 제갈량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잘못된 거다. 그런데 이 감정은 무엇인가. 주군을 절망으로 이끌 수 없다. 하지만 분명 이 마음은 옥새의 소원을 확인했던 순간과 비슷하다.
나는 기쁜거야.
이 사람이 있어서. 마지막까지 같이 있겠다는 말을 해서. 함께 할 수 없으니 당신의 꿈이라도 같이 가려던 마지막을 당신이 있게 되는 게 나는 지금 기쁜거야. 그리고 제갈량은 알았다. 아, 나는 이것을 아마도,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착하고, 너무 착하고, 정말 바보같이 착한 제 주군이라면 혹시나 그런 말을 하지 않을까 하고 기대를. 그가 절망할까 두려워하면서도, 그 안에서 나는 이런 기대를, 나는.
- 제갈량.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부탁이야. 당신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그러나 결국 따르게 되고 마는 것이다. 제갈량은 선계의 문을 열었다.
14.
그 후 제갈량과 유비는 정말 오랜 시간을 함께 선계에서 지냈다. 올라오는 꿈은 점점 줄어들었고 사람들은 많이 웃게 되었다. 전쟁도 싸움도 사라지고 경쟁도 없어져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살아야하는 이유조차 잊게 되었다. 전부 지켜보았다. 인간의 수는 빠르게 줄었다. 옥새는 점점 기울었다. 에너지원이 없으니 돌아가는 것도 소음이 심했다. 선계는 이미 반 이상이 무너진 상태였다. 찬란했던 녹음도 없어진지 오래였고, 그저 둘은 그렇게 계속 존재했다.
그의 주군은 많이 울었고, 또 한참을 지켜보았으며, 저를 보고는 조금 웃었다. 그런 유비를 제갈량은 늘 바라보았다. 세상은 크게 의미가 없으나 꿈은 지척에 있었다. 일은 하나 그저 익숙한 작업일 뿐이다. 마지막이 곧 온다.
조금 고민거리가 생겼다.
- 주군.
꽤 오랜만에 불러보는 호칭에 유비가 고개를 돌렸다. 하긴 언제부터인가 그는 이름을 불러주길 바랐다. 아무래도 어려워 유비님이라 했지만, 대화가 오랜만인지도 모르겠다.
- 올라와보시겠어요?
- 어디에?
- 제가 있는 곳에요.
- 옥새에?
- 네.
이제 선계도 인간계도 거의 남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부르는 이유를 모르겠지. 그러나 그러나 긴 시간이 지나도 선한 당신은 쉬이 옥새에 올라섰다.
- 처음 올라와.
오랜만에 보는 웃는 얼굴이었다.
- 좋군요.
- 뭐가?
- 역시 주군은 웃는 얼굴이 낫군요.
그게 뭐냐며 웃던 유비는 이내 바스러지는 제갈량의 몸을 보며 경악했다.
- 괜찮습니다. 옥새의 허가없이 벗어나면 이렇게 됩니다.
- 그럼 빨리 들어와!
- 당신이 있잖아요.
- 그럼 내려가면..!!
- 안되죠? 제가 그렇게 바꿨습니다. 옥새는 태초부터 존재한 것. 혹시 모든 것이 끝나면 이 옥새가 무엇인가 할 지도 모릅니다. 에너지원은 그리 많진 않습니다만 여기엔 모든 것이 담겨있으니까. 그를 위해 주군을 가능성으로 두려고 합니다.
- 제갈량!
- 신선은 관리를 할 뿐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하지만 세상을 사랑했던 당신이라면 할 수도 있죠.
- 안돼, 그러지 마.
- 주군. 긴 시간이었습니다. 당신은 충분히 고통을 받았고, 잘 하셨습니다. 만약 안된다고 해도 너무 절망하진 마세요. 그럼 저흰 또 만나게 되는 겁니다. 제가 조금 먼저 가는것 뿐이죠.
- 제갈량.
- 저희는 참 오래 같이 있었죠. 드디어 말씀을 드립니다. 자책하지 마세요. 주군께선 끝없이 당신의 잘못이라 했지만 그리 생각하지 마세요. 이건 그저 순리일 뿐입니다. 생겨난 것은 언제인가 없어지고, 태어남은 죽음과 같습니다. 지금 제 유일한 걱정은, 제가 있을 때도 자책하던 당신이 제가 없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 나는, 너는 왜 그걸 지금.
- 지금이니까. 그동안 말씀을 드렸어도 무너지는 세상을 당신이 계속 담아뒀을 테니까요. 주군. 부탁드립니다.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세상이 끝나는 것은 저 또한 처음이니 어찌될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을 잊으실수도, 그보다 먼저 사라질 수도 있겠지요. 그러니 주군.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기억하고 마지막을 맞이해주세요. 제발. 당신의 탓이 아닙니다. 잘못이 아니에요.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더 했으면
당신은 살아있었을까.
15.
긴 꿈을 꾸고 눈을 뜨니 양호실이었음. 학교에서 쓰러진 걸로 됐나. 길게 들어오는 해를 보니 거의 끝난 시간이 아닐까 싶었지.
- 량아, 일어났네!
문 쪽에서 들린 다정한 목소리에 제갈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 괜찮아? 집에 갈 수 있어?
- 이제 괜찮아.
- 집에 전화를 하는게 좋지 않을까?
- 그정도까지는 아냐. 요즘 잠을 설쳐서 그랬나봐. 먼저 가. 전화가 필요하면 내가 할게.
- 정말?
- 정말.
서서는 그 후 세번이나 더 확인을 한 후에야 문밖을 나섰다. 주군. 응. 아무도 없는 곳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 내가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 서서가 옆에 없었으니까요. 주군은 쓸데없이 잔걱정이 많으니 분명 주변에 있을 거라 생각했죠.
- 예나 지금이나 모르는게 없네.
- 그럼 제가 하고싶은 말이 뭔지 아시겠죠.
- 그렇긴 한데, 조금 더 있다가 하면 안될까. 곧 양호선생님이 올테니까.
웃음섞인 목소리를 끝으로 미약하게 있었던 뭔가가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음. 제갈량은 한숨을 내쉬었음.
알았지만. 다시 만난 순간부터 그가 산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았지만. 제갈량은 떨리는 제 손을 마주잡았다.
몸 조심하라는 말을 듣고 학교를 나서자 그 전처럼 당연히 유비가 기다리고 있겠지. 제갈량은 참 생소할 것 같다. 지금까지 유비가 저를 기다리게 한 적은 있어도 자신이 주군을 기다리게 한 적은 거의 없었으니까.
- 어서와, 제갈량.
- 네.
- 아까 많이 놀랐지. 그렇게 큰 건 보통 그 전에 처리하는데 말이야.
- 그건 뭡니까.
- 여러 찌꺼기 같은 거랄까...좋은 건 아니고.
- 그것도 일입니까.
- 그렇지.
- 그것들은 뭘 합니까.
- 영혼을 잡아먹거나, 힘을 흡수하거나, 지맥을 오염시키기도 하지. 제갈량이 이렇게 묻는 거 신선하다. 늘 내가 물어봤잖아.
뒤돌아보며 웃는 얼굴은 기억 속이랑 전혀 다르지 않아서.
- 주군.
- 응.
- 말씀해주세요.
- 응. 오늘 밤에는 어디 안 갈게.
- 오셔야합니다. 꼭이요.
- 응, 꼭 갈게.
기다리고 있어, 제갈량! 노을이 내려가는 시간부터는 그의 시간이다. 신선이었을 무렵엔 익숙하게 보던 방패와 칼을 들고 그림자로 사라지는 모습을 제갈량은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인간이란 이렇게나 무력했던가. 예전엔 없던 무력함에 숨이 벅찼다.
유비가 온 것은 결국 달이 태양처럼 높게 뜬 시각이었다. 얼마나 급하게 왔는지 인간처럼 숨은 헐떡이고 자신이 알던 평범한 옷이 나닌 길고 검은 코트였다. 무언가 누덕누덕 묻어있던 그것은 유비가 방의 창문을 건너자 언제 있었냐는듯 사라졌다.
- 미안!
- ...안오시는 줄 알았습니다.
- 뭐? 그럴리가 없잖아. 누구도 아니고 제갈량이랑 약속했는걸. 그리고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거고...
- 네, 네. 알았어요.
둘은 거기까지 말하고 서로를 본 다음 웃었음. 꼭 도원관에 있던 것 같아서.
- 길 지도 몰라. 괜찮습니다.
- 듣고 싶어요.
- 응, 나도 말하고 싶었어. 이제 그 세상을 기억하는건 우리 정도니까.
16.
세상이 멸망한다. 라는건 단순히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이 죽는 게 아니었다. 존재하는 모든것의 소멸에 가까웠다. 생명이 죽고 땅도 하늘도 빛도 시간조차도 유비와 옥새를 제외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마침내 모든 세상이 존재에 만족해 사라진 것이다. 유비는 아무것도 없는 곳을 보며 생각했다. 어째서 자신은 존재하나. 옥새는 왜 있는걸까. 그러나 답을 줄 수 있던 현명한 신선은 이미 저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뒤라 답을 알려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이제 어쩌지. 솔직한 감상이었다. 모든 것을 멸망시켰으니 저도 죽어야했다. 그러나 끝내 저를 지키고 죽은 존재를 생각하면 그러지도 못했다. 대체 가능성이란 뭘까. 제갈량은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남겼을까. 꿈도 없어 이제 멈춘 옥새로 뭘 어쩌라는 걸까.
옥새. 유비는 에너지가 없어 거의 기능이 멈춘, 제 몸을 보호하는 기기를 살폈다. 작동법은 몰라 하나하나 시행착오를 걸쳐야 했지만 어차피 이제 남은 건 이거 하나 뿐이었다. 이러다 에너지가 완전히 멈추면 자신도 사라지려나. 그것도 괜찮다. 어차피 남은 건 이것 뿐이니까. 그러나 어찌되니 영문인지 삐걱거리면서도 옥새는 부득부득 움직였고 유비는 그 안에서 수많은 정보를 보았다. 읽고 또 읽었다. 세계를 유지하던 옥새에는 모든 세계의 정보가 있었다. 그걸 유비는 막연히 계속 읽었다. 모든 내용을 외울 정도로 읽고 나니 분명 멸망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무언가가 있음을 알았다. 두 개. 그것에 걸맞는 명칭을 한참이나 생각하고 유비는 하나를 입구, 하나를 출구라 불렀다. 나중엔 시작과 끝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저 둘을 이어보면 어떨까.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다만 할 것이 없었다. 미치면 좋을까 싶다가도 제 앞에서 무너진 존재를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때처럼 슬프진 않았다. 아마 지쳤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유비는 그 둘을 잇기 시작했다. 세상의 모든것을 담은 지식으로 옥새에서 뽑아 누덕누덕 이었다. 이상하게도 옥새는 멈추지 않았다. 멈춘 것과 다름없는 느린 속도로 옥새는 움직였고 유비는 그것을 기다리며 붙이고, 잇고, 기다리고. 내가 뭘 하는거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덕지덕지 이어붙인 것들은 견고하지 않았다.
어쩌지. 고민은 짧았다. 유비가 이용할 수 있는건 옥새 밖에 없었다. 유비는 옥새의 부품을 중심으로 다시 정보를 엮어갔다. 가깝다고 생각한 시작과 끝은 의외로 거리가 있었다. 유비는 차근차근 묶어갔다. 옥새의 정보는 정말 별게 다 있었다. 지금껏 드림배틀을 거쳐간 모든 인간들, 신선들, 영웅패들. 물론 자신들 것도 있었다. 유비는 거기서 한참을 머물렀다. 역사, 자연, 과학, 종교, 문학, 모든 것이 옥새에 있었고 유비는 모든 것을 묶어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끝에 도달했을 때, 하나가 없음을 알았다. 이미 옥새는 형체조차 없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니 받침이 없어도 떨어지지 않았고 보호도 필요없다.
이거면 되려나. 옥새를 전부 분해했을 때 나온 주먹만한 보석. 옥새의 구조도 이게 아마 남은 꿈 에너지 전부. 그리고 이것이 옥새 그 자체. 유비는 그것을 손에 쥐고 고민했다.
하나. 제가 아는 모든 것을 묶었는데 하나를 잘 모르겠다. 뭘까. 오래 안본건데, 그게 어디 한두개여야지. 별 생각없이 생각했다. 빛인가. 그 순간 시작과 끝이 의미를 가지고 태어났다. 스스로 무엇을 한 것인지도 모르니 상황을 이해할 턱이 없는 유비는 그저 태어남에 휩쓸렸다.
그렇게 세상이 태어났다.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유비가 깨닫는 것은 초등학교 과학시간에나 배웠던 것들이 실제로 땅에 기어다니고 바다에 움직일 때였다. 물론 그때까지도 긴 시간이 걸렸지만 시간이란 것도 잊었던 그에게는 현재나 과거나 큰 차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신이 된것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냥 존재했다. 엮은 것들에 신과 종교도 엮어놔서 막연히 그런것이 있음은 느낄 수 있었지만 명확한 건 아니었다. 신도 마도 인간의 믿음으로 확고해진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인간이 생겨났을 때였다.
예전 입구라고 불렀던 곳이 있었다. 거기서 흘러들어온 것들이 스스로 뭉치고 구르더니 생명이 되었다. 그리고 또 열심히 구르더니 출구로 나가곤 했다. 또 오랜 시간이 지나서 출구 앞에는 죽음이 자리했고 입구 앞에는 탄생이 자리했다. 유비는 그제야 세상이 다시 태어났음을 완벽하게 인지했다.
- 나는 인간은 인간이었나봐.
유비는 말을 멈추고 제 눈을 가리켰다.
- 이건 저승사자들의 창이야. 자신의 죄를 갚을 수록 붉은 색이 사라져. 사람들이 만든 저승의 개념에 내가 맞아서, 나는 거기에서 있기 시작했어.
염라도 만났다며 웃는 그에게 제갈량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상상보다 더 참담한 긴 시간에 눌려 죽을 것 같았다. 유비는 숙인 제갈량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절대로 예전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 내가 언제 죽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마 마지막 옥새의 파편을 엮었을 때가 아니었을까 싶어. 그래서 명부에 내 사인은 자살이 됐더라. 이럴거면 그 고생을 하며 엮은 보람이 있나 살짝 고민했는데, 지금은 잘했다고 생각해. 우리가 이렇게 다시 만났잖아. 제갈량.
유비는 아직 작은 몸을 안았다. 헤어지면서 끌어안은 몸은 자신과 비슷했는데, 이 몸은 작았다. 하지만 태어나던 순간엔 더 작았고, 영혼을 찾았을 때는 그보다도 작았다.
- 나 많이 만났어. 다시 만났어. 너도 봤지. 지금 찬이와 함께 있어.
수많은 영웅패들, 신선들, 사람들은 새로운 모습으로, 예전과 비슷한 모습으로도 태어났다. 저승에서 일하니 영혼을 만날 수 있는 기회도 많아 유비는 전부 확인할 수 있었다. 공손찬의 경우에는 조운이 태어난것에 맞춰 살짝 내려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기다리고, 만나고, 또 기다리고, 찾고, 기다리고 기다려서. 지금이 됐다. 여기까지 왔다. 길다, 라는 말로 정리해버리는 그가 야속할 정도로 참 먼,
먼.
- 다시 만나서 기뻐.
유비의 마지막 말은 울음이 있었다. 다시 만나고 나서 늘 웃기만 하던 사람의 첫 울음이었다. 그러나 제갈량에게 유비는 사실 잘 웃고, 잘 울던 사람이었다.
- 주군.
- 그 말을 다시 듣게 될 줄 몰랐어.
- 주군.
- 이젠 아무도 모르는데.
- ...유비님. 나의 주군. 당신만이 나의 꿈입니다.
- 하하. 정말로 너를 다시 만날 줄 몰랐어...
그 다음 말은 결국 물에 섞여 들리지 않았다. 아이처럼 떨며 우는 그를 작은 제 몸으로 끌어안으며 제갈량도 울었다. 끌어안은 몸에 없는 온기가 그리웠다.
17.
유비는 그 후 종종 들렀다. 그 전처럼 매번 등하교를 함께 하지 않은건 이번에 싸웠던 것이 커서 당분간 큰 위험이 없기 때문이었고 제갈량을 보느라 쌓인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하교길은 간신히 챙기긴 했다.
- 너 요새 기분 좋아보인다?
주유의 말에도 웃어 넘길 수 있을 정도로 기분이 좋다. 당연한 말을 하나. 비록 자주 보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그걸 하나하나 따지고 들 순 없었다. 어쨌든 그는 지금 자신의 일이 있는 사람이다. 뭐, 좋은 일이 있긴 하네. 그러나 서서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 왜그래, 서서?
- 제갈량, 어디 아프지 않아?
- 괜찮아. 그때 쓰러진 것 때문에 그래? 별 문제 없어.
- 그렇지만 안색이 안좋은 거 같아.
- 크게 아프지 않아.
다정한 걱정에 절로 미소가 나왔지만 영문 모를 걱정이었다. 원래 제갈량은 잔병을 쉽게 앓았다. 대부분 뭐든 할 수 있었지만 건강만은 마음먹은대로 되지 않더라. 체육점수도 완벽한건 애초에 쓰러질 때까지 요구하지도 않고 기술로 대부분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근엔 그리 앓지 않았는데. 이것저것 겪은 것이 많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제갈량은 최근 벌어진 일을 생각하며 웃었다.
그 후 둘이 한참을 울고 웃고 이야기하다 잠들었고, 다음날 제갈량은 열이 올라 하루를 쉬었다. 아픈 사람곁에 가면 안좋다며 그가 오지 않은 게 꽤 아쉬웠다. 신선일 시절엔 그리도 먹이고 싶어하더니 이제는 필요하건만 받을 수가 없다. 서로의 상태가 바뀌어도 엇갈린 상황이라는 건 그리 달라지지도 않아서 또 웃었다. 그날은 꿈도 꾸지 않고 푹 잤다. 이제 더 꿀 꿈도 없겠지만 말이다.
- 자기관리에 체력은 기본이지. 그것도 못하면 이번 시험은 내가 이기겠군.
- 왜그래, 사마의. 확실히 내가 체력이 너보다 못하긴 해도 네게 질리가 없잖아. 지금까지의 전적을 봐도 모르겠어?
- 못하다는 것을 안다면 적어도 무리는 안하는 게 좋다.
- ...그렇게 안좋나?
제갈량은 그제야 제 얼굴을 만져보았다. 역시 잘 모르겠다. 서서는 원래 상냥하지만 크게 뭐라 하지 않는 사람까지 나서니 드디어 생각이 미친 것이다. 제갈량의 물음에 사마의는 보던 책으로 시선을 돌렸고 주유도 살짝 끄덕였다.
결국 그날 일이 터졌다. 오랜만에 함께 집에 가던 도중 갑자기 제갈량이 쓰러졌다. 서서는 당황했다. 길에는 사람도 없었다. 제 친구는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해 둘이 다닐 땐 언제나 한적한 곳을 다녔기 때문이다. 어떡해.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순간에 그가 있었다. 실제로는 처음 봤지만 알고 있었다. 언제나 다정하게 웃는 사람이었다. 제갈량이랑 언제나 같이 있던 상냥한.
- 오면 안돼.
다가오려던 서서를 그가 부드럽게 저지했다.
- 도와주세요. 제갈량이 아파요.
- 서서, 괜찮아. 옆에 있어줘.
- 도와주세요.
- 곧 사람이 올 거야. 그 사람은 반드시 너와 제갈량을 도와줄테니까 기다려. 그리고 아마 제갈량은 잠깐 잠이 든 것뿐이야. 그러니까 서서가 옆에서 제갈량을 지켜줘.
어째서 도와주지 않는 걸까. 그렇게나 웃었는데. 야속한 것도 그때 뿐이었다. 그가 더 울것 같은 얼굴이었다. 당장이라도 달려오고 싶은 듯 손은 이쪽으로 뻗어져 있었는데도, 완고했다. 손을 잡아줘. 그의 말대로 손을 잡았다. 그대로 제갈량에게 괜찮을 거라고 말해줘. 서서는 그가 시킨대로 말했다. 네가 있을 거라고 해줘. 함께 있으니까, 너는 괜찮아... 마지막 그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서서가 돌아봤을 때 그는 사라지고 없었지만 분명 울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뭐였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서서는 궁금했다. 그렇게 울 정도라면 가까이 와줬으면 좋았을텐데. 머지않아 어떤 남자가 이쪽을 보고는 급히 뛰어왔다. 그는 서서에게 상황을 듣고 아직 의식이 없는 제갈량을 업어 급히 근처 병원으로 뛰었다. 나중에 서서는 그가 형사이며, 왕윤이라는 이름이라는 걸 전해들었다.
18.
- 2주 만이네요.
염려하는 서서를 두고 돌아가는 하교 길, 여전히 사람 없는 길에 멈추니 딱 하나 더 걸음 소리가 들렸다. 제갈량은 뒤를 돌았다.
- 서서에게 들었습니다. 나타나셨다고요. 그런데 금방 사라졌다 하더군요.
- 서서 곁에 다가가는 건 어려우니까.
- 그뿐입니까?
- 서서처럼 강한 생명력의 영혼에 우리같은 사람들은 가까이 잘 못 가.
- 그럼 왜 제 곁엔 안오셨습니까.
유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 낮에는 학교에 있으니 서서와 있다 해도 집에선 오실 수 있었잖아요.
- 제갈량.
- 주군. 이제와서 안오시면 곤란합니다. 겨우 당신을 만났는데.
한발 다가서니 한발 물러난다. 서로 끌어안았던 것이 거짓말처럼 거리가 멀었다. 그 이상은 다가올 의지가 없는 유비에게 제갈량도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 기다렸습니다.
- 그건, 미안해.
- 기다리게 만드신게 맞습니까?
- 그럴 생각은...
- 그렇다면 왜 거두지 않았습니까.
제갈량의 말에 유비가 드디어 눈을 맞췄다.
- 아주 어릴 때 오셨죠. 제게 말을 하셨어요. 저는 그 목소리를 기억했습니다. 필사적으로 당신의 목소리를 기억해서 결국 다시 만났어요. 겨우 다시 만났잖아요, 우리.
함께 울던 밤에 나눈 대화를 전부 기억하진 못한다. 하지만 분명 우리는 재회를 기뻐했다. 온기없는 몸을 끌어안은 것도 진심이었고 제 옷이 다 구겨지도록 쥐어잡은 것도 당신이었다. 그럴 생각이 없었으면 나를 거뒀어야지.
- 기다리게 해놓고, 만나게 해놓고, 다 떠올리게 만들어놓고 대체 이제와서!
- 내가 어떻게 그래!
유비의 외침에 말이 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 지금같이 좋은 기회가 없었어! 너와 있던 사람들이 태어났어. 예전처럼 싸우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시대가, 하고싶은걸 스스로 생각하고 할 수 있는 순간이 겨우 왔단 말이야.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걸 막아. 내가 어떻게 너를,
유비의 시선이 땅에 박혔다. 지금도 선명한 과거가 머리에 오갔다.
- 차라리 네가 태어났을 때 아예 오지 않았으면 편히 살았을까.
- 그런 가정은 필요 없어요. 저는 이제와서 도망치려고 하는 당신에게 화가 나는 겁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몰랐으면 아예 떠날 생각이었죠?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럴 생각이었다.
- 그러지 마세요. 기억이 없었던 때도, 모두 생각난 지금도 나는 당신이 그립습니다.
제갈량은 한걸음 다가갔다. 유비는 움직이지 못했다.
- 인간이 되니 알겠습니다. 모든걸 스스로 생각하고 정해야 하는 삶이 얼마나 힘든지, 책임을 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명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인간이었을 땐 당연했던 것이 신선의 기억을 떠올리자 새로워졌다. 2주의 부재는 제갈량에게도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새로 부여받은 삶을 생각하기엔 충분한 시간이기도 했다.
- 주군. 솔직히 말씀드리면 신선일 때가 좀 더 편했습니다. 인간은 복잡합니다. 해야 할 것도 많고, 불필요한 것도 많습니다.
신선이었을 때는 필요하지 않았던 유비의 모든 호의가 얼마나 다정했는지를 이제는 안다. 인간이 되어서 좋은 점 중 하나였다. 당신의 선의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 기쁘다.
- 하지만 이거 하나는 좋더군요.
둘의 거리는 절반 정도로 줄어있었다.
- 뭐가?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였다.
- 자유입니다.
- 자유?
- 저는 이제 신선이 아니니 옥새에 명령에 따를 것도 없고, 책임을 질 수 있으니 무엇이든 원해도 괜찮게 된겁니다.
신선일 때는 할 수 없던 일들. 꿈을 꾸는 것. 바라는 것을 원하는 것. 드림배틀의 보조와 옥새의 비호라는 생성된 의무에 복종하는 것. 그것을 제갈량은 한번은 거부했고 결국엔 선택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조차 없으니까. 책임은 그때 전부 완수했다.
- 내가 당신을 원해도 괜찮다는 소리죠.
신선일 때는 할 수 없었던 자신만을 위한 욕망을 가져도 된다. 그것이 이렇게나 기쁘다. 신선일 때 느꼈던 그 기쁨을 이제는 솔직하게 받아들여도 되는 것이다.
- 주군.
- 안돼.
- 저는 당신이,
- 나는 죽었어!
내려오는 어둠 속으로 뒷걸음질을 친다. 빛이 어울리고 희망 그 자체였던 사람은 대체 언제부터 저 어둠이 어울리게 되었을까. 그래도 유비는 유비였고, 제갈량이 기억하는 그대로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 전엔 인간과 신선이였다면 지금은 삶과 죽음으로 나뉘었을 뿐인가. 참 어지간히도 함께 못하는 삶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같이 있다. 그 무엇보다 제갈량은 이 순간에 집중하고 싶었다.
- 저는 전부 말씀 드렸습니다. 이렇게나 말씀드린 건 당신에게 편지를 쓴 이후로는 처음일텐데.
- 제갈량.
- 주군은 어떻습니까. 지금 저희 상황 말고 그저 주군의 생각을 말해주세요. 제가 가장 알고싶고, 가장 원하는 걸 이제 주군께서 들려주실 차례입니다.
예전의 나는 당신의 마음을 묻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어. 제갈량의 말에 유비도 더이상은 도망갈 곳이 없음을 알았다.
- ...대체 왜 이렇게 됐지. 나는 그냥 네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그걸로 충분했는데.
- 그럼 당신이 주면 되잖아요. 전 그걸로 충분합니다.
- 아니지. 산 것이 어딜 오려고.
제갈량이 반응하는 것보다 유비가 잡아당기는게 빨랐다. 거의 구르다시피 넘어진 두 사람 앞에는 창으로 내려 꽂은 것 치고는 태연히 서있는,
- 찬아.
그녀가.
19.
- 내가 말했지? 다음 달이 없는 날에 오겠다고. 유감이야, 유비. 서류가 아직 통과가 안됐어.
달려보자, 조운. 공손찬의 말과 함께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검은 창에 푸른 빛이 돌았다. 진심으로 온다. 그녀의 돌진과 유비의 방패가 나타난 것은 거의 동시였다.
- 찬아, 잠시만!
- 난 분명히 말했어! 시간도 줬어! 비켜, 유비!
- 안돼, 못 비켜!
어느새 두사람은 제갈량에겐 낯선 옷을 입고 있었다. 긴 두루마기가 휘날리고 바람처럼 나타난 천이 그들의 얼굴을 가렸다. 저승사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흔히 생각할 수 있는 모습으로 두 사람은 대치했다.
- 무슨 짓이야?
- 찬이 너야 말로 왜그래?
- 난 분명히 경고했어.
- 아직 서류심사에서 탈락하지 않았잖아.
- 물론 안했지. 그런데 유비, 나는 분명히 기한도 함께 줬던 걸로 기억하는데.
- 그건....
- 그래. 나는 여러 조건을 줬지만, 분명히 다음 달이 없는 날이라고 확실하게 말했어. 내가 이긴거야.
- 그래도.. 못 비켜. 제갈량을 죽게 두지 않을 거야.
- 그럼 싸워.
거기까지가 그녀의 자비였다. 이젠 신선이 아니라 전투능력이 없는 제갈량의 앞을 유비가 비키지 못함을 알기에 그녀는 폭풍처럼 공격해왔다. 찔러오는 창에 용서는 없다. 바로 알 수 있었다. 저 창에 조금이라도 닿는 순간 죽을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제 앞에 있는 존재에 닿기만 해도 생명이 멈추리라 제갈량은 직감했다. 생명의 반대편에 있는 자들이었다. 그래도. 금속이 부딪치는 심한 소음에 반사적으로 귀를 막았다. 창이 방패와 검 사이에 끼어있었다.
- 찬아, 대체 왜 그래.
- 너야말로 왜 그래, 유비. 네가 정이 많은 건 알아. 영혼도 많이 거둬준 것도 알아. 그렇지만 이렇게까지 일을 미루거나 멋대로 하진 않았잖아. 해야 할 일은 했잖아. 이거 일이야.
- 나도 알아. 그렇지만 조금만 더 시간을 줘도 되잖아. 찬아, 그 정도는 너도 봐줬잖아.
- 그게 이거랑 같아? 쟤는 규격외잖아! 당장 끌고가야해! 아니면 너부터 먼저 가!
창 전체를 휘감던 푸른 기운이 앞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아, 이거 진짜 위험한데.
그러나 그녀의 공격이 유비에 닿는 일은 없었다. 닿기 직전 갑자기 솟아올라온 흙벽에 둘이 갈라졌다. 방패와 새싹문양이 벽에서 빛나고 이내 무너져내렸다. 뭐야 이거? 당황한 공손찬과 달리 예전에 많이 봤던 유비는 뒤를 돌았다.
- 제갈량?
- ...주군.
- 축성?
참 많이 도움을 받은 기술이라 기억에 남았다. 제갈량은 얼떨떨한 얼굴로 뻗고있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과거엔 언제나 가지고 있었던 부채. 하지만 당연히 소멸하면서 없어졌던 것이 왜 제 손에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방금 그건 분명히, 신선마법. 신선마법인걸 알자 급격하게 현기증이 일었다. 앉는것도 버거워 자리에 넘어지자 유비는 반사적으로 다가오려 했지만 이내 제갈량에게 등을 돌렸다. 지금 자신이 닿는 건 위험을 가속하는 것 밖에는 안된다. 게다가 눈 앞에는 심상치 않은 기운도 있다.
- 미쳤어.
그녀의 눈에 시퍼렇게 타고 있었다.
- 걔 당장 내놔. 살아서 여기에 못두겠다. 저런 힘 쓰는 애를 두겠다고?
- 우리가 있어서 그래. 우리만 없으면 쓸 일 없어.
- 유비!
그녀의 호령에도 위치는 흔들리지 않았다. 무기도 상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 겨우 만났단 말이야.
무언의 대치 끝에 나온 말이었다. 둘은 동시에 유비를 보았다.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데. 공손찬의 창처럼 유비의 무기에도 빛이 감겼다.
- 찬아, 우리 정말 오래 있었잖아. 근데 나는 더 오래 있었다? 너도다 더 오래 이 일을 했어. 너희가 너무 보고싶어서. 만나고 싶어서. 생명이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계속 기다렸어. 백년이 천년이 됐고, 만년이 돼서 기억이 안날 정도로 아주 오래. 그동안 이 일을 하게 됐지. 네 말대로 이렇게까지 망친 적은 없었던 것 같아. 나는 너도 죽였는걸. 그러니까 나는 이 일을 망칠 생각은 없어. 하지만 이 애는 안돼. 제갈량만은 안돼.
- 어째서?
- 지키고 싶으니까. 이번에야말로 살아있게 하고 싶으니까. 제갈량이 말한대로 자유롭게, 자신의 의지대로, 이번에야말로 살아갈 수 있도록 지키고싶어. 언제나 중요한 순간에 지키지 못했으니까.
유비는 그렇게 말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알던 모습보다 앳되고 작다. 하지만 커가고 있다. 생명이 있기 때문에 변해가고있다. 너의 성장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른다. 너의 삶이 긴 기다림의 보상이었다. 제갈량. 웃는 얼굴이 다정했다.
- 도망쳐서 미안해. 너를 만나니 멀어지는게 무서웠어. 그러니까 제대로 말할게. 나는 이번에야말로 너를 지키고 싶어. 네가 불러주는 주군이란 호칭에 맞는 사람이 되고싶어. 네 삶을 이어갈 수 있게 만들고 싶어. 그러니까 이제 너를 만나러 오지 않을 거야. 저승사자는 산 사람 옆에 있으면 그 사람이 위험하게 되니까.
여기서 전부 끝내겠어. 마침내 그녀의 창처럼 유비의 무기도 전부 빛이 어렸다. 본래의 그는 방어에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제갈량 또한 그에게 주로 가르쳤던 것은 공격기술이었다. 지금까지는 방어 뿐이었다.
- 완전히 임무는 포기했구나, 유비. 개인적으로 움직이는 건 네 죄만 늘어날 뿐이야.
- 괜찮아. 어차피 내 죄는 이 세상 전부였으니까. 찬이 너도 내 눈을 늘 이상하게 생각했잖아?
- 맞아. 이제야 네 죄를 알게 됐네.
둘은 마주보는 그대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한순간이었다.
- 산 것.
퍼렇게 빛나는 창을 든 그녀가 제갈량을 내려보았다.
20.
공손찬은 그의 앞으로 하나의 종이를 펼쳤다. 읽을 수 없는 글씨였다.
- 인간 제갈량.
그녀가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제대로 불렀다.
- 이시간부로 이탈자 명단에서 그대를 제명한다. 이후 본인의 수명을 제외하고는 이곳과 관련되는 일은 없을것이다.
내용을 읽은 그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제갈량의 앞에 종이를 두니 알 수 없던 문자들이 읽혔다. 내용은 읽어준 것과 큰 차이는 없었지만 보다 상세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일종의 계약서나 명령서였고, 유비가 말해주던 내용이기도 했다.
그러나 전혀 기쁘지 않았다. 제갈량은 화를 참지 않고 공손찬을 노려보았다.
- 주군은 어디에 있지?
대답은 없었다.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의 찰나에 어느새 유비는 없고 그녀만 서있었다. 곁에 있었으면 저보다 기뻐했을 사람이 없다. 상냥했던 사람이 없다.
- 대답해!
- 여기에 쓰여있을텐데. 너는 더 이상 우리 세상에 관련할 자격이 없어. 유비가 어디에 있고 어떤 상태이든 이제 더는 상관 없단 소리야.
- 그건 당신이 정할 게 아냐.
- 아니, 내가 정해. 유비는 죽었고, 너는 살았으니까.
대답이 끝나자 그녀에게로 불덩이가 날았다. 피할 가치도 없기에 가볍게 창으로 쳐내니 이내 공기와 함께 사그러든다.
- 야, 산 것. 장난쳐?
- 말 돌리지 마라. 나는 주군이 어디있는지 물었어.
- 나도 대답했어. 알 거 없다고. 그리고 이 힘 작작 쓰지 그래? 이게 무슨 힘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힘은 네 영혼을 신나게 갉아먹기에 부족함이 없어. 무슨 뜻인지 알겠지? 기껏 유비가 지켜준 목숨 허투루 쓰지 말고 잘 간수하면서 네 수명이나 누리란 말이야. 산 것은 산 것대로 값어치를 해야지.
나는 네 덕분에 파트너를 잃었다고. 그녀는 거기까지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소리냐 묻고싶어도 몸이 일어나질 못했다. 영혼을 소모한다더니 거짓말은 아니었던 것 같다.
- 고등학교 졸업까지는 서서란 아이랑 같이 있으면 크게 데일 일도 없을 거야. 그럼 잘 살아라. 모든 것에 감사하면서 말이야.
공손찬은 그렇게 웃으며 그림자처럼 어두운 창을 휘두르고는 사라졌다. 많은 일이 일어났는데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하나는 안다. 예전부터 그리 두려워했던 일을 지금 제 눈앞에서 목격했다. 당신이 나보다 먼저 사라지지 않았으면 했는데. 그 작은 이기심이 이 세상을 만들고 당신을 그렇게 만들어버렸던걸까. 제갈량은 의식을 놓았다.
21.
이것은 꿈이다. 제갈량은 바로 알았다. 왜냐면 이제 없을 옥새가 옆에 떠있고 선계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녹음을 주로 이루던 그곳은 지상에서 보던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있어 훨씬 화사했고 아기자기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두 사람이 앉아있었다. 둘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왁자지껄 소란스러웠다. 그러고보면 따로따로 떼어놔도 뭐 그리 좋은걸 많이 찾은 사람들이었지. 서서. 한사람이 돌아본다. 화사하게 웃는다. 주군. 나머지 한사람이 돌아본다. 웃는다. 어서 와. 둘은 동시에 저를 부른다. 제갈량은 제 발 앞까지 뻗은 작은 꽃을 보았다. 예쁜 꽃이었다. 예쁜 햇살에 웃음에 뭐하나 예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안에 앉아있는 두사람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우리 셋은 단 한순간 뿐이었다. 두 사람에게 가려면 이 꽃을 밟고 가야 한다. 신선마법을 쓰면 간단히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 내가 나빴을까요.
읊조린 말에 두사람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당연했다. 이것은 자신의 꿈이다. 그래도 제갈량은 물었다.
- 내가 잘못했던 걸까요.
순진한 네가 험한 드림배틀에서 다치고 소멸할까 두려웠어. 서서는 상냥하게 웃었다. 당신께서. 뭐 하나 쉬운 적이 없는 나날이 스쳤다. 당신께서 행여나. 다칠까? 아니다. 절망할까? 그것도 있지만. 아니야. 고개를 저었다. 당신께서 행여나 떠나실까. 눈 앞에서 떠나실까봐. 그래서 두 번 목숨을 주었다. 당신께선 나를 얻기 위해 세번을 오셨는데 두번을 주지 못할까. 그러나 부족했나. 아니면 이 마음이 나빴을까. 옥새의 유지도 세상의 안녕도 아니라 그저 당신이 떠나실까. 그렇지만 그것이 잘못되었나. 눈 앞에서 당신이 떠나시는 것을 두려워 한 제가 나빴을까. 상냥하고 다정하고, 정말 상냥한 당신은 결국 세상을 탄생시키고 모두의 손을 잡았다. 아무도 당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그러나 결국 이것도 꿈이라 대답을 듣지 못해.
무너지는 꽃밭에서 잘못을 빌어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신의 꿈에서 있는 사람은 스스로 뿐이다.
일어날 시간이다.
22.
며칠 후 제갈량은 학교로 돌아왔고, 평소와 다름 없이 보내게 되었다. 자주 아팠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건강해졌고 본인 스스로도 체력이 필요함을 느꼈는지 운동도 거르지 않았다. 물론 공부는 당연했다. 주유는 이를 갈았고 사마의는 투덜거렸다.
- 서서.
제갈량은 제 친구에게 뭔가를 적은 종이를 주었다.
- 이게 뭐야?
- 유비, 라고 읽어.
- 유비?
- 응.
- 근데 이게 뭐야?
- 서서가 이걸 기억했으면 좋겠거든.
- 유비를?
- 응.
- 이 한자를?
- 한자까진 아니어도 괜찮아. 그냥 이름을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유비. 서서는 입에서 구르는 이름을 생각했다. 누구 이름이야? 당연한 질문이었다. 누구일 것 같아? 돌아온 질문에 뭐 그런식으로 대답하냐는 주유의 일갈이 있었지만 제갈량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으며 서서는 고민했다. 유비. 유비. 그러다 문득, 그 남자가 생각났다. 손을 이쪽으로 뻗던. 울려고 했던 사람이 있었지. 그런데 얼굴이 기억나질 않는다. 분명히 봤었는데. 그리고 무슨 말을 했었다. 그런데 기억이 안나.
- 량아, 나 기억이 안나. 뭔가, 누군가 있었는데!
- 누구?
- 그, 그 있잖아! 내가 막 그 형사아저씨 올거라고 했던 사람! 근데 왜 기억이 안나지..?
가까이 있진 않았지만 분명히 있었던.
- 괜찮아.
이리저리 고민하던 서서를 말린다. 제갈량? 잘 웃지 않는 친구가 드물게 웃었다.
- 그 사람 이름이 유비야.
22.
주유는 최근에 제갈량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밉살스러운 점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지만 날카롭게 쏘아대던 것이 조금 뭉툭해진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무슨 수작이지? 싶었지만 그런 수작을 피울 자는 아니다. 차라리 정면에서 이말저말 하는게 어울리지.
- 그런가? 나는 잘 모르겠는데.
- 선배는 대체 아는게 뭔데요!
태평한 말에 울컥 소리를 질러도 손책은 그저 웃었다.
- 먼저 물어봐놓고 이게 뭐야!
- 그야 주유가 끙끙거리고 있으니 들어줄까 했던 거지!
- 그럼 좀 알아오던가!
- 아야, 아니 그렇다고 해도 일단 다른 학년이라 나도....
- 그럼 아는척을 말아야지!
사실 이렇게 신경써주는 점이 고맙지만, 솔직하게 나가는 건 조금 부끄럽다. 그럴 때,
- 저런, 꽈당주유. 기껏 선배가 생각해줬는데 고맙다고 하는게 예의잖아.
저 망할.
- 있을 때 잘해드려. 손책님이야 워낙 품이 넓지만 솔직해져 나쁠게 있겠어?
- 네가 상관할 바 아니거든!
- 그야 그렇지. 그래도 일단은 친구니 조언을 해주는 거야. 너 전에 살짝 싸웠을 때도 서서 잡고 한시간 넘게 이야기했잖아?
- 뭐, 진짜? 주유!
- 야!!!
이상해? 누가? 원래 저자식은 이상한 놈이야!! 어디서 본적도 없는 괴상한 부채를 휘적거리며 가버리는 제갈량의 등 뒤로 주유의 고함이 울렸다. 당장 뛰어가려는 그녀의 허리를 잡고 말리던 손책은 문득 이상한듯 중얼거렸다.
손책'님'?
사마의는 제갈량이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했다. 근래 어디에 정신팔고 다니는지 넋을 놓더니(물론 그와중에 있던 모의고사 1등을 놓치지 않아 부아가 났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쌩쌩히 돌아다닌다. 오히려 전보다 더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을 진심으로 무시하진 않았지만 진심으로 대하지 않는 태도가 마음에 안들었는데 최근에는 거의 그러지 않는다는 것이 증거였다. 물론 잘난 맛에 사는 녀석이어서 크게 변하진 않아서 주유가 씩씩거리고 있긴 했지만.
- 사마의. 법학 쪽은 어디가 좋지?
이런 점도 꽤나 달라졌다. 예전의 그는 뭐든 대부분 잘하는 재능탓인지 미래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뭘 해도 어차피 될 것인데 지금부터 준비해서 뭐하냐는 투였는데 지금은 이렇게 물어올 때도 있었다. 사실 처음엔 스스로도 놀랐다. 제갈량이 무언가를 물어오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탓이다.
- 그건 왜?
- 왜긴. 너는 법률 쪽으로 진학한다고 했잖아? 그러니 너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고.
- 너도 이쪽으로 올 생각인가?
- 글쎄. 관심은 좀 있지만 진학은 안할 거 같아. 나는 좀 더 무난한 쪽을 생각하고 있어서.
그러면서도 자신이 준 것들은 꼼꼼하게 살핀다.
- 대학에서 복수전공으로 해도 좋겠군.
- 법학을?
- 나 정도면 그쯤이야 우습지. 왜?
고개를 까닥이며 웃는 모습에서 주유의 고함이 떠올랐다.
- ...네가 범법자가 되면 누구보다 먼저 내가 널 잡고 말 거다.
- 그거 좋지. 그런데 사마의, 그보다 먼저 다음 모의고사에서 날 이겨보는 것부터 하는 게 어때?
사마의는 생각했다. 정신은 차렸지만, 여전히 재수없는 놈이다.
서서는 최근에 제갈량에게 공부를 배우고 있다. 사실 서서를 제외하면 셋은 전국에서 놀 수도 있을 정도의 우수한 학생들이다. 가뜩이나 공부가 어려운 서서와는 간극이 커 넷이 모여 있을 때도 그 점을 크게 짚은 적은 없었다. 서로 이해가 어려우니까. 그런데 그 암묵적인 부분을 다름아닌 서서를 가장 아끼는 제갈량이 찔러온 것이다. 셋은 당황했지만 그는 당당했다. 실제로 제갈량이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서서와 함께 했던 말은 '어째서 이렇게 되느냐'였으니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다.
그럼에도 제갈량은 끈질겼다. 그녀보다 더 많은 문제집과 교과서를 보며 이해할 때까지 가르치고 함께 공부했다.
- 제갈량.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그녀는 언제나 솔직하게 물었고 이번에도 그랬다. 제갈량은 해설서에서 고개를 들었다.
- 어려워?
- 어렵긴 한데 지금까지 제갈량이 나한테 이런 적이 없어서.
- 하긴. 서서, 나는 사실 네가 그냥 적당히 모르고, 알고 싶은 것만 알고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했거든.
어찌 들으면 참 잔인한 말이었지만 그것이 제갈량이 해주는 배려임을 알고있다. 이해할 수 없으니 놓아둔 것이다. 그것이 정확하겠지.
- 서서.
- 응.
- 서서는 여전히 이 세상이 아름답다고 생각해?
서서가 그런 말을 했었나? 조금 고민했는데 어쩐지 그런 말을 한 적도 있는 것 같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 나는 그렇게 생각 안해.
제갈량은 단호했다.
- 분명 지금부터 네가 공부하고 알아갈 세상은 그 생각과 많이 다를 수 있어. 옛날의 난 아마 그게 무서웠을 거야. 결국 틀렸다는 걸 알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부터는 제대로 하고 싶어.
- 제대로?
- 그래. 서서. 세상은 그리 아름답지 않지만, 믿으면 그렇게 될 수도 있어.
- 믿어?
- 믿는 거야. 아름답다고. 하지만 주변이 그리 두지 않겠지? 그때 이길 수 있는 힘이 필요한 거야. 우리에게 힘은 아는 것.
- 그래서 공부하자고 하는 거야?
- 맞아. 사실 공부 자체에 의미는 없다고 생각해. 여기 있는 정보들이 나중에 쓰이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성적을 확보하면 적어도 기회를 하나를 더 잡을 수 있어. 수많은 기회와 그 앞에 있는 가치들을 존중하고 있어. 만약 다른게 있으면 그걸 해도 좋아. 그렇지만 성적이 안되서 서서 네가 원하는 기회를 잡지 못하면 아쉽잖아.
나 처럼은 안해도 좋으니까 할 수 있는 만큼 해보는 것도 좋다는 거야. 제갈량처럼은 못해. 투덜거림에 둘이 마주보며 웃었다. 그 후로 서서는 좀 더 집중하고 있다.
23.
이러면 될까요.
아무도 없는 하교길에서 이젠 만나지 못하는 그들을 떠올렸다. 그 후 더이상 만나지 못했다. 그런 낌새도 느끼지 못하게 됐다. 무거웠던 몸이 가벼워진 것을 보니 정말로 다 끝난 것이다. 그 사실이 비참하기도 했다. 이 삶에 의미가 있을까 생각을 했지만 우습게도 너무 많다는 걸 떠올렸다. 삶이라는 그 자체부터 곁에 있는 수많은 인연까지. 생각하지 않고 살았을 뿐이지 스스로는 나름대로 뿌리를 내려 살아가고 있었다. 서럽게도. 그래서 그는 이 시대에 나를 내렸겠지.
이렇게 살면 되는 걸까요.
당신이 지켜준 이 삶을 나는 필사적으로, 살아가면 되는 걸까요.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답해주는 이는 없었다. 과거에 남은 자는 이제 오롯이 저 뿐이다. 당신은 이런 시간을 살았던걸까. 이 외로움을 당신께선 내 삶으로. 그것으로 족하다 하셨는가. 제갈량은 울지 않았다.
그럼 살아야지. 아무것도 기억 못하는 상태에서 태어났어도 그것을 사랑해준 당신을 위해서라도 잘 살아야지. 자신에게 상냥한 시대에 내려준 제 주군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아내야지.
하지만 주군. 나는 지금, 이제와서 얄궂게도 신선이었던 때도 그리워집니다. 그때는 당신 하나로 내 세상은 충분했으니까. 그 작은 세상이 이토록이나 그립다.
그렇다, 그립다. 너무 그립다.
24.
그래서 제갈량은 지금 제 눈 앞에 있는 것이 헛것인줄 알았다.
"주군?"
"제갈량!"
제갈량 21세. 적벽대학 경영학과 2학년. 특기는 말로 상대방 조지기이나 취미는 무술. 제갈량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간을 팼다.
25.
정말 깨끗한 주먹이었지. 칭찬으로 한 말이나 매서운 눈에 유비는 다시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학교에서 얻어맞고 얼이 빠진건 유비뿐이 아니었다. 아마 주변 전원이 그랬을 것이다. 주유와 서서가 마침 지나다 발견해 택시에 들이밀어 현재는 제갈량의 집.
- 주군.
- 네.
- 말씀하셔야죠?
싱긋 웃는 모습은 눈물 나게 예쁜데 주변에 살을 에는 냉기에 눈물이 날 것 같다.
- 그, 그..... 하나만 물어봐도, 돼?
- 말씀하세요.
- 왜, 왜 화났어?
제갈량은 인생의 두번째로 주먹을 날렸다. 정확하게는 전생부터 쓴 부채.
-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죽었다고 말하고 할 때는 언제고! 그러다 갑자기 공손찬 님이랑 싸우질 않나, 아니 싸움이 싫어 드림배틀까지 폐지시켰던 분이 대체 무슨 짓입니까! 그리고 갑자기 사라지고는, 뭐요? 왜 화가 났냐고요?
- 저기, 그게.
- 입 다무세요. 아직 저 할말 많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대체 당신 혼자서 말하고 정리하고 그딴 버릇은 대체 어디서 들었습니까? 제가 있을땐 언제나 제게 말하라고 누누히 말씀을 드렸는데! 당신같이 작은 머리로 뭘 한다고요!
- 저, 기.
- 나한테는 아무것도 못하게 해놓고! 당신 혼자 전부! 내가 그렇게까지 믿음이 안갑니까? 이제 신선이 아니라서? 신선마법 같은건 지금이라도 쓸 수 있거든요? 난 최고였으니까!
분에 못이겨 크게 올라간 부채에 냉기가 일었다.
- 자, 잠깐 제갈량! 위험하니까! 그거 쓰면 네 영혼이 힘드니까 그만두자!
- 당신의 그런 점이 짜증난다고!!
바닥에 내팽개친 부채는 빛처럼 분해되어 사라졌다. 유비는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 제갈량. 진정해. 전부 물어봐. 전부 대답할게. 그러니까 힘 쓰지마. 응?
이렇게 불같이 화낸 걸 본적은 없는데. 유비는 당황했다. 인간이 되어서 그런걸까. 몸이 떨릴 정도로 화를 나게 한거 같은데 떠오르는게 사실 너무 많아서 뭘 꼬집어야 할지 모르겠다. 자신이 저지른 짓을 하나하나 곱씹을 때, 유비는 제갈량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있음을 알았다. 제갈량? 얼굴을 보려고 떼어놓으려 했더니 잡혔다.
- 왜.
- 응?
- 왜 따듯해요.
- 나?
- 그럼 여기 당신말고 누가 있어요.
- 아, 그렇지. 그렇지만 인간은 체온이 있잖아.
- 그래요. 인간은 따뜻하죠.
유비는 간신히 제갈량이 묻고 싶은 것을 알았다.
- 맞아. 살아있는 인간은 따뜻하지.
그제야 왈칵 울음이 터졌다. 아무런 온도도 없던 몸이 아니라 제대로 살아있다.
- 어떻게? 이게 꿈이라면 지독해요.
- 아니야. 나 제대로 여기 있어. 나 왔어, 제갈량.
다정함에 또 울었다.
26.
그러니까. 한참 후에야 유비는 입을 열 수 있었다.
- 그 때 찬이랑 정말 진심으로 싸우다 사라졌던 것부터 설명하면 되나?
제갈량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비는 멋쩍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 그 때, 찬이랑 싸워서 내가 사라진 게 아냐.
각자의 무기에 데리고 있는 영혼의 힘을 넣어 진심으로 싸우려고 한 것 까지는 사실이나 맞부딪치기 직전, 제 몸 안에서 순식간에 뭔가 불타올랐다. 그러곤 정신차리니 재판장이었다. 죗값을 다 치룬 저승사자들이 가는 최후의 관문.
- 왜 거기에 갑자기 내가 갔는지 모르겠어. 설명해달라고 해도 신들은 한숨만 푹푹 내쉬었고. 그러더니 말하더라. 환생할건지 부활할건지. 원래 다 잊고 환생하는 길로 내보내지만 나는 일단 이 세상을 다시 만들었잖아. 그래서 선택권을 준다고 하더라고.
환생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어. 나는 정말 오래 있었고, 거기에 지친 것도 있었어. 다행스럽게 이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잘 살고 있었고. 그렇지만. 음.
유비는 한참이나 어물거렸다. 그러나 이제와서 숨길 것도 없으니. 네가 걸려서.
- 정말 다 괜찮았는데 너를 잊는다고 생각하니까 싫어서. 그래서 다시 왔어.
부활절차가 생각보다 까다로워서 이제야 왔지만....거기까지 말한 유비는 생각난 듯 제갈량을 보았다.
- 그런데, 공손찬이 너한테 말했다고 했는데?
- 네?
이건 또 뜬금없는 소리다.
- 나 오기 전에 찬이를 만났거든. 그때 찬이가 너한테 말했으니 바로 가면 된다고 했어.
- 말 안했어요.
- 응?
- 애초에 공손찬 님은 이젠 관여하지 말라고....
거기까지 말하던 제갈량은 그 때 했던 말들을 다시 떠올렸다. 뭐라고 그랬더라. 기껏 지켜준 목숨 간수 잘하라고 했고, 그 후에 뭐라 그랬지? 나는 네 덕분에 파트너를 잃었다고. 인간이 되었으니 잃은 건 맞긴 한데.
설마 이건가? 진짜 이거냐? 이걸 대체 누가 그렇게 알아듣는가. 심지어 그 상황에서? 그래서 제 주군은 해맑게 저를 찾아와 부른건가. 제갈량은 오랫동안 잊었던 두통이 오는 것을 느꼈다. 이마를 짚으니 또 어디 아프냐고 허둥지둥하는 모습이 그립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쌓인 이야기도 많고 사실 따지고 싶은 것도 많다.
- 주군.
- 응?
- 신분증 있죠.
- 응? 있긴 한데.
- 그럼 따라오세요. 갈 데가 있으니까.
- 어디가게?
- 증명서 쓰러요.
- 응?
- 당신 두면 자꾸 사고치고 가버리니까 아예 못박아둬야겠어요.
- 응??
- 결혼부터 하죠.
- 뭐?! 어?!
- 세계가 재구축된 것 중 이거 하난 좋네요. 당신의 그 박애정신 탓인지 이번 세상은 그런 구별이 없거든요.
- 어? 어?? 제갈량??
- 괜찮습니다. 저 재산도 꽤 있어서 당신 하나 정도는 문제 없어요. 애초에 저 하나가 걸려서 이리 오셨다면서요. 그러니 응당 제가 책임을 져야죠.
- 아니, 저기, 제갈량. 잠깐만? 응?
- 신선 제갈량, 다시 한번 주군을 자-알 뵙습니다. 지금부터는 영원히요.
27.
저 멍청이는 가서도 저러냐. 공손찬은 혀를 끌끌 차며 제갈량의 손에 질질 끌려가는 유비의 곁에서 비켰다. 이제 산 사람들인 그들은 더이상 그녀를 보지 못한다. 상관없다. 사는 세상이 다르니까. 외롭냐고 묻냐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 그렇지만 그 때는 놀랐습니다. 갑작스럽게 싸운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게 위로부터 명령이었다니.
조운의 말에 공손찬은 어깨를 으쓱였다. 유비나 그녀나 싸움 자체를 싫어하진 않지만 그런 일 하나로 진심으로 부딪치진 않는다. 유비의 죄는 세계의 탄생으로 이미 충분했지만 본인이 그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자신의 의지를 내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더이상 생각하지 않는 것. 위하지 않는 것. 그것이 유비에게 남은 죄였고, 그렇기에 죄는 아무리 일을 해도 벗겨지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붉은색은 이제 거의 남지 않았다. 앞으로 수 년이면 끝난다. 자신의 구역에서 사는 저 둘의 영혼을 제 손으로 거두지 않는게 조금 아쉽지만, 믿음직한 후임이 있으니 괜찮으리라.
이젠 잘 좀 살아, 이 바보야. 그녀는 웃으며 하늘로 뛰어올랐다. 오늘은 꽤 기분 좋게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연파랑(조운찬 편)
공손찬은 명망있는 장군이었다. 부하를 다스릴 줄 알았으며 백성에게 연민할 줄 알았고 문무에 뛰어나 모두가 존경하는 이였다. 더군다나 전쟁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이루었으니 나라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고 선망만큼 시기또한 많이 적도 많았다. 그랬기 때문에 공손찬이란 장군이 남성이 아닌 여성임이 알려졌을 때, 적들은 이를 기회로 삽시간에 물어 뜯었다. 아끼던 백성도 충성스러운 부하들도 그녀의 앞에서 흩어지고 바스러졌다. 차라리 나를 죽여라. 그녀의 절규가 울렸다.
가장 먼저 그녀가 여성임을 알았으나 알려지지 않게 도움을 주었던 조운마저 목숨을 잃었을 때, 그녀는 더이상의 저항을 멈추었다. 누구보다 용맹하고 영리한 가신을 잃은 탓도 컸지만 이 이상의 희생을 바라지 않는 마음이 앞섰다. 오라를 받았다.
많은 이들이 오가던 제 성은 피비린내와 시체가 가득했고 그 사이를 걸어오는 황제와 관리들이 지독했다. 그녀는 바닥에 침을 뱉었다. 관리들은 당장이라도 죽이라며 길길 날뛰었지만 황제는 차분했다. 죽음이 앞에 있었다. 상관없다. 오히려 그것이 마땅하다. 함께 생사를 넘었던 수많은 이들이 저 때문에 죽었다. 이제라도 따라가는 것이 맞는 일이다. 그러나 제 앞의 황제는 엉뚱한 말을 그녀에게 주었다. 이대로 네 죄를 인정해 자신에게 용서를 구한다면 가신으로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노라고.
공손찬은 장사였다. 성별을 떠나 남들보다 강한 힘과 민첩성을 자랑했고 노력하여 쌓아온 지성으로 전장의 승리를 가져온 장군이었다. 그녀는 한때 머리를 조아렸던 남자를 바라보고, 땅에 머리를 숙였다.
내 평생의 한은 한 때 네 놈을 모셨다는 일이다.
순간 거센 바람이 불었다. 사람들이 일제히 눈을 감았고 공손찬 역시 고개를 돌렸으나 그 순간 손이 느슨해졌음을 알았다. 어째서 단단히 묶인 오라가 풀렸는진 알 수 없으나 그녀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제 목울 누르고있던 칼을 잡아 병사를 밀쳐 그대로 있는 힘껏 제앞의 황제의 목에 휘둘렀다. 장군으로서 전장의 선봉에 섰던 이로서 사람의 머리는 쉽게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그 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를 죽이진 못했으나 절반 이상의 관리가 그녀에 의해 죽었으며,
젠장. 죽는구나. 공손찬은 끝없이 밀려오는 황제의 군사에 아득함을 느꼈다. 피에 젖은 칼은 미끄러지고 이젠 사람도 흐릿한 형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죽음은 각오했지만 저 멍청한 관리들의 목숨을 다 따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 그녀는 맨 처음 베어버린 머리통을 발로 찼다. 기겁하며 물러나는 병사들의 꼴이 웃기다. 소리를 지르며 다가오는 누군가를 그녀는 기꺼이 맞이하기로 했다.
지쳤다. 정말로 지쳤다. 여자로 태어나 기회를 얻고싶어 성별까지 숨기고 기어올라왔건만 결국은 이모양이 되어버린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인가. 그저 당당히 살아보고자, 내 능력을 펼치고자 한게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아니다. 이것을 잘못이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자신을 위해 죽어간 모든 이와 조운에게 면목이 없지 않은가. 머리 위로 칼이 올라왔다.
나는 잘못되지 않았어!
그 순간 무언가가 그녀의 눈을 덮었다. 아무런 온기가 없었지만 얼굴에 닿는 손끝이, 부드럽게
고통이 길진 않을거야.
죽음이 말했다.
* * *
그래서 내가 죽었다고.
응.
제 앞의 저승사자를 두고 침착할 수 있었던 건 죽음을 직감했던 순간을 기억했기 때문이며 나는 무해하다 라는 얼굴로 불길한 검은옷을 펄럭이는 사람에게 기운이 빠진 것도 있었다.그녀는 저승사자로부터 앞으로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인간의 영혼은 삶을 끝낸 후 명계로 가 재판을 받고 다음의 길을 결정하지만 영혼에 새겨지는 죄를 지은 자들은 그 죗값을 우선 치뤄야 한다는 것. 그녀 역시 여기에 해당되어 직접 안내를 하기 위해 눈앞의 저승사자가 왔다는 것까지. 죽어서도 일이란 사실에 질리기도 했지만 이번엔 자신이 저지른 죄를 갚는 일이다. 성실하게 해야겠지.
있잖아. 다른사람들은 알 수 없어?
다른 사람들?
내 부하들은 어떻게 됐어?
음...내 구역이라면 어떻게든...근데 요즘 죽은 사람들이 많아서.
...그건 그렇겠지.
지금만 해도 제가 죽인 인간만 몇인가. 그녀는 헤아리기를 포기했다. 다만 각자의 죗값을 치루고 무사히 명계로 넘어가길 바랄 뿐이다. 하지만 한 명. 그 사람만은 알고 싶다. 모든걸 알았던. 조운이란 사람이 어떻게 됐는 지는 알 수 있을까? 그녀의 물음에 저승사자는 목록을 펼쳤다. 이리저리 살피던 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 영혼은, 명계에 오지 못했어.
그런가. ...조운도, 군사였으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이 영혼은 소멸판정이 났어.
뭐?
영혼인 상태로 생사에 관여를 했어. 그것도 꽤 큰 죄인데 그렇게 하려고 힘을 너무 많이 쓴게 문제가 됐어.
이 영혼은 곧 없어질거야.
기억나는 건 갑자기 불어왔던 바람. 풀렸던 오라. 찾아왔던 울분의 기회.
아이고 이제 끝이니 간단히 풀자. 공손찬은 저승사자에게 부탁했음. 조운을 구해달라고. 그렇게 사라질 이가 아니라고. 저승사자는 난감해했음. 이미 영혼이 너무 불안정한 상태라 일을 맡길 수조차 없다고.
내가 하면 돼! 내가 조운 대신 일을 하겠어! 그의 죄를 전부 내가 받을테니, 이대로 사라지게 하지 말아줘.
그녀의 말에 저승사자는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고민하는가 싶더니 결국 한숨을 내쉬고 그녀의 손을 잡았음. 그리고 꺼져가는 하늘색의 불꽃을 건네주었지. 그는 불안정한 조운의 영혼을 위해 작은 보석에 넣어주었고 후일 그 보석은 그녀의 귀걸이가 되었다.
그는 공손찬의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자신의 담당구역에서 함께 일해주길 부탁함. 저승사자 중에서도 상당히 큰 영역을 혼자 담당하고 있어 일손이 부족하다는 이유였고 아직 일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고 부탁까지 들어준 이의 말을 거절할 순 없었음.
그러고보니 아직 통성명도 못했네. 당신이야 내 이름은 이미 알고 있겠지만.
귀걸이로 가공된 보석을 받는 김에 묻자 제 저승사자이자 앞으로의 일동료는 참 사람좋은 얼굴로 웃었다.
유비야. 모르는 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줘. 잘부탁해, 찬아.
그럼 미안한데 옷 좀 바꿔줄 수 있을까. 여자옷은 일 할 때 불편하니까.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 *
공손찬과 유비는 아주 오래 같이 일했음. 둘이어도 여전히 넓은 구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는것을 겪어가며 함께 있었음. 최근 공손찬의 고민은 유비 저것이 치루라는 죗값은 안치루고 자꾸 기한만 늘리고있어서 어째야 하는지, 다. 아직 자신 또한 기한이 남았으니 괜찮지만 나 없으면 저 덜떨어진 저승사자를 어쩌면 좋을까,도 고민이다. 가뜩이나 속터지게 하는데 제갈량이라는 이탈자까지 튀어나와 주변을 도니까 성질이 난다.(....
조운의 영혼은 상당히 회복해서 공손찬과는 대화가 가능한 상태이다. 조금 무리하면 모습을 보이는 것 까진 가능하나 찬은 대화만 해도 좋으니 무리하지 말라고 했다. 여전히 사이가 좋다. 유비가 언젠가 둘은 연인이야? 라고 물었지만그렇게 말랑한 관계가 아니야, 라며 말하는 공손찬에 비해서 조운은 잘 못알아듣는 속도라 뭐라고 말했다. 유비는 ? 하고 끝냈지만 유비가 조운처럼 데리고있는 영혼 일부는 쯧쯧 하며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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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공손찬의 이름은 공손화. 남녀쌍둥이로 태어났고 즉 찬은 원래 자신의 남자형제 이름. 그렇지만 태어나면서 남자형제는 몸이 약했고 그녀는 장사였고. 화는 언제나 찬을 걱정했음. 찬은 그런 화에게 언제나 잘 웃었고.
부모는 이름난 명가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나쁜집안은 아니었으며 드물게 깨어있는 분들이었음. 그래서 찬과 화에게 동등하게 기회를 주었고 하고싶은 것을 하도록 했음. 화는 움직이는 걸 좋아했고 찬은 안에서 하는걸 좋아하고. 둘은 참 극명히 달랐음. 그리고 결국 찬이 쓰러짐. 가족 모두 찬을 걱정했지만 나아지질 않았지.
화야. 나는 네가 좋다. 왜그래 찬아. 나는 네가 나였으면 했어. 어째서 화가 너였을까. 내가 화고 네가 찬이었다면 좀 더 화가 행복하지 않았을까. 그런말 하지마. 화의 말에 찬은 웃었고, 얼마 후 죽었음. 부모는 화에게 찬이 화와 찬 중에서 뭘 해도 좋다고 했음. 화는 처음에 그 말을 믿을 수 없었지만 살아가는것에 있어서 많은 기회가 있고 그 기회가 찬이라는 이름에 더 많이 있음을 알았음.
찬아. 내가 찬이 되어도 괜찮겠니. 네가 화가 되어도 좋으니.
화야. 나는 화(花)가 좋다. 그 가는 것에서 그 풍성하고 어여쁘게 피워내는 화가 좋다.
그렇게 화는 찬이 되었고 공손찬은 그녀의 이름이 되었다.
후일 그녀는 사망 후 유비에게 부탁해 자신의 명부를 보았다. 제대로 공손찬이라 적혀 있었다. 또 유비에게 부탁해 제 형제의 명부를 찾았다. 화라 적혀 있었다. 모든걸 유비에게 말하자 유비는 놀라워하다 이내 다정히 웃었다. 찬은 네 이름이로구나.
-
조운을 만난건 당연히 전쟁터. 난 이쪽을 잘 모릅니다2345 (아는게 뮬란밖에 없음) 찬의 나라는 언제나 전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병사는 언제나 부족했을 것 같음. 둘이 서로 알게된 건 찬이가 조운을 구했을 것 같다. 엎어진 걸 뭐하는거야! 하면서 끄집어당긴 것으로 인연이 됐을 듯.
조운은 오래된 가문의 막내아들이 아니었을까. 장남도 누님들도 있어서 특별히 짊어질 것도 없는. 문무 전부 평균 이상 능통했지만 이미 맨 첫형님이 관직에 있기때문에 굳이 자신이 나설 것 까진 없어서 무과로 갔을듯. 찬은 일반병사였지만 조운은 일반병보단 조금 높고. 그래서 찬은 엎어져있는 것을 끄집어냈을때 내심 헉 했다. 아니 이사람 상관이잖아. 조운이 못하는게 아니라 실전이 처음이고 찬이가 워낙 힘도 좋고 유능했을 뿐이다.
아 이렇게 구구절절 쓰고싶은게 아닌데 난 그냥 조운과 공손찬이 만나서 서로의 관계가 역전되고 조운이 공손찬에게 이 나라의 기둥이 되어줬으면 한다 이 나라엔 네가 필요하고 내게도 네가 필요하다 내가 네 뒤에 있으면 좋겠다 등...
아무튼 저 인연으로 둘이 알게됐고 공손찬은 뭐든 잘할테니까(!) 금방 눈에 띄고 그렇겠지 조운역시 도움을 받은 것도 있지만 객관적으로도 남이 따라올 수 없는 공적을 냈기때문에 적극적으로 추천해서 점점 위로 올라가면 좋겠다 그러다 어느 전쟁터에서 공손찬이 부상을 입었고 옆에 있던 조운이 그녀를 들쳐업었는데 생각외로 가벼움에 처음으로 놀랐고, 치료를 위해 막사로 데려와 옷을 벗겼을 때 기겁을 했겠지. 걱정되어서 들어오려는 병사들을 오면 안된다고 필사적으로 막고 의원만 불러와서 치료했음. 그리고 깨어나 사태를 파악해 창백해진 찬이 앞에 조운이 처음으로 무릎을 꿇었다.
자, 잠깐 무슨.
내 이름과 내 가문을 걸고 말한다. 그대는 자랑스러운 무인이며 그 사실을 지키기 위해 나 역시 최선을 다할것을.
조, 운?
....지켜준다는 소리야.
무엇을, 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었음. 찬은 한참이나 당황스럽고 어리둥절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지만 이내 이불을 덮고 휙 돌아누웠음. 나보다 강해지고나서 그런소리를 해.
조운. 근데 그때 갑자기 왜그랬어? 엄청 당황했는데.
그때요?
왜, 나한테 처음 무릎 꿇었을 때.
찬이 정식으로 나라에 관직을 받고 다스리고 지킬 땅에서 지낸지 몇 해, 찬이 물었고 조운은 멋쩍은 얼굴로 대답했다.
주군이 멋있어서요.
음?
여자의 몸으로 여기까지 올라온 것도, 강한 것도 전부 다 너무 대단해서 그랬죠. 당황하기도 했고요.
당황한다고 그런 짓을 해?
찬은 웃음을 터뜨렸고 조운은 으쓱하고 말았음. 사실 그때 어떻게든 그녀를 붙잡아야겠단 생각밖에 안했으니까.
이 나라에 남자로 태어나 무를 잡았으니 싸움은 평생의 의무였고 일상과 진배없지만 그럼에도 첫 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찬과 조운이 만난 전투가 바로 조운의 첫 전투였으면.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지만 실전과 생각은 다르겠고 거기서 나타난 것이 찬이겠지. 그 인연으로 만난 찬을 조운은 처음엔 관심을 가졌고 점점 그것은 존경으로 바뀌어가고 있었을 것 같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거침없이 길을 열어 전장 한가운데 서있는 모습을 누구라도 존경하지 않을 수 있을까.
왜 그렇게까지 하는거지.
무엇을 말입니까.
아직 서로의 입장이 평등하지 못했던 시절 조운이 물었다. 이미 첫만남부터 상당한 망신이어서 조운은 더이상 그런 것을 묻는 것에 부끄럼이 없었다.
무섭지 않나.
무섭죠. 싸움이 두렵지 않은 자도 있습니까. 다만 약속했습니다.
약속?
이 이름에 부끄럽지 않도록 살겠다고 죽은 가족에게 맹세했습니다. 이 이름에 닿는 모든 가능성에서 도망가지 않고, 힘이 닿는 곳까지 나아가보기로.
기회는 이곳저곳에 있었을텐데.
그랬죠. 저는 유능하니까.
찬이 조금 웃었다.
하지만 이 곳이 내 몸에 닿는 것과 가장 가깝습니다. 전쟁을 하는 나라에서 여기보다 가까운 기회도 없고요.
모두 지쳐있는 얼굴 가운데서 혼자 당당한 이였다. 이런 싸움같은 곳에서 지지 않고 발판을 삼아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욕망으로 빛났다. 그때부터 조운은 궁금해졌다. 이 작은 사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도대체 어디까지 보고 있고 가고자 하는지가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다. 그러자 제 앞의 길이 뚫린 것 같았다. 그 길 앞에 당당한 뒷모습이 있었으면 하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설마 여자일 줄 몰랐지만, 그것이 중요한 건 아니었다. 중요했지만 그것이 판단의 기준이 되진 않았다. 조운에게 그이자 그녀는 여전히 미래가 궁금한 사람이었으며 앞서나가는 것에 두려움이 없는 존경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그녀가 인정받아 나라에서 땅을 받고 그곳을 윤택하게 다스리는 것을 누구보다 자랑스러워 한 것은 조운이었다.
뭔가 뒤죽박죽 풀긴 했는데 시간대열 정리를 다시 좀 하는게 좋을거같고 아무튼 이런과정이었고 과정에서 있었던 일들 몇개는 나중에 풀기로 하자 끝은 맨 처음에 풀었던대로 청렴하고 강고한 찬의 태도에 불만인 관리들과 질투에 눈먼황제의 폭정으로 그지경이 됨.
찬은 전쟁광은 아니다 싸움을 좋아하는것도 아니지만 언제나 전쟁이 있는 나라에선 남자징병은 일상이고 당연히 아들로 기록된 찬역시 끌려갔을 뿐. 여기서 도망칠 수 없으니 필사적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싸우고 또 싸웠고, 이 이름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매사에 당당하게 있으려고 했을 뿐이다. 찬은 대부분 괜찮았지만 괜찮지 않을 때도 있었고 그 과정에서 비밀을 아는 조운에게 많이 의지를 했겠지. 조운 또한 그러기 위해 그녀의 뒤에 있었을테고. 죽음은 불행했지만 둘의 삶은 그렇게 불행하지만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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